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제주 4.3 항쟁 기념주일 설교]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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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빌레몬서 1장 8-20절

설교문

[부활의 넓고 깊은 뜻]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다시 사신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일어난 개인적 문제만은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났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이 잊히고 마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사망 판정을 받은 사람이 다시 소생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죽었다가 사는 일은 그야말로 기적이고, 그것을 경험한 개인이나,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과 소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이 지니는 뜻은 훨씬 넓고 깊습니다. 부활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 속에서 지금도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을 때, 갈릴리 주민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져 가고 있던 때입니다. 로마 제국은 계속 조공을 요구했고, 로마에 잘 보이려는 헤롯 정권은 주민들을 다그치며 세금을 걷고, 시시때때로 황제의 별궁을 짓는 노역에 끌고 나왔습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세금까지 더해져 갈릴리 주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부과되는 세금과 노동력 착취로 인해 갈수록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를 일구고,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약자 보호법에 따라 서로 도우며 잘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로마와 헤롯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마을은 점점 가난해지고 흉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으면서 소작농들은 파산하고, 집과 땅을 잃은 사람들은 난민이 되어 떠돌거나, 도적 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고 거칠어졌습니다. 이웃 사이에 고소 고발이 일어나고, 이웃이 원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벌였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피폐해지는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너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들판의 꽃과 하늘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라."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집에서, 길가에서, 호숫가에서, 산 위에서 시간 날 때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십니다. 가는 곳마다 아픈 사람 고치고, 못된 귀신 쫓아내고, 악한 세력 물리치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무너져가는 갈릴리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바꿔보려는 예수님의 노력은 이내 기득권 세력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됩니다. 삐딱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던 권력자들과 종교 기득권자들에 의해 모함을 당하고, 논쟁에 휘말리고,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예수는 갈릴리 마을의 문제가 단순히 이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갈릴리 지방 문제는 중앙 예루살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시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직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제자들은 겁을 먹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민족의 해방적 열망이 가득한 유월절 한복판에 죄악에 물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당시 대중들을 흥분시켰고, 이내 이것을 제압하려는 성전 세력과 헤롯, 그리고 로마 지배 세력에 의해 체포당해 가장 참혹한 십자가 형벌에 의해 죽임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예수님 한 개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단순히 한 노동자의 죽음만이 아니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예수가 죽는 그 순간 갈릴리 주민 전체가 죽은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요, 사랑과 정의의 세상을 향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단순히 한 개인의 소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로마 제국이 틀렸다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결국은 사랑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확고한 사실의 증명이며, 이 땅에서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모든 이들의 서러운 눈물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이란 바로 어둠에 맞선 빛의 승리, 아직도 준동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증언하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의 한 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레몬서는 부활 신앙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아주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난 바울은 빌레몬이 예수의 사람으로 어떻게 부활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의 내용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쳐서 바울에게 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고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신앙적 동지,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모든 설득 기술을 동원합니다. 1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 대단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상상력을 발휘하여 1세기 중반 로마로 날아가 봅시다. 오늘 한국의 경제적 발전은 수많은 노동자의 피땀으로 가능했고, 오늘날도 전체 근로자의 50%를 왔다 갔다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사회가 지탱되고 있는데, 1세기 로마는 완벽하게 노예노동으로 자기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물론 전쟁이 그치고 노예시장이 대폭 줄어들면서 1세기 중후반이 되면 노예값이 상승하고 노예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지만,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빌레몬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8-9절). 심지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쳤을 손해에 대한 배상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하고(18-19절), 자기를 동지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맞이할 때 자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해 달라고 합니다. 바울의 말에는 간절함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주로 빌레몬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4절 이하), 이 편지는 빌레몬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에 모이는 교회공동체 전체가 함께 낭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교인들 전부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빌레몬은 자신의 선택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편지들과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나 바울"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 또한 은연 중에 빌레몬을 압박하는 장치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데 빌레몬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당시 감옥은 면회도 가능하고 심지어 함께 감옥에 함께 살면서 돌보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빌레몬이 안다면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권력을 가지고 남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권력자의 편에서 권력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으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고, 그것 때문에 받는 박해를 달갑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당시 권리 없는 자들, 삶의 터전에서 뽑힌 사람들, 사회적 모든 권력관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바울을 도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고 후원해야 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이 자신의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로 여기는 바울의 간청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듭니다.

