▲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32:22-32, 약 4:1-10, 눅 22:39-46)
설교문
[한가위 명절 풍경]
내일은 추석입니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올해는 긴 추석 연휴로 인해 이동 인원은 3천 218만명으로 지난해보다 8.2%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추석 당일에는 667만대 정도가 고속도로를 오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향을 찾고, 가족과 친지들과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가 자주 있으면 좋겠지만 평소에는 저마다 바쁜 삶을 살기에 명절 외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명절이 되면 시골 마을에는 여기저기 현수막이 붙습니다. "고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가위, 풍성한 명절 보내세요."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사랑하는 딸, 아들아, 올 추석에는 오지 말고, 건강이나 단디 챙겨라"는 현수막이 붙었었고, 이런 재미있는 현수막도 있었습니다. "에미야, 어서 와라! 올해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 주마"
평소에 잘 만나지 못하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을 명절에라도 보고 싶은 부모님들의 마음이 가득 담긴 현수막이 아닌가 합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님 계신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아들네로 오는 역귀성도 많아지고, 또 가족과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대가족 사회에서 핵가족 시대로, 농경문화에서 도시문화로 바뀌면서 예전의 마을공동체와 같은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가득 들어찬 아파트 속에서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이들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모처럼 만에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명절이 더욱 애틋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하여 추석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2023년 11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가구 중 36%는 1인 가구인데, 그래서 추석에도 나 홀로 보내는 사람들 또한 꽤 많습니다. '혼추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추석 연휴를 자기를 계발하는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한 교육 업체가 20~40대 성인 625명에게 추석 계획을 물었더니, '집콕 휴식'(30.2%) '자격증·취업 준비'(28.4%) '아르바이트 등 근무'(10.5%)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추석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 경제 사정이 여러 가지로 좋지 못한 사람들은 추석이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또 추석에 일이 많고, 음식 준비와 여러 가지 가사 노동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여성들 또한 명절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고, 집안 어른들께 이런 저런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든지 간에 아마도 한가위 저녁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 마음이 풍성하고, 기분도 한결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보름달은 곡물로 치면 수확 직전의 알이 꽉 찬 모습입니다. 또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음력 5월은 농부들이 한참 일할 때라, 땀을 흘리면서 등거리가 마를 날이 없지만, 8월은 한 해 농사가 거의 다 마무리된 때여서 봄철과는 달리 신선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보름달처럼 꽉 찬 곡물들을 수확하면서 한 해 동안 수고한 보람을 느꼈고, 모든 것이 풍성한 데다가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니 마음 가득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은 더 이상 옛날의 농경사회는 아니지만, 추석이면 자신의 한 해를 돌아보며 어떤 열매들을 맺었는지 살피고, 그것을 기반으로 또 다음 해를 준비하는 시간이 되면 좋을 듯 합니다.
[잘못 구하는 기도]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 기도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춰 자기 삶을 '조율'해 가는 것이라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은 주기적 점검이 필요하고,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 삶과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슨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본문의 2절, 3절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도 많이 하여 무릎이 낙타처럼 되어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앞서 야고보 사도는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싸움과 분쟁이 바로 육체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우리의 삶이 영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고, 육신의 즐거움에 치중한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욕심과 제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면 우리 기도 또한 오염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기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전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생각하시고, 자기 피조물이며 자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분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 존재의 깊이와 폭을 채워줄 수 있는 절대자에게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저 무한에 대한 갈망이 있고, 영원에 대한 동경이 있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바라고, 참됨과 밝은 빛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동경이 만나는 것, 그 만남에서 참된 평화와 삶의 뜻을 이루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깊이 사귀면 우리 주위의 모든 악마가 물러나고,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근심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됩니다.
지금 이 세대의 많은 이들은 영적 성장이 멎어버린 문화와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젊은이들은 초월적 차원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고, 어린이 청소년들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매우 적어지고 있습니다. 소비 사회에 살고 있기에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들이 얻으려는 행복과 만족이라는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를 재단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 사랑과 초월성, 그분의 신비와 영광보다는 그저 우리의 필요와 갈망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진리도 하나의 상품처럼 구매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승리는 맛보지 못하고, 마귀에게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허무와 불안의 늪에서 헤맵니다.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야고보 사도는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자본주의 문명이 부추기는 욕망의 확대는 잠시 기쁨과 행복과 웃음을 줄 수 있지만 결국 허무와 불안으로 끝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등지고 먼 곳으로 떠나 거기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 했던 작은 아들은 돼지가 먹는 콩꼬투리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교만을 떨었지만,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이 만든 세상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실제로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인류는 위대한 문명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지구 생태계는 파괴되어 인류를 위협하고, 인간 사회에는 불안과 걱정, 허무와 가치의 혼돈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새로 맺기]
이제 다시 인류는 새롭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 모든 식솔을 보내고, 홀로 남아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야곱은 야비한 인간입니다. 쌍둥이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가로챘고, 노쇠한 아버지 이삭의 눈이 어두운 상황을 이용해 간교하게 형의 축복을 빼앗습니다.
