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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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29:10-14, 로마서 4:18-25, 누가복음 23:26-31

설교문

2017년 8월 11일, 당시 세계 최고령이던 남성이 114세 생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크리스탈(Israel Kristal), 1903년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직업은 제빵사였고, 사람들은 그가 평화로운 삶을 살다 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였습니다. 폴란드의 게토에 갇혀 있을 때 두 자녀를 잃었습니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을 때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되었을 때 그는 몸무게 겨우 37kg의 걸어 다니는 해골이었습니다. 가족 중 유일하게 그만 살아남았습니다.

히틀러가 만든 죽음의 수용소를 해방한 연합국 군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물며 그곳에 갇혀 매일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생존자들은 전후 어떻게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대부분은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혼인한 배우자나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땅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혔습니다. 새 직업을 찾았고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았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미래를 건설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40년이나 50년이 지나 비로소 과거를 회상하고 슬퍼했습니다. 책도 내고 강연도 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끔찍한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생존법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언처럼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고 세상 모든 죄를 지고 희생 제물이 되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26절) 숱한 채찍질에 이미 온몸이 상할 대로 상하신 예수는 더 이상 기력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시몬이 그 십자가를 대신 지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가가 전합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7-28절)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누가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예수를 보고"(공동번역), "예수를 생각하여"(새번역), "예수님 때문에"(현대인의 성경)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그를 따라갔습니다. 물론 이 "예루살렘의 딸들"은 "갈릴리부터 예수를 따라온 여인들"(49, 55-56절), 즉 예수의 제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외로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기사는 마음 한편에 작은 위안이 됩니다.

