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믿음의 사람과 성전의 기둥①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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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7장 1-8절, 요한계시록 3장 7-13절

[2부작 설교]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 오늘 주어진 본문으로 한 번에 설교를 끝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는 2부작으로 합니다. 오늘은 "믿음의 사람과 성전의 기둥" 첫 번째 편이고, 8월 둘째 주일(11일)에 같은 본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21세기에도 성경이 필요한가?]

오늘날은 하룻밤을 자고 나면 다른 세상이 되어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사건 사고도 많습니다. 기후 변화와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붕괴와 기후 재앙 시대의 폭염과 폭우가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10만년 만에 가장 더운 여름으로 불리는 지금, 전 세계는 불볕더위로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지난 4월 하마스 박멸을 목표로 라벤더(Lavender)라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하고, 하마스 무장 대원을 식별하여 공습하게 했습니다. 무장 대원 한 명을 공습할 때, 민간인 15-20명을 사살하는 것도 허용하면서, 무장대원이 가정에 있을 때 재래식 무기로 집 전체를 파괴했습니다. 약 3만 3천명이 학살당하고, 부상자도 약 7만 5천명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인공지능을 장착한 드론이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약 50만원(400달러)에 불과한 'FPV(First Person View) 드론'은 조종사가 고글이나 헬멧을 쓴 채 실시간 영상을 전송받아 수십억 원짜리 러시아 탱크 등 중화기에 정확하게 내리꽂습니다. 인공지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많은 이들이 인간 지능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인간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우려해 왔는데, 지금 전쟁터에서는 인간이 자발적으로 인공지능에 전쟁을 맡기고, 전쟁 학살을 저지르면서도 범죄 면피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인공지능은 이미지 분류, 기본적 독해력, 시각적 추론, 시각적 상식 추론, 다중언어 이해력, 경시대회급 수학에서 이미 인간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 추세는 막을 수 없고, 자율주행차의 일상화, 무인 항공 택배 이용, 개인용 로봇 사용과 출퇴근과 업무, 쇼핑의 방식 등 일자리를 비롯해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바꿔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윤리적 가치관과 삶의 의미 문제 모두와 연결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 왔고, 성경에서 답을 찾곤 했습니다. 즉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인간과 또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답해 온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뉩니다. 구약성경(히브리 성경)은 율법서와 예언서, 성문서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토라(תּוֹרָה)라고 부르는데, '토라'의 뜻은 '가르침'입니다. 즉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토라)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들려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신앙의 백성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무종교인들은 "천지(天地)가 날마다 개벽(開闢)하는 오늘날의 시대에도 과연 옛날 책인 성경이 유효한가?"라고 질문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 가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 앞에서 성경을 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의 책임]

그런데 토라가 신앙의 백성에게 주는 율법책, 즉 가르침이라면, 왜 613가지의 조문을 담고 있는 율법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도입부터 율법을 알려 주고, 그 법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가르침에 더 효과적일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일까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믿음의 백성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맥락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토라는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가장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 세계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교(19억), 그리스도교(24억), 유대교(1,400만)의 아버지이며, 전 세계 80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가서야 등장하고, 그 이전까지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와 인류의 타락 역사를 다룹니다. 세상과 인간의 창조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결단한 모험이었습니다. 세상을 참 보기 좋게 지으시고,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세상을 잘 돌보도록 했지만, 첫 사람들은 계속 실패합니다. 그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성숙한 신앙, 어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도 알게 됩니다.

우선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갓 태어난 아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자기 몸이 자기 몸인 줄도 모릅니다. 세상과 자기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성장한다는 것은 이제 자기 몸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제 스스로 제 몸을 다룰 줄 알게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 생각이 있으며,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자기가 형성되었다면, 이제 그 사람은 자기 말과 행동에는 개인적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성숙의 첫걸음은 바로 제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최초의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부터, 형제자매, 동료 등 수많은 남을 만나면서 성장해 가지요. 그러면서 인간은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제 맘대로 아무렇게나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사람마다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면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처하는 법도 배우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처럼 관계에 민감한 사회성도 키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숙해가는 인간은 남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셋째, 성숙한 인간은 개별적으로 가족과 친구, 회사 동료, 선후배들 사이에서 적절한 자기 자리를 찾아갈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이 보다 더 큰 전체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행동이 그저 나의 상대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단, 자기가 속한 공동체, 가족이든 회사든 국가든 훨씬 더 큰 전체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기 한 몸 수련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어른은 이제 개인을 넘어서는 집단적 책임, 더 나은 공동체와 사회를 위한 책임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한 몸 챙길 줄 알고, 남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감당하려는 사람은 더 깊은 근원적 질문에 이릅니다. 내게 주어진 이런 책임들을 감당하는 능력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생명과 사랑과 정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존재의 뿌리를 성찰하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바로 지금 말한 성숙한 어른이 지닌 개인적 책임, 윤리-도덕적 책임, 공동체적 책임, 마지막으로 존재론적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지으셔서 창조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순종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적 자유를 가지고 때에 맞게 책임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첫 사람들의 실패 이야기]