그의 이름 야곱은 성서가 증언하는 바 "발뒤꿈치"라는 뜻인데, 쌍둥이가 리브가의 뱃속에 있었고, 야곱은 그때부터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아당기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한편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남을 속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어원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속이고 발뒤꿈치를 붙잡아 끌어내리는 인간의 질투와 시기심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한번은 제 아버지께서 성서를 다 읽으시고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야곱 같은 파렴치한 인간에게 축복을 하시는가?" 유교적 상식이 내재화되어 있는 아버지에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니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야곱은 문제가 많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은 왜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고대 사회에서 맏아들, 즉 장자의 권리는 매우 높았습니다. 쌍둥이는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나는데, 야곱이 먼저 나왔다면 야곱에게 장자의 모든 권리가 주어졌겠지요. 불평등한 세상에서 금수저와 흙수저의 삶의 양식은 전혀 다릅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흙수저가 금수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실로 어렵습니다. 모욕과 굴욕감을 참아가며 엄청난 아부를 하거나, 아니면 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아마 야곱이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서의 발뒤꿈치를 끌어당기고 자기가 먼저 나왔다면 장자의 권리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의 인생은 흙수저가 되어 고달팠고, 그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남을 속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반드시 적이 생기고, 또 자신도 속임을 당합니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첫번째 결혼을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레아와 결혼해야 했으며, 20년 동안이나 라반의 종이 되어 일해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속이고 또 한편으로는 속임 당하며 살면서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사람은 설사 성공했다 하더라도 외로움에 묻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속임수로 지금의 부를 축적하였지만, 그 부유함을 가지고도 도저히 형 에서와 화해할 길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워보았지만, 남의 마음까지 돌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홀로 남아 번민합니다. 어떻게 형의 얼굴을 볼 것인가?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의 내용은 야곱과 천사의 씨름 장면을 묘사합니다. 누가 이긴 걸까요? 28절에 의하면 야곱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31절에 의하면 야곱은 생식과 번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엉덩이 환도뼈가 어긋나야 했고, 27절에 의하면 야곱은 자기 정체를 상대방에게 밝혀야 했습니다. 고대에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비밀과 운명을 아는 것이기에 이제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야곱은 이름을 밝혔고, 상대방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야곱이 굴복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씨름 이야기의 결론은 야곱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고 드러내어 상대방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 오히려 자신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씨름이라는 경기로만 본다면 야곱이 승리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날 밤 야곱은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이 승리하신다."입니다. 야곱은 자기 이름을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내놓고, 이제 속이는 자로, 남에게 해를 입히는 자로 살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간구했던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하나님이 승리한다"는 새 이름을 지어 주시고, 새로운 존재로,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사화복을 모두 맡긴 야곱은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형과의 화해를 이루어냅니다.
[기도 훈련]
오늘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체험했던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줍니다. 우선 제가 여러 번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만, 우리는 늘 하나님이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참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의미와 세계의 방향, 우주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됩니다. 기도란 바로 이 모든 것의 첫걸음이자 여정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요정을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전 과정입니다.
야곱은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을 붙들었고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진지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만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할 것인가? 후자를 선택했다면 여러분은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기도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 예배당이라는 공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생활하시는 어떤 공간이든지 어떤 시간이든지 반드시 계획을 세워서 꾸준히 기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없이 기도의 성숙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난 주 저의 설교를 진지하게 들으셨다면 여러분은 바로 기도를 시작하셨어야 합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짧게라도 자주 기도할 수 있도록 반드시 기도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20분씩 하루에 두 번 이상 기도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야곱은 모두를 떠나보내고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는 없습니다.
