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말 사이에서"

2025년 9월 7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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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암 8:2-12, 딤후 3:10-17, 눅 4:1-13

설교문

[길목 인문학-신학 강좌를 열면서]

지난 금요일에 하반기 길목 강좌로 "그리스도교 신앙 다시 세우기"를 시작했습니다. 61명이 신청하셨고, 첫 강의에는 50여 분이 참석하셨습니다. 1강은 "참되게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2시간 30분 동안 향우실이 뜨거운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동안 잘 묻지 않았던 물음들, '믿음이란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믿게 되었나?' '무엇을 믿는가?' '왜 믿는가?'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왜 믿음이 강조되는가?' '성숙한 믿음은 무엇이며, 믿음에도 등급이 있는가? 신학교 교실보다 더 진지한 눈빛들이 오가며 강의 후에 질의응답 시간에도 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아모스서에는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고, 사람들이 목말라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 물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오늘날 넘쳐나는 지식 정보들이 많지만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주일마다 전국의 수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평소에도 성서를 열심히 읽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참된 말씀을 제대로 듣는가를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넘쳐나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숱한 교회가 신앙생활을 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들을 애초에 차단하고, 맹목적인 믿음이 마치 참 신앙인 양 잘못 가르쳐서 한국교회에 반지성적 분위기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차분히 따져보고 성찰하지 않으니, 교인이라 하면서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세상과는 소통하지 못하고, 왜곡된 자기 신념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참된 신앙을 두고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가 불가능하기에, 진지한 교인들은 교회가 아닌 카페나 다른 모임을 만들어 신앙에 대한 여러 주제를 나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제대로 된 성서 공부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잘 들려주지 못하다 보니, 성서 공부에 목마른 사람들이 오히려 이단에 넘어가는 일마저 발생합니다.

한편 진보적인 교회에서도 하나님 말씀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통적 종교 언어들이 힘을 잃어가면서 그것을 대치하는 생명, 평화, 정의, 자유, 평등과 같은 가치들이 대안적으로 등장하지만, 이런 가치들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성서적 관점은 사라지고 세속의 인문학적 철학적 논의들이 은근슬쩍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특히 성서는 고대 문헌이기 때문에, 그때 거기에서 쓰인 문서를 지금 여기에서 이해하는 것이 꽤 노력이 필요한데, 그건 귀찮기도 하고, 바쁜 삶 한가운데서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처리하고, 밀려오는 선교 사역들을 감당하다 보면 사람의 말로 쓰인 성서 앞에서 그 말들을 깊이 묵상하고, 성서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뜻을 분석해 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되는지를 궁구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지만 성경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지만,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고, 신앙의 햇수는 쌓이지만, 말씀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는 교인들이 되고 맙니다.

[신앙 있는 교양인, 교양 있는 신앙인]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교인은 신앙은 있어 보이는데 교양이 없고, 진보적인 교인은 교양은 있는데 신앙이 없는 모양새가 펼쳐집니다. 제가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신앙 있는 교양인, 교양 있는 신앙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과 교양을 함께 갖춘 그리스도인의 양성은 한국 개신교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많은 이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에 근거하여 우리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을 감행하려는 종교적 인간이기 때문에 신앙과 영성을 배제하고는 높은 수준의 사회와 문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파편적 신념을 넘어서 좀 더 공적인 신앙과 영성을 갖추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인류가 반드시 고민해야 합니다. 한편 합리적 사고와 차분한 논리, 보편적 안목과 성숙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종교는 언제든 미신과 광신, 주술과 헛된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특히 교양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 종교 전통 밑바닥에 무속적 특성이 면면히 흐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서구 학문과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유입되었고, 시작부터가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서학이 지닌 평등 정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던 일부 유학자와 중인(中人)에게 호응을 불러일으켰지만, 유교 질서의 와해를 우려한 조선 사회의 지배층들은 철저하게 천주교를 탄압합니다.