그런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 창조 이야기로부터 바벨탑 사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역들은 이런 책임에 실패하고 맙니다.

우선 첫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전능자 하나님이 되려는 유혹에 넘어가서 온전한 자기 형성에 실패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면서, 금지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기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가 곧 하나님이 되려고 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 버립니다. 개인적 책임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추궁하실 때, 아담은 하와 핑계를 대고, 하와는 또 뱀 핑계를 댑니다. 아담이나 하와나 모두 자신은 잘못이 없고, 남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것처럼 떠넘깁니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와 갈등의 국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그의 말에 경청하는 피해자 우선주의라는 원칙이 있지만, 자기 잘못을 회피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피해자 코스프레입니다. 심지어 가해자의 가해가 명백한 경우에도 때때로 가해자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항변하면서 너무 쉽게 자기가 피해자인 양 행동하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절대 책임을 지지 않지요. 그래서 분명 피해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가인입니다. 가인은 아벨과의 비교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는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경고하셨고, 그럼에도 정작 화를 내려면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따지고 물었어야 했는데, 결국은 애꿎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가인의 행동을 분석해 보면, 가인이 드렸던 제사는 깊은 감사와 사랑에서 나오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일종의 수작이자 기획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선물을 통해 환심을 사고 그것을 가지고 상대를 조종하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럴 때 선물은 사실 뇌물이고, 그저 미끼일 뿐입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사람인 가인은 형제자매든 동료이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 윤리적 책임에 실패하는 표본입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아벨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 셋의 후손 노아입니다. 그의 등장은 화려합니다. 그는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그는 술에 찌들어 하체를 드러내며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600세 되던 해 전 세계를 강타한 홍수를 피하기 위한 방주를 마련하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짐승들을 태우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문을 닫고, 거의 1년이 다 지났을 때, 다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칭찬한 대로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지만, 놀랍게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그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먼저 나서서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전체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책임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서진 세계를 재건하는 것에도 미적거릴 뿐, 술에 취해 살면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노아는 그저 혼자만 살아남은 사람으로 살다가 결국 자기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노아는 공동체 전체를 책임지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인습적인 신앙 안에서 그저 복종했을 따름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창조하는 자유를 행사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노아 이후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 성경은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긴 채 한곳에 정착하여 흩어지지 말자고 한목소리를 냅니다.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고 자기들의 명성을 온 세계에 드날리려 합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마치 자신들이 땅과 하늘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들은 땅에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5:2)처럼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창조주는 창조주이시고, 피조물은 피조물인데, 감히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망각하고 하늘에 닿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때, 인간이 참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부정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전능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의 힘과 경제적 부유함이 이런 착각과 자만심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거대 제국을 운영하면서 꼭대기 자리에 앉았던 이들이 대체로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돈과 힘으로 타자를 자기 발밑에 두며,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흡수하려는 행동은 결국 멸망과 패망으로 끝이 납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이렇게 존재론적 책임을 지는 것에 실패합니다.