특히 바울은 오네시모를 부탁하기에 앞서 빌레몬의 신앙과 빌레몬이 성도들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칭찬을 합니다. 이런 칭찬을 듣고 난 후에 바로 이어지는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수사학적 표현법을 동원하여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에게 명령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 이제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해 주고 그 숙고의 결과에 따라 자유로운 결정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는 더 큰 사회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바울이 극진히 편지를 써야 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빌레몬 개인의 문제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자유인으로, 특별히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 주는 것은 당시의 생활양식과 사고에서 보았을 때 매우 혁명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동의를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교우로 받아들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번 상상해 봅시다. 빌레몬의 집에 남아 있던 노예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도 모두 도망가서 바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빌레몬에게 우리에게도 자유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까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 준 사례가 노예들 사이에서 퍼졌을 때 노예들은 어땠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노예들을 신앙 안에서 동등한 교우로 대하고, 자유인으로 풀어 준다면, 노예노동 덕택에 살아가는 노예 주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사회의 불순세력으로 여론 몰이를 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빌레몬이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일은 빌레몬에게 매우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울의 편지를 들고 빌레몬에게 가는 것도 사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법에 따라 도망간 노예에게 행해지는 매우 심한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 또한 바울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믿음으로 빌레몬에게 갑니다.

이번에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이 일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도망간 노예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로마의 노예법을 어긴 사람이 로마의 제국 어느 곳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찾아온다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기쁜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나 그와 함께 지내는 것 또한 바울에게는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이 모든 위험을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부활 신앙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로새서 4장 9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로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오네시모가 바울의 동역자로 일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빌레몬은 바울이 바랐던 것 보다 그 이상의 일(빌레몬서 21절) 즉 바울 곁에 오네시모를 머물게 하여 그와 함께 동역자로 선교의 사역을 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초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가 2세기 초에 에페소에 보낸 서신). 주인과 노예의 관계 속에서 쓸모 없어진 오네시모가 평등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자기의 이름답게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이다. - 한 교회를 이끄는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를 되찾게 하는 이 작은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말했던 창세기 저자들의 통찰과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논했던 민주주의 이상을 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게 하는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왔을 때, 오네시모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덕분에 이제는 산 목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쓸모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제주 4.3 항쟁을 기억하며]