한편 개신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한복판에서 근대화 바람을 타고 조선의 전통사회가 점점 쇠락해 가는 과정 중 이 땅에 들어옵니다. 개신교는 조선의 지배계급이 아닌 민간 속으로 스며들었고, 유교적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고, 무속적 신앙과 대결하면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후 이 땅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을 겪고,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게 되지요. 마을이 와해 되고, 전통이 사라지면서 고향에서 뿌리 뽑힌 다수의 사람은 새로운 공동체와 안식처를 찾게 되는데, 이때 한국교회가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개신교의 복음과 무속의 기복신앙이 뒤섞이고, 역사와 사회를 책임지려는 그리스도교의 높은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높은 도덕성은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으면 된다는 식의 매우 사적인 무속 신앙에 의해 흐릿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며 살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혼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피난처로만 교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믿고 복 받아서 나부터 잘살겠다는 사람들로 교회가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한국이 부유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자, 교회를 피난처로 삼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제힘으로 먹고살 만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반대로 교회를, 가진 자들이 친교를 나누며 저희끼리만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강력한 권력의 장으로 활용합니다.

한편 요사이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가스라이팅, 그루밍의 문제가 있는데,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은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서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루밍이나 가스라이팅에 가장 취약한 곳이 종교집단입니다. 신천지나 JMS, 통일교 등 각종 이단은 신앙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대표적인 곳이고, 물에 빠져 지푸라기도 잡아야 하는 이들을 끌어들여 온갖 착취를 하는 일들이 다 이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일어나는 심리적 지배와 억압, 착취 구조는 매우 친밀한 사이에서 더 극성을 부릴 수 있는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신앙을 들먹이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목사를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신처럼 떠받드는 권위구조는 더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비판적인 교양의 눈으로 살펴야 하고, 또 교양을 깊이 있는 신앙의 눈으로 심화해야 합니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 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신앙이고, 질문 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고, 우리를 뒤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흔들려야 할 신앙입니다. 머릿속에만 머무는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관념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깊고 넓은 것이 되려면 바로 비판적 지성으로 날카로워진 교양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는 유익]

디모데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성경이 얼마나 유익한지 디모데에게 차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은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재료로 가르치고, 논박하고, 바로잡고, 정의를 위해 교육하는 과정에서 바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여, 그가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깊이 찌르고 분석하며 또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다 보면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비춰보게 됩니다. 오목거울에 비추면 우리가 길쭉해지고, 볼록거울에 비추면 우리가 뚱뚱하게 보이는데, 우리를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더 나아가 온갖 선한 일을 하는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쓰면서 우리들이 가진 희망, 즉 예수 안에서 지닌 희망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답변할수록 준비하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준비된 사람으로 서려면 가장 먼저 성경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을 남에게 들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잘 모르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기아 현상과 성서를 살기]

제가 여러 곳에서 "성서를 보는 눈"이라는 강좌를 열었었는데, 그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나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1. 성경을 읽지 않거나, 2. 성경을 잘못 읽거나, 3. 성경을 제대로 읽고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 향린교회가 든든히 서지 못하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이 세상의 풍조에 휘둘린다면 그 이유 또한 위의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인데,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대로 사는 것이 뭔지를 모르거나, 읽어도 잘못 읽기 때문에 성경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900년 강화 북부 해안 홍의 마을에는 종순일이라는 부자 교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그의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를 빚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는 그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둡니다.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잡아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입니다.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전부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의 말씀을 들려준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오. 그래서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그는 빚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종순일은 또 마태복음서 19장 21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는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하고, 교회는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 묘지를 구입했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종순일은 누가복음서 10장 1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는 말씀을 읽게 되는데, 그는 즉시 아내와 함께 괴나리봇짐을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 후 그는 그렇게 강화, 석모, 주문, 옹진 등지의 외딴섬을 돌며 열 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삶에서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 구절은 누가 보아도 명확하지만, 또 어떤 성경 구절은 수없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고 잘 이해도 되지 않고 뜻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그때 거기에서 쓰였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저자와 우리의 간격은 너무 멀고 깊습니다. 시대와 문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렵고,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생기는 이유 중에는 우리가 성서 저자가 지녔던 신앙의 깊이만큼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 체험이 그만큼 얕다는 것이지요.

[성서를 잘못 읽은 사람들의 행태]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보면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이고,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 중에 이런 가짜 스승들이 많고, 그 밑에서 환호하는 교인들 또한 오늘 바울에게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이어야 할 교회에서조차도 사람의 말만 가득한 것이지요.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 낳았습니다. 농부가 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찬양했습니다.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서 자기 부인에게 말하기를 "여보 송아지 새끼가 두 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그 농부의 부인도 "아멘." 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이 되어 방 안에 있는 자기 아내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큰일났어. 아 글쎄 주님께 드리기로 한 송아지가 죽었어."

