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찰과 조율"

2025년 9얼 28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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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단 9:3-4, 15-19, 빌 4:6-7, 마 6:5-8)

설교문

[큰 것 하나를 붙잡아야]

영국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자신의 유명한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Hedgehog an the Fox)에서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Ἀρχίλοχος, B.C.E. 680~645년)의 말 하나를 인용합니다.

"여우는 많은 걸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

이 격언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개는 여우가 온갖 잔꾀를 부린다 해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술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 말을 인용하여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우 부류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나 핵심을 꿰뚫는 비전이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로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자기모순 속에서 헤매거나, 자기분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고슴도치 부류는 '큰 것 하나'를 붙들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며, 수많은 파도가 결국은 하나의 바다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이들입니다. 보편적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서로 달라 보이는 것도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잘 연결하며 사회 구조와 인생의 전체 그림을 잘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우리 삶은 중층적이고 여러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매번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늘 그러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사람 같지만 실제로 내가 마주하는 세상과 남들은 이미 바뀌어 있고, 그들과 맺는 관계도 어제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나 또한 늘 변합니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달과 더불어 너무나도 급속한 사회변화 속에서 그 모든 상황을 다 따라잡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 정말 중요한 건 마음입니다. 대상들을 마주했을 때, 흔들리며 반응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느냐가 상대해야 할 세상의 복잡함보다도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도 사실은 세상 못지않게 복잡합니다. 영국의 시인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 7. 28.~1889. 6. 8)는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아! 마음이여,

마음에는 수많은 산이 있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무섭고 가팔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하네.

거기에 매달려 보지 않은 이들은 가벼이 여기지만,

우리의 얇은 참을성은 그 가파른 절벽과 깊이를 감당할 수 없네.

(O the mind, mind has mountains;

cliffs of fall Frightful, sheer, no-man-fathomed.

Hold them cheap May who ne'er hung there.

Nor does long our small Durance deal with that steep or deep.)

세상사의 복잡함만큼이나 우리 마음도 만 갈래로 나뉘고, 온갖 잡생각에 시달릴 때도 있고, 불쑥 올라오는 감정들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현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고 조언합니다.

[기도하는 교회]

그리스도교는 오래도록 마음을 지키는 방법으로 고요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수행을 해 왔습니다. 초대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구제하는 일과 다양한 봉사로 바빠졌을 때, 사도들이 다양한 사역들을 다른 지도자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큰 것을 붙들고 자기 마음을 먼저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지난 140년 동안 우리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사회의 암적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도덕성을 지니지 못한 채 세상과 불통하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비도덕한 인간들이 뉴스에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서글픕니다. 지난 주에 각 교단 총회를 마쳤는데, 우리 교단은 성소수자 목회 연구 특별위원회 신설 헌의안이 기각되었고, 예장 통합은 여성 총대 할당제 법제화가 부결되었으며, 합동측은, 여성에게는 강도사까지만 교역자의 자격을 허락하고, 목사의 자격은 남성으로만 한정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손현보 목사나 전광훈 씨에 대한 단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더 강해졌습니다. 주류 교회의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보수화와 극우화 속에서 진보적인 교회들이 제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하지만, 너무 미미하고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향린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들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고요히 머물러 기도해야 합니다.