둘째, 실제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하는 동안 떠오르는 잡념을 없애야 합니다. 야곱은 자기 꼬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집중했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고, 그만큼 기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묵상으로 기도할 때 떠오르는 잡념을 없애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길어 올리게 됩니다. 초기에는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 잘 정리된 언어로 또박또박 명료하게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이 잡념을 없애는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기도도 좋습니다. 성경의 장면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깊이 묵상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작정 기도하다 보면 중언부언하게 되고, 아무리 길게 해 봐야 3-4분을 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매일 성경을 조금씩 읽어가며 그에 따른 묵상기도를 한다면 훨씬 더 깊은 기도가 가능합니다(Lectio Divina).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순서에 따라 자신만의 기도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고, 하나님께 하루의 일과를 아뢰며 편지를 써보는 것도 좋습니다. 흔히 '영성 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실제적인 방법들을 동원해서 잡념을 없애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기도를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셋째 인생의 여러 시기에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기도 동역자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매월 셋째 금요일에 금향로 기도회가 있는데, 여기에도 함께 해보시고, 기도 친구들을 만드셔서 기도 제목을 나누어 서로 중보 기도하면 좋습니다. 서로에게서 얻는 교훈도 있고, 상호 격려가 되며,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있는 분은 누군가를 찾아 그와 함께 기도할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며 기도의 멘토가 되시길 바랍니다. 어린 야곱에게는 아마 어머니 리브가를 비롯해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가 함께 기도하는 멘토였을 것입니다.
넷째 기도의 좋은 모델을 신중하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신중하고 사려 깊게 들음으로써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더 나은 기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솔직담백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는 기도의 사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기도에 대해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훌륭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대면하여 씨름한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밤샘 기도는 할아버지의 유산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에 죽었고(창 25:7), 이삭을 100세에 얻습니다(창 21:5).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창 25:20)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창 25:26). 그러니까 야곱은 어린 시절부터 15년 동안 할아버지가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동시에 유대교 전통에서 이삭은 오후 기도의 창시자인데, 그는 산책을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리브가를 맞이한 것도 바로 오후 기도 시간이었습니다(창 24:63). 하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드리는 공적인 기도를 잘 준비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선배들이 드린 다양한 기도가 나옵니다. 시편은 기도의 보물창고입니다. 비극이 우리를 찾아오고, 사방에 원수가 둘러싸여 있고, 탄식이 절로 나올 때, 우리는 시편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감사의 기도, 탄식의 기도, 분노의 기도, 깊은 슬픔의 기도, 우울함과 좌절과 절망할 때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고, 바울과 베드로 등 사도들의 좋은 기도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에 열심을 내시면, 기도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신앙 서적도 찾아 읽고, 좋은 기도문을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다섯째는 기도 제목들을 잘 관리하고 정돈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대가족을 거느린 것입니다. 그가 130세의 나이로 이집트에 올라가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파라오를 만났을 때, 자신을 소개하며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창 47:9). 얍복 강가의 체험 이후 야곱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험한 세월 동안 다양한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 대가족의 가장으로 인생의 다양한 역경이 있었으니 그럴 때마다 야곱은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세계기도정보>(죠이선교회, 2002)라는 책도 있고, 세계선교기도제목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 세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매일의 기도가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만의 기도 제목을 적은 기도 수첩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지들, 우리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이 나라의 여러 문제들, 개인의 내밀한 문제들, 이런 것들을 하나씩 적어서 늘 들고 다니며 시시때때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는 기도할 때 성경에 의지해서, 또 성령에 의지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옳게 행하시는 분에게 우리의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기도는 일종의 전기 코드와도 같습니다. 플러그를 제대로 맞춰서 꽂을 때 전기가 들어오고 기계가 작동하듯이, 우리가 기도의 플러그를 제대로 꽂아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씨름은 상대방과 서로 몸을 부대끼며 하는 경기입니다. 기도는 그 정도의 친밀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살을 살을 맞댄 듯한 관계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찾는 긴 밤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우리들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꿰뚫어 보시는 분의 이름과 그분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끈질긴 투쟁에 대해 증언합니다. 인내와 끈기로 하나님께 축복과 새로운 이름,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간구하는 기도의 밤이고, 주님 앞에서 우리 모든 것을 내어놓는 새로운 현실을 나타내 줍니다.
오늘 주님 예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두고 기도합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성서는 보도합니다. 어떤 기도였기에 땀이 핏방울이 될까요? 오늘 주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실 야곱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도했고,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들을 두고 기도할 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때로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일상은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기도 자세의 전형적인 표현 양식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되는 비참한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내 자유의지로 하나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을 수 있으며, 그렇게 내 모든 한계와 절망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약하고 곤궁하며 죄인임을 고백하며 항복할 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항복이 굴욕이 아니라, 항복이 행복을 가져오는 경우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참된 의미는 바로 이 세상을 지으신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기도는 바로 이것을 알고 느끼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한번 더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부터 당장 하나님과의 끈질긴 씨름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샅바를 단단히 붙들 때, 여러분은 새로운 이름을 얻고 여러분의 존재는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약할 때 강함을, 슬플 때 기쁨을, 갈등 중에 평정을,
박해나 공격을 받을 때 인내를,
유혹을 당할 때 지조를, 미움받을 때 사랑을,
일시적 유행을 따르며 시류에 편승하는 풍조 속에서
견고함과 멀리 보는 눈을 지니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