이런 농부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숙명여대 교양교육원에서 가르치는 김응교 교수가 쓰신 글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교수님이 숙명여대와 삼일교회 사이에 있는 '브라운 돈까스'라는 가게 입구에 "교회 단체 손님 사절"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걸 보고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식당에 들어가 주인에게 왜 이런 표지판을 세워 놓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들어오면 돈까스 하나 시켜놓고, 소그룹(셀) 모임을 해요. 기타 치고 노래 하는 경우도 있고요. 들어와서 안 나가요. 그리고 늦게 들어오는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주문 안 하고 물만 먹는 경우도 있어요.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아요."

이분에게 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남의 가게에 와서 장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염치도 없고,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보이는 삶의 행태가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성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에 밑줄을 치며 제대로 읽었다면 그것은 곧 삶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성서를 어떻게 읽었던 것일까요?

신학을 하기 전에 저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모님과 헤어져 낯선 곳에서의 첫 수업 시간!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에베레스트(초모랑마)산이 왜 세계에서 제일 높을까요?"

우리는 멀뚱멀뚱 있었지요. 그러자 교수님이 다시 말씀을 이어나가셨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이 제일 높은 건, 밑변이 제일 넓기 때문입니다. 받침이 튼튼하고 넓어야 높이 솟아오를 수 있지요. 그렇게 높이 솟아오르려면 튼튼히 기초를 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대학에 들어오셨으니 다양한 분야를 열심히 공부해서 밑변을 넓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폭넓게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에베레스트처럼 우뚝 솟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뚝 솟으면 되는 것이지 빨리 솟거나 늦게 솟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탐험가들이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고 도전을 하지요. 누가 먼저 올랐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산에 올랐느냐 못 올랐느냐가 중요하지요."

당시 교수님의 말씀은 제 삶과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햇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나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 말씀의 깊이에 다다랐는가? 그래서 그 말씀을 힘입어 하루를 살 수 있는가? 불평불만을 하기보다 감사의 찬양이 넘치는가? 더욱 매력적이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주고 있는가? 입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자!]

TV 프로그램 중에 극한 직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은 가구공장이 나왔는데, 못을 박거나 철로 된 나사를 사용하지 않는 고급 가구를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기계가 워낙 발달해서 나무를 자르고 매끈하게 만드는 작업도 모두 기계가 합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여전히 대패를 가지고 나무를 다듬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목수 30년 경력의 장인이었습니다. 손으로 나무를 느껴가며 대패질을 하시는데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몇 밀리미터 볼록하게 나온 부분을 쓱싹쓱싹하니 금방 울퉁불퉁하던 나무가 매끈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분의 손을 자세히 보니 손가락 두 개의 마디가 잘려있었습니다. 목수 30년 세월의 흔적이었습니다. 위대한 장인이라는 결실을 위해 이분은 수만번 실패를 했을 것이고, 심지어 손가락이 잘릴 정도의 아픔도 겪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서 그분의 실력이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성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이 정도의 세월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실수로 인해 상흔이 생기고, 가끔은 좌절을 겪더라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성장하려면 이 가구 장인의 투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지금 여러분은 빵만으로 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십니까? 그동안 우리 신앙 생활이 빵에 붙들려 있던 것은 아닙니까? 예수는 공생애 초기 사탄의 유혹을 모두 성경 말씀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유혹과 시련을 이겨낸 일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큰 자산이자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말씀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한 대목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을 때 변하십시오.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잃어버릴 만큼 완고한 마음을 지니지 마십시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애써 여러분 안에 심어 놓은 좋은 씨를 세상 걱정과 탐욕으로 숨 막히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씨를 뿌리시지만, 저희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좋은 땅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틈나는 대로 여러분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가득 뿌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 씨앗이 많은 열매가 되어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풍성한 소출을 얻으려면 땅을 갈아엎고, 돌은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을 가꾸시는데 게으르지 마십시오. 길목 강좌를 마치면 곧바로 이어서 성서배움마당을 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서부터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기초로 우리 삶을 세우지 않으면 바람이 불고 거센 물결이 일어날 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에 관한 질문으로 저를 찾아오신다면 저는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 나가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수많은 사람의 말들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넘쳐나는 말의 홍수 속에서 진정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분별하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서, 우리의 삶이 늘 생명력이 넘쳐나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진리 안에 굳게 머무십시오.

성서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으십시오.

수많은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온갖 선한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의 능력을 보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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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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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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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