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3:1-7, 고전 1:18-25, 요 9:17-29)
설교문
[어디에 안길 것인가?]
어떤 분이 운전을 하고 가는데, 정신병원 병동이 있는 건물 앞에서 그만 한쪽 바퀴를 죄고 있던 나사가 전부 풀려 버렸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는데, 풀려 버린 나사가 떼구르르 굴러서 하수구에 쏙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를 한쪽에 세워놓고 이걸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정신병원 병동의 환자가 큰 소리로 이 운전자에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나머지 바퀴가 멀쩡하면 나머지 세 바퀴에 있는 나사를 한 개씩 풀어서 앞바퀴를 조이고, 카센터로 가면 될 거 아니오!" 운전자가 듣기에 아주 적절한 충고였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이야기대로 얼른 다른 바퀴의 나사 하나씩 풀어 앞바퀴를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고맙다고 하고 한 가지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그렇게 총명하신데 왜 거기에 계십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프니까 여기에 있지, 멍청해서 여기에 있는 줄 아시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됩니다. 또 어느 것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고, 그것에 매몰됩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고,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엇이든지 성과를 내려면 집중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집착과 집중, 신념과 고정관념, 열심을 내는 것과 확증편향은 종이 한 장 차이라, 열심을 내면서도 독선에 빠지지 않고, 집중하여 성과를 내면서도 교만에 빠지지 않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굳센 신념을 지니면서 열린 귀를 가지고, 변화에 맞게 고치는 것도 역시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에 열중하면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 되지만 옳지 않은 길로 빠지면 죄인이 되고, 현명한 사람을 따르면 앞길이 훤하게 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을 좇아가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과 여러분의 현재 삶은 어떠한지요? 여러분은 삶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잘 분별하고 계신지요? 여러분 주위에는 배울만한 좋은 분들이 계신지요? 여러분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언제 집착으로 넘어가는지요? 여러분이 가지신 신념을 지금 어느 거울에 비춰서 살피고 계신지요?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늘 말씀을 봅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는 것에 꽂혀 있는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지혜인가?]
오늘 성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가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예수가 구원하는 능력이요, 세상을 밝힐 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진실합니다.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 자신의 학식, 유대인으로 지녔던 모든 종교적 열정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아멘'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할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도 동의할까요? 오늘 본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강력한 힘을 가진 이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로 온 백성을 먹이는 구원자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과 맞서 싸워 단칼에 적을 무찌르는 용사여야 했습니다. 특히 신명기 21장에 보면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23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이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니,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식민 백성에 불과한 유대인 예수에게서 참된 지혜가 나올 수는 없겠지요. 목수인 예수는 무식하고, 구약성경에도 단 한 번 등장하지 않는 촌동네 나사렛 출신이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된 지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명문가 집안의 자제가 유명한 학교인 아카데미아와 같은 곳에서 배워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 예수가 참된 지혜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이가 로마 황제보다 높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달리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지혜가 정말 온 생명을 구원했는가? 힘 있고 가진 것 많고, 지식 많은 이들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나? 도리어 망친 것은 아닌가? 그들이 가진 지식과 힘이라는 것이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로마 제국의 박해와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리스도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서 참된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부와 지식과 명성을 쌓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그런 사람이 마치 구원자가 될 것처럼 말합니다.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들을 뽑을 때도 역시 그런 것들이 기준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학벌이 높고, 꽤나 가진 것이 많고, 힘도 있는 사람들이 국회로 가서, 정치인이 되고,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정말 국민을 위해서 일했나요? 우리는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
이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한 집사님께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제게 보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내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거라!"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싫어요!" 아빠 왈 "그 사람이 빌 게이츠 딸인데~" 아들 왈 "그럼 좋아요!" 이렇게 아들을 설득한 아빠는 이제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갑니다. "당신 딸이 내 아들과 결혼했으면 합니다." 빌 게이츠 왈 "그럴 순 없지요!" "내 아들은 세계은행의 CEO인데요!" 그러자 빌 게이츠가 허락합니다. 이번에 이 사람은 세계은행 총재를 찾아가지요. "제 아들을 세계은행 CEO로 임명해 주시지요." "택도 없는 소리 마시오." "제 아들은 빌 게이츠의 사위요" "그럼 좋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것이 비지니스다!"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는 돈벌이와 비지니스라는 것이 대개 이러합니다. 만약 이 사람의 아들이 세계은행의 CEO 역할을 잘 해내고, 빌 게이츠의 딸과도 결혼 생활을 잘한다면 이 아빠는 유능한 사람이라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기 아들이나 빌 게이츠, 세계은행 총재의 욕구를 모두 꿰뚫고 있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채우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문제는 거짓말로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실력과 공정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결국 그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게 마련입니다. 