부활 신앙은 무엇입니까? 부활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죽음의 세력을 넘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목숨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요, 쓸모 없다 하는 사람에게 너는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요, 오늘 설교 제목처럼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내어 이 세상이 사랑과 정의가 꽃피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주 4.3 항쟁을 기억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슬픈 우리 현대사 속에는 아직도 되살아나지 못하고 무덤에 갇혀 있는 영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와 해방 공간, 전쟁과 그 이후의 이념 대결 속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제 뜻을 펴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왜곡된 역사해석과 무분별한 각종 영상으로 인해 참은 사라지고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부활하지 못하고 무덤 속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가 검색 엔진에 들어가서 양민학살이라고 검색을 해 보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과 영상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향 이름을 앞에다 쓰고 뒤에 양민학살이라고 써 보시기 바랍니다. 좌우익의 혼돈 속에서 국군, 인민군, 미군,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해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일반 시민들을 학살하는데 가담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높은 자리에 앉아 세도를 부리고 있는 동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들의 가족과 후손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부활신앙이라고 할 때 과연 무엇이 부활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정의'의 부활, '참'의 부활, '사랑'의 부활이어야 합니다. 죽임의 세력이 아닌 생명의 세력이 활기차게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면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을 치고 분개할 일이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가 죄악을 저지른 어둠의 세력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 수많은 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서북청년단에는 수많은 개신교인이 있었고, 오늘날도 수많은 거짓 뉴스로 시민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데에 한국 극우 개신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야당 대표의 목을 칼로 찌른 테러범의 "남기는 말"이라는 변명문 초안 5페이지가 공개되었습니다. 그 글을 읽어보면 지금 한국 극우 개신교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극단적으로 망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극우 개신교는 자신들 맘대로 자기 편이 아닌 사람들을 종북 세력으로 규정합니다. 예를 들면 문재인 대통령이나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당대표 뒤에는 북한의 김정은이 있다는 식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데, 놀랍게 그 말에 세뇌된 사람이 바로 직접 행동으로 테러를 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일부입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자유우파는 뿔뿔이 흩어진 개인뿐이니,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춘 여러 개의 거대한 좌익 패거리를 극복해내려면 자유 진영에도 구심점 있는 강력한 조직적 결사체가 요구되는데, 가능한 현실적 방법으로 기독교 주도의 자유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광화문 10월항쟁세력이 재결집해야 하고 이에 순수자유인들이 적극 동참해야 한다. 기독교 순교정신이야말로 저 악성 콜레라균을 능히 불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적극, 나서지 않으면 저 콜레라균 같은 붉은무리들을 해체시켜 무력화시키기는커녕 콜레라라는 중병으로 우리가 죽게 돼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사람이 말하는 자유마을은 전광훈 목사와 관련 있는 조직입니다. 자유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자유통일, 주사파 척결을 위해 3500여개의 읍면동에 설치하는 대한민국 우파 마을조직'이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과연 오늘날 우리가 가진 부활신앙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서 잘 살아내고 끝끝내 살아내어야 부활정신은 또 무엇입니까? 지금 극우 개신교에서 계속 띄우는 이승만은 제주 4.3 당시에 국무회의에서 "제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명확한 정부의 최고 지령에 의해서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고, 3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중 약 만 명은 어린이와 노인과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학살의 한복판에서 주민 100여명의 생명을 살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모슬포 지서장으로 근무한 문형순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광풍의 학살 한 가운데서 재치를 발휘해 모슬포 교회의 조남수 목사, 김남원 면장과 의논해서 대정읍 하모리 주민 100여명에게 말을 맞추어 자수서를 쓰게 하고 면서기를 시켜서 그것을 받도록 하여 목숨을 건지게 했습니다.

문형순 서장은 이후에 성산포 경찰서장이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졌고, 6월 25일 당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 검속하도록 지시합니다. 이에 제주도 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하도록 하고, 약 1천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 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에서 총살당해 암매장되거나 수장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1950년 8월 30일 성산포 경찰서에도 예비 검속자 총살 집행 지시 공문이 내려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예비구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수제건에 관하야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 의뢰함.

이 공문에 대하여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 경찰서장 귀하' 옆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 직접 쓰고 날인해서 끝까지 거부합니다.

2024년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생명사랑 가족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이어가야 할 참된 부활 신앙 위에 우뚝 서시기 바랍니다. 부당한 일은 하지 맙시다. 올바른 일을 합시다. 죽임의 세력에 맞서서 생명과 살림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서, 잘 살고 살려내고 끝끝내 살아내어 진정한 부활의 날을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이 온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 안듯,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온 누리에 넘치는 아침입니다. 십자가는 치욕이 아니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생명에 이르는 문이었습니다. 부활은 그 생명이 생생하게 일어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잡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미래를 향해 달려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다시 새 힘주신 부활의 예수님! 이제 우리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따라, 저 세상으로 담대히 나가게 하여 주소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고, 하늘의 시민의 품위를 보이게 하소서. 죽임의 세력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게 하소서. 누구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용기를 지니고 저 푸른 자유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오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 주님 부활하신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망의 독침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좌절의 늪에 머물지 않고 믿음의 도약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열린 하늘을 향해 두팔 벌려 기도하는 나무들처럼 우리 또한 하늘의 푸른 꿈을 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영혼과 몸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당신의 구원 활동에 한 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죽임의 세력에 맞서 당당하게 생명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잘 살고, 살려내고, 살아내어 부활의 신앙을 계속 이어가십시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과 거룩한 영의 사귐이 생명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 어둔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생명사랑 가족들에게, 부활의 아침 새 생명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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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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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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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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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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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