8월 초에 장동원 목사께서 관상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해야 하는 이 계절에 저도 기도에 대한 하늘뜻펴기를 몇 차례 하려고 합니다. 실로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열심히 해 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드려야 하고,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기도하는 교인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인은 기도하고, 각 종교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도를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몸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며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들을 성찰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에 대해 기초부터 차근차근 함께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께 아뢰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의 본문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짧은 두 구절밖에 되지 않지만, 빌립보서의 본문은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자신이 들기에는 너무 큰 돌을 옮기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돌을 들어 옮기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애쓰는 아들을 보면서 "힘드냐?"고 물었습니다. "네, 모든 방법을 다 써봤는데 꼼짝도 안 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정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보았니?" 소년은 낙심되고 지친 표정으로 불평하듯 말했습니다. "네!" 그러자 아버지가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한 가지 방법을 쓰지 않았어. 너는 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단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능력밖에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매우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지만 과감하게 모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잠시 뒤에 부를 응답 찬송 365장은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눈물 나며 깊은 한숨 쉴 때', '괴로움과 두려움 있을 때', '죽음 앞에 겁이 날 때', '은밀한 죄가 떠오를 때', 주 예수께 아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이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어서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아뢰지 않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쉽게 절망하거나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창조주요, 구원자로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의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마태복음서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님이 다 알고 계신 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으로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고, 법적인 문제가 있으면 변호사를 찾아가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사명을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과연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요? 철학자에게 묻고, 인문학 강의를 듣고, 열심히 책을 읽기도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아뢰고 여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빌립보서의 본문은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비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다릅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도, 큰일이 닥치면 기도합니다. 막막하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은 염려로 가득 차고, 불안으로 흔들립니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움켜잡으려는 심정입니다. 혼돈의 한 가운데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빌립보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온갖 고생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 사도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명백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요, 구원자요, 주님이라는 것!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믿었기에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귀 막지 않으시고, 전부 들으십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는 순간 주님은 아끼는 자기 백성이 아뢴 것, 근심하고 고민하는 문제를 이제 자기 문제로 생각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 아뢴 사람은 걱정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는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담당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이 얻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걱정과 불안의 늪에서 바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기에 이제 기도하는 사람은 제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걱정과 불안의 늪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 지금 당장 자기가 해야 할 그 일만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고난이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감당할 수 있고, 또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미리 준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고 기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가 엄마 뱃속에서 계속 자라 이제 육체를 가지게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나 우주를 이해하는 정신을 얻게 되어,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그 모든 과정이 전부 기적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냥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 또한 어쩌다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향점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 섭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잘 모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하는 궁극적인 질문의 대답은 바로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삶이 지니는 깊은 뜻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더 넓고 깊은 이야기 속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는지, 굳이 우리가 함께 만났어야 했는지,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사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 "왜"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크신 안목과 장기적인 계획 속에서 내가 있을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제 자리를 잃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를 위한 회개]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기도합니까? 그리고 왜 기도합니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사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많은 기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도 인생에서 살다가 겪는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했던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절대자들에게 또는 귀신에게,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하는 기도는 우리 말고 세상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사귀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가운데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찾기 위함입니다.

오늘 읽은 제1성서에서 다니엘은 금식을 하고,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철저한 회개를 상징합니다. 금식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을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한 심정을 뜻하고,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는 것은 바로 죽어서 티끌 한 점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내 줍니다.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다니엘은 회개 기도를 합니다. 주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주님께 죄를 지었던 그 모든 것을 회개하며 다시 참된 신앙이 회복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기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주님, 들어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만민이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도성과 이 백성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이 기도는 그동안 우리가 자주 망각했던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은 만민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삶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주님의 뜻과 조율하지 않으면, 우리의 어리석음과 욕심으로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그동안 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제 맘대로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로 더 큰일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의 신학자 더글라스 홀은 "사람은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의미 있는 일을 하지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도, 삶에 어떠한 목적도 찾아내지 못할 때, 그래서 자신의 힘을 모두 쏟을 만큼 커다란 목적을 찾는 데 실패할 때 파괴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정다운 옮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비아, 2016. 110쪽) 이것이 밖으로 표출되면 범죄나 폭력이 되고, 안으로 파고들면 우울증이나 중독에 노출됩니다. 무의미와 허무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참아내지 못하고, 끓어오르는 감정에 휘둘리며, 자주 무의미와 허무에 빠진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삶과 신앙을 두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여야 합니다. 사람과 사귈 때도 자신만을 위해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이 있다면 아마 그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했다면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성찰과 조율]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엄정한 결단이 요청됩니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은 버려야 하는 냉혹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은, 살면서 일어나는 곤경으로부터 위안을 찾기 위해 도피하지 않으며, 곤경에 처해 있는 삶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이를 견뎌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제공하는 깊이를 맛볼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시작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보호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다시 기도를 시작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기적인 점검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양한 요소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입니다. 사업을 하든, 어떤 기관에서 일하든, 먼 여행을 떠나든, 공부를 하든, 심지어 집안일을 하든 더러는 멈춰야 합니다. 멈추어 서서, 우리가 가진 자원과 도구를 점검하고 필요한 것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올바른 사용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분주한 일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내 삶과 신앙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기도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표면적인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삶의 단단한 깊이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성찰하고 숙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중 반드시 필요한 것, 가지런히 해서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쌓아 놓은 잡동사니, 부스러기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여기서 골방이란 오로지 남은 절대 모르는 내 내면의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는 그 곳, 남은 침범할 수 없고 침범해서도 안되는 그 골방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참으로 기뻐하고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 홀로 있을 때도 하나님은 숨어서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중으로 숨어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마치 없는 분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특히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선은 내가 골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지 않고 분주하게 세상을 겉돌며 떠돌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가족 여러분! 이제 다시 기도를 시작합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당신을 향하여 저희를 만드셨기에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Fecisti nos ad te, Domine, et 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서만 진정한 본향에 이르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대면 속에서만 자기를 성찰할 수 있고,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여정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삶을 조율해 갈 때,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하루하루는 늘 기적이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사랑의 시작은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는 하루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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