주인공의 아들이 진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세계은행도 피해를 보고, 빌 게이츠도 손해를 입겠지요. 결혼 생활 또한 망가질 것이고, 이 아빠는 사기꾼이 되겠지요. 그런데도 세상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따라 거짓을 밥 먹듯이 하고,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지혜요, 능력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얘기를 들려 드리지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으로 돈을 사고팔며, 돈이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를 증식시키는 형태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부자가 되게 마련이지요. 제가 서기 장로님인 김은미 장로님께 돈 백만원을 빌렸다고 해 봅시다. 1년 뒤에 갚겠다고 하고 말이지요. 장로님께서 저를 믿으시니 빌려주시면, 저는 1년 동안 잘 쓰고, 1년이 지난 뒤에는 또 권사회 회장이신 이금희 권사님께 백만원만 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럼 권사님도 제게 빌려 주시겠지요. 그래서 권사님께 빌린 돈으로 김은미 장로님께 갚습니다. 1년 뒤에 갚겠다고 한 약속을 잘 지켰기 때문에 김은미 장로님은 저를 더욱 잘 믿게 됩니다. 1년이 지나고 다시 김은미 장로님께 백만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지난 번에 갚았기 때문에 또 빌려 줄 것입니다. 그럼 저는 그 돈으로 다시 이금희 권사님께 갚습니다. 그럼 이금희 권사님도 저를 잘 믿게 되겠지요. 그래서 1년마다 양쪽에게 빌리고 다시 갚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저는 쏙 빠지고,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린 다음, 서로 1년에 한 번씩 만나 돈을 주고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돈을 버는 방법이지요.
정말 참된 지혜와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세상에서 정직하고 진실함으로 세상을 이겨내는 그 능력과 지혜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런 지혜와 능력을 갖게 될까요?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을 고친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우리는 17절에서 29절까지만 읽었지만 9장 전체를 알아야 하기에 사건의 전말에 대해 요약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고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에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눈먼 사람은 예수께서 시킨 대로 실로암 못 가에 가서 눈을 씻고, 밝아진 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이웃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이웃 사람들은 이 사람이 예전에 눈먼 사람인지 그와 비슷한 사람인지 논쟁을 벌이는데, 그 눈먼 사람이 스스로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눈을 뜨게 된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바리새파에게 데려가자, 바리새파와의 새로운 논쟁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눈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범하였으므로 예수는 죄인이라는 의견과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징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견을 놓고 바리새파 사람들끼리 논쟁을 합니다. 자신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지자 눈멀었던 사람에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예수님은 "예언자"일 거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여전히 눈먼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바리새파는 이번에는 이 사람의 부모를 불러 다시 어떻게 그 사람이 보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대답을 회피하고, 아들이 다 큰 성인이니 다시 그에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눈멀었던 사람을 불러서 다시 논쟁이 시작됩니다.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예수를 죄인으로 규정하려는 바리새파와 예수는 예언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믿는 눈 뜬 사람의 대결이 있습니다. 이 대결에서 눈뜬 사람이 물러서지 않자, 바리새파는 이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고 마을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그런데 눈 뜬 사람은 거기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죄인이라고 매도했던 바리새파는 예수에게 따끔한 비판을 듣게 됩니다. 9장 전체를 마무리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보이는 삶에서 보는 삶으로]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 때문에 저는 오늘 이 사건을 영적으로, 우리들의 신앙과 관련해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 사건은 한편으로는 눈멀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뜨고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으로 확신하고,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를 죄인이라 규정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도리어 소경 취급을 당하는 바리새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과연 누가 눈먼 사람인가? 혹시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 믿고 있던 것이 우리를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것은 아닌지 살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음이라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 볼까요? 이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남들이 보고 들려주는 말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는 대로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이 사람은 자기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남들이 말하는 대로, 규정하는 대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 삶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노출되어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보지 못하는데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사생활이 거의 보장되지 않는 이 삶을!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남이 나를 보는지 안 보는 지를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이 이제 눈을 떴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남들이 말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참말인지 거짓인지 다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겼으며, 내 몸이 어떤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삶에서 벗어납니다. 눈을 뜨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육체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신적 자유도 얻게 됩니다.
