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와 묵상] 길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시인(1945- )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세속적인 가치보다 자신의 주체적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다시금 다지고 있다.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일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대척적인 위치에 있다. 안타깝게도 그 세속적인 가치로 시인에게 압박을 가하는 존재는 가족이다. 그나마 부모의 압박은 부탁이나 당부의 성격이 짙다. 부모는 평생 권력과 돈의 결핍 때문에 찌든 삶을 살았던 기억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소박한 소망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의 압박은 자신에 대한 비웃음으로 여겨진다. "살 붙이고 살아온" 아내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 같아 배반감과 열패감이 가중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압박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의 논리는 그것의 현실적 설득력을 앞세워 가난하나 평안할 수 있는 삶을 전방위적으로 위협한다. 이에 대해 시인은 서러움과 노여움을 느끼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를 고수하고자 한다.

살과 피를 나눈 부모와 "살 붙이고 살아온" 아내는 바로 그 밀접한 관계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일을 하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을 "세상사는 일"에로 끌어내리는 폭력을 가한다. 그 폭력이 서럽게 여겨지는 것은 관계에 대한 기대가 배반당한 섭섭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섭섭함을 유발하도록 가족을 조종한 세속적인 시대정신에 대해서 "그렇게도 노[여움]"을 느낀다. 그러나 시대정신은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자를 길들이려는 압박을 합리화할 맥락과 근거이다. 사실, "어쩌다 시에 눈이 뜨[게]" 된 것이라면 천직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시인으로서는 세속적 가치의 압박 앞에서 논리적으로 반박하기가 어렵기는 하다.

하지만, 시인은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라는 말 이상의 대꾸를 하고 있지 않다. 사실, 그는 "어쩌다" 눈이 뜨게 된 상황을 주위의 모든 압박에 대응할 근거로 삼고 있다. 그렇다. "어쩌다"는 하늘이 시인에게 허락한 존재의 순간(the moment of being)을 가리킨다. 자기도 알지 못하나 자신이 추구할 가치를 하늘이, 혹은 자신의 본성이 알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으로서는 그 어떤 압박에 대해서도 저항할 힘을 내면에 이미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고 말한다. 여기서 "내 사람아"는 바로 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하늘, 혹은 본성의 부름을 상기시키고 있다.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라고 넋두리처럼 내뱉은 말은 하늘, 혹은 본성의 부름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세속적인 가치가 파도처럼 덮쳐오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죽기보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는 "평생에 [그런]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그 소망을 지켜나가는 힘은 세속적인 가치의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에서 나온다. "어쩌랴,"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인 것을.

그러므로 그 "길"은 결핍에 대한 반향이나 세속적인 시대정신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본성의 부름에 따라 "어쩌다," 그러나 결연하게 지켜갈 마음이 동반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변의 여건이 억압적이더라도 "어쩌랴"라며 그 "길"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시인이 제시한 "길"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 길은 유혹과 회유가 닥치더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할 때 걸어갈 수 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에 유다 지파의 엘리멜렉이 모압 땅으로 이주했다가 그와 두 아들이 죽고 부인과 모압 출신 며느리만 귀향한 사건이 있었다. 부인인 나오미는 모압을 떠나면서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에게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서 재혼할 것을 종용했다. 처음에 그들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지역으로 가겠다고 울면서 간청했다. 그러나 나오미가 재차 설득하자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룻은 다시 설득했음에도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기 1:17)고 말하며 결심을 풀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굶주림과 동냥살이 그리고 누군가가 거두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룻은 그 과정을 견디기로 결단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오르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아마 나오미가 권한 대로 친정으로 가서 재혼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모압 사람들과의 교류를 금지한 율법에 따라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채(신명기 23:3) 이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반면에, 룻은 자신의 결심의 결실을 만족스럽게 얻었다. 보아스라는 지주와 결혼했고 전 남편의 재산도 회복했으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의 조상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말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앞길이 암울했어도 그녀가 자신의 결심을 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르바가 돌아간 차에 나오미가 다시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옳은 판단을 내리게 하는 동력은 "어쩌랴," 바로 이와 같은 굳은 다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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