[책임지는 아브라함이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첫 인간들의 실패를 딛고 드디어 등장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신앙 전통은 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맺은 언약의 한 부분입니다. 성서 전체를 꿰뚫는 신학의 한 관점으로 언약신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이들과 언약을 맺기 때문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의 언약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시며 노아와 새 계약을 맺습니다. 노아와의 언약은 노아와 노아 가족뿐만 아니라 온 피조세계 전체와 맺는 중요한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맺는 언약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이 말씀의 번역이 좋지 않아, 개역개정판 말씀으로 한 번 더 들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말을 새번역 성경은 "나에게 순종하며"라고 번역해서 히브리어가 지닌 맛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여기서 "너는 내 앞에서"라는 말을 우리는 두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면서 즉 '하나님과 대면하여' 라고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보다 앞서서'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순종하는 이였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인 창조하는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보다 앞서서 합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자신의 고향과 그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미지의 땅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이 잘못을 해서 유배 당하는 것도 아니요, 기근이 들어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갈대아 우르 지역의 아브라함은 왕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귀한 신분을 박차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기대는 사람이 아니라 홀로 꼿꼿이 서는 주체적 신앙인의 삶을 택합니다. 땅이라고 하는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고, 고향이라고 하는 사회적 범주도 뛰어넘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의 집이 상징하는 부모-자식 간의 심리적 영향력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스스로 우뚝 서려는 존재입니다. 개인적 책임을 지려는 것이고, 믿음의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진정한 참 자기를 만들어 갑니다. 그는 외부 환경에 책임을 전가하는 피해자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자신을 위해, 자신과 함께, 깊은 자기에게로 홀로 떠납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자기의 조카 롯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를 구하러 갑니다. 외면하지 않습니다. 네 나라와 다섯 나라가 합종연횡을 하여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 한복판에서 롯이 사로 잡혀 가는 일이 발생했지요.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이끌고 가서 롯과 롯의 모든 재산, 그리고 그의 모든 식솔까지 구해 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과 친척을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은 자기 집 앞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재우면서 극진하게 섬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상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과 협상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고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브라함은 피조물이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더 똑똑할 수 없고, 하나님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놀랍게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지역 전체를 책임져 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양심을 건드리며,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명분으로 논리를 삼지만, 아브라함이 하려는 것은 사회 전체가 망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공동체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존재론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이것은 8월 둘째주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성숙한 믿음, 유치한 신앙이 아닌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신앙을 배웠습니다.

누가복음서 18장에 보면 주님 예수께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한 하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사람도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는 못된 재판관마저도 설득한 이야기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마저 돌리게 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러분! 어떠신가요? 오늘날 수십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있고, 이 나라에도 수백만의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어수선한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책임지는 신앙인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성실하게 기도하면서 불의함에 맞서는 집요함을 지닌 누가복음서의 과부 같은 교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 어수선한 세상, 종말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께서 도둑같이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오실 때, 이런 신앙인들을 우리 생명사랑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고 여러분의 삶에 변화를 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전 세계 유일신 종교의 첫 아버지가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 자신에 대하여, 남에 대하여, 공동체와 이 사회 전체에 대하여 책임 지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소서. 기대어 살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종노릇하는 것을 편히 여기면서 남 탓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도 어수선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들에 대처하면서 책임 있게 우리의 삶과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친구이시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님 부활하신 날을 기억하여 나머지 날들의 완성으로 삼으시고, 또 새로운 날들을 준비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시어, 세상살이에서도 거룩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님을 더 잘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일들을 좀 더 부지런히 감당하게 하시며,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소서. 우리가 드린 예물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며, 이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위기의 순간에 능력을 발휘하며, 어두운 시대에 한줄기 빛이 되고, 부패를 막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소금 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남 탓하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고, 하나님보다 앞서서 책임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 축도

생명의 왕이 여러분에게 쉼을 주시고,

사랑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며,

거룩한 영이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길 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는 모든 길과

여러분이 밟는 모든 땅과

여러분이 보는 모든 곳에

넘치는 사랑과 빛나는 지혜를 가득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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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는 흑백 논리 경계하며 다양한 포지션 횡단해야"

서울신대 박영식 교수가 보수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빌리 그래함도 "유신 진화론자로 분류된 바 있다"고 주장하며 흑백 논리식 경직된 사고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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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 에너지 줄이는 것도 에너지 필요"

기후위기 시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배현주 박사(전 WCC 중앙위원, 전 부산장신대 교수)가 얼마 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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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인간론, 자연과학적 인간 이해와 대립하지 않아"

바르트의 인간론을 기초로 인간 본성에 대한 자연의 신학적 이해를 시도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이용주 박사(숭실대, 부교수)는 최근에 발행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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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의 뿌리는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이원론"

여성 혐오와 여성 신학에 관한 논의를 통해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성서적인 교회론 확립을 모색한 연구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조안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