오늘 눈 뜬 사람과 대결을 벌이는 집단이 바리새파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당대 바리새파는 바로 유대의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적 삶을 좌지우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구전 율법 규정들을 세세히 알고 있었기에, 율법을 잘 모르고 힘도 없고 가난했던 유대 백성들은 바리새파가 알려 주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즉 유대 백성들은 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판단하지 못하고, 바리새파에 의해 좌지우지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의 주인공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바리새파들의 입맛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규정되고 제압당하는 유대인 일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바리새파는 단언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예수는 죄인이다."(24절). 만약 눈멀었던 사람이 눈 뜨지 못했다면 이 사람도 바리새파가 알려 준 대로 예수를 죄인으로 그렇게 알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눈을 뜬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로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는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주체적 신앙의 관점을 지녔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제압당한 채 눈 뜬 소경으로 사는가? 우리가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제대로 판단할 만한 눈을 지녔는가? 아니면 언론이 말하는 대로, 옆집 사람이 들려준 대로, 길가에서 그냥 주워들은 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제대로 성서를 읽고 삶에서 녹여내면서, 스스로 깨달아 주체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여기저기서 들었던 것들을, 남이 말한 것들을 마치 자기 신앙인 것처럼, 참된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가?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그 시대의 풍조에 물들며 삽니다. 우리는 시대의 아들딸입니다. 그래서 사회 대중들이 지닌 관점을 자신도 모르게 그냥 자기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나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지 않고, 내가 배운 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보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남들이 알려 준 대로, 내 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세상의 속임수를 지혜로 알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세상과 다른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줍니다. 기업주의적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너나없이 무한경쟁에 뛰어드는 이 세상에서도, 승자독식의 세상에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신앙의 힘으로 근심과 걱정, 불안을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교만의 덫]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신앙 중 하나는 바리새파와 같이 자기 교만에 빠진 신앙입니다. 원래 신앙은 개인에게 너무나도 강렬한 체험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그 체험이 하나의 절대적 기준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으로 남들을 규정하고 배제하기도 쉽습니다.
성서를 읽는 우리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운 바리새파들이 바로 당대의 최고로 경건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이들입니다. 오늘 예수의 치유 사건에 문제를 삼았던 이유도 십계명의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는 그들의 신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을 철저히 하려는 노력과 행동이 변질되고 왜곡되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수단이 되고, 만약 자기 관점에서 남들을 교정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폭력이 되고 맙니다.
오늘 바리새파들은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이 되고 말았을까요? 지금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이보다 기쁘고 신나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함께 축하해 주고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파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들의 독선적 신념 때문에 하나님이 소경에게 드러내신 일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파는 목전에서 일어난 분명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멀었던 사람이 눈을 떴고,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그것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임에도 자신들의 신념 체계와 다르다는 이유로 결국 이 사람을 모욕하고 바깥으로 내쫓아내 버립니다. 잘못된 신념 체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이 장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제일 못하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늘 말했지만, 자신이 본다고, 자신이 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정말 새카맣게 모르게 됩니다.
눈멀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이 또한 우리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그저 남들이 말해 준 대로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고 성찰하게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는 또 자기가 알고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이 혹시 독단과 독선, 자기 아집이 아니었나 반성해 봅니다. "무지"와 "고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우리들의 삶에서도, 신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인의 기준과 태도 그리고 실천]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체적인 신앙과 삶의 태도를 가지면서도 독단과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첫 사람들이 왜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는지 잘 말해 줍니다. 첫 사람들은 바로 유혹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자는 선악과를 먹으면 전능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선악과를 먹은 첫 사람은 눈이 밝아졌으나 전능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생각나서 창조주의 눈을 피해 숨게 됩니다.
성경은 모든 죄악과 고통이 바로 전능자가 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는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장치였습니다. 선악과가 없었다면, 인간은 아마도 영생을 누리며 자기가 마치 에덴을 창조한 존재처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전능자가 되려고 하는 순간, 또는 전능자라고 착각하는 순간, 그것이 고통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인데, 그 유한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만이 쌓인 삶을 살게 되고, 무모한 도전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오를 저지르거나, 남을 괴롭히고 지배하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전능자라고 생각할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한 시대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겸손한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선과 악을 가르고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교만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은 선과 악을 넘어서는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증오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남과 싸워 이기라 하고,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 제1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때 세상은 무한경쟁과 아귀다툼과 약육강식의 세계, 치열한 다툼과 좌절, 절망과 오만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모두의 구원을 함께 이뤄가는 것이 진정한 지혜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면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뜨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보아야 하지, 유혹자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되새겨야 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를 무시하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려는 순간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내 동료가 그렇게 할 때 막지 않은 게으름이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제대로 봅시다. 세상의 지혜보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참된 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시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집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눈을 떴다면 제대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십자가를 겸손히 지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