"나를 두고 울지 마세요. 오히려 그대들 자신들을 두고, 또 그대들 자식들을 두고 우세요."(28절, 새한글성경)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예수의 저주선언'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배척하고 죽이는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라는 말입니다. 근거는 누가복음서 앞부분(13장)에 이미 있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입니다. 자신에 대해 적대적이던 예루살렘에 대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34절)라고 한탄하시며,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35절) 예언했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예수님은 끝끝내 자신을 죽이고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해 멸망할 것이라고 저주를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따뜻하게 이 말씀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너무도 끔찍한 고문과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고 사형 집행을 당하는 걸 보고 연민했습니다. 그분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다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앞으로 닥쳐올 예루살렘의 미래를 상기시키셨습니다. 실로 예루살렘은 예수님 처형 이후 약 40년 후에 로마의 최정예 군단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누가 21:6)졌으며 1백 만에 이르던 도성 주민 전체가 학살되었습니다. 도성의 파멸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연민하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지키라고 당부하신 겁니다. "나를 두고 울지 마세요. 오히려 그대들 자신들을 두고, 또 그대들 자식들을 두고 우세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처음 뵙고 그분의 이름을 물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Ehye asher ehye, 출애굽기 3:14)라고 답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개역개정), 혹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현대인의 성경) 등으로 번역되지만, 이런 번역들은 세 개의 히브리어 안에 숨어 있는 '미래 시제'의 역동성을 놓친 번역입니다. "에흐예 아셰르 예흐예"는 영어로 "I will be what I will be", 곧 "나는 장차 될 나다"라고 번역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번역에서 간과된 것이 바로 이 '미래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입니다. 약속의 미래를 먼저 세우시고 그 미래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이 '순환'한다고 믿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근대 유럽인들은 시간이 '직선'처럼 진보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시간은 순환도 진보도 아닙니다. 성서의 시간은 '언약의 시간'(covenantal time)입니다. 순환적인 시간관은 현실에 대한 수용으로 이어집니다. 어차피 돌고 도는 것이기에 주어진 세상을 바꾸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직선적인 시간관은 낙관론을 낳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역사가 진보할 거라 낙관합니다. 하지만 언약의 시간은 희망(hope)을 낳습니다. 절망과 폐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가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을 낳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4:18)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무얼 희망했다는 말입니까?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4:19-20)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첫 구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par elpida ep elpidi)를 직역하면 '희망을 넘어 희망하다' 혹은 '희망에 반해 희망하다' 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들은 "In hope against hope"(NASB) 혹은 "Against all hope"(NIV) 등으로 번역합니다. 해석의 관건은 앞의 희망과 뒤의 희망의 차이를 가리는 것입니다. '희망을 넘어 희망하다'에서 앞의 희망은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뒤의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입니다. 바울은 이 두 번째의 희망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입니다.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미래의 하나님입니다. 이 희망과 미래는 "현실에 질질 끌려다니지"(limp after reality)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의 미래를 세우시고 그 미래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약속의 미래로부터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십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5)라고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 누군가가 저에게 '꼰대 3종 세트'라는 걸 일러주었습니다. 저보고 꼰대가 되지 말고 좋은 선생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꼰대를 찾아보니 국어사전에 '늙은이' 혹은 '기성세대를 뜻하는 은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꼰대 대표적 행동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요즘 젊은 애들은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한다. 둘째, 누가 뭐라고 불평하면,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말이야....'라는 말을 종종한다. 그리고 셋째, 입만 열면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한다. 꼰대란 한마디로 '과거의 자기 경험에 근거한 권위주의자'입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이 전부인 양, 그것은 언제나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가르치려 드는 순간 나는 바로 꼰대가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원전 1만 5천 년 한 구석기 시대 동굴에도 이런 메시지가 나왔다고 하지요.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어서 걱정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만은 인류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꼰대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미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미래를 꿈꿔야 합니다. 미래를 먼저 건설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은 미래 지향적인 경향이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종종 과거를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비극과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먼저 미래를 세워야 합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과거를 슬퍼할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우리는 과거의 포로가 됩니다. 세상엔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거의 분노와 혐오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마치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과거가 치유되어야만 미래가 열리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미래가 과거를 치유합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약속의 미래가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건집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어떤 미래입니까? 하나님의 미래는 부활의 미래입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9, 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 고작 "이 세상의 생명"(새한글성경) 뿐이라니요. 바울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20, 공동번역)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한 것은 과거입니다. 그 범죄 때문에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참으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사야 53:5)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복음 11:25)이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이 약속의 미래입니다. 이 미래가 우리는 구원합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주도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답니다. 제주도의 개신교인은 10% 정도로, 우리나라 전체 개신교인 비율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천주교인도 10% 정도인데, 이는 우리나라 전체 천주교인 비율의 두 배입니다. 제주도민에게 개신교는 외지인 종교로, 천주교는 제주도 종교로 여겨진다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천주교회가 제주에서 한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말에 제주에 온 프랑스의 에밀 타케 신부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위해 토양과 종자를 연구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15년간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밀감을 수입해 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제주 밀감 산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 한국 전쟁 이후 아일랜드에서 온 패트릭 맥그린치 신부는 가난의 섬 제주에 와 청년들과 함께 양돈업을 일으켰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요크셔 돼지를 수입해 양돈업을 세웠습니다. 현재 제주도 흑돼지 사업의 시작입니다. 개신교회가 개인전도와 교회성장에 치중할 때에 천주교회는 먼저 제주도민 전체의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풍요로운 약속의 미래를 먼저 꿈꾸고 세웠습니다. 그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제주를 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미래를 세우십시오. 그 다음에 과거를 슬퍼해도 늦지 않습니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I will be that I will be." '나는 장차 내가 될 무엇이다.'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입니다. 미래는 자유의 영역입니다. 그 자유의 미래로, 약속의 미래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편 36:9, 새번역)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그 험한 십자가에 오르시면서도 예수님은 내내 우리 걱정이셨습니다. "나를 두고 울지 마세요. 오히려 그대들 자신들을 두고, 또 그대들 자식들을 두고 우세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당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거두고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그 미래부터 바로 세우라고 당부하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고난주간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노래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이 하나님의 미래입니다. 약속의 미래입니다. 이 미래는 모든 불가능을 넘어서는 미래입니다. 먼저 이 부활의 미래를 굳건히 세우십시오. 뒤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의 시간' 안에 사십시오. 언약은 희망을 낳습니다. 그 희망은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hope against all hope)입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이 희망을 노래하며,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따라 갈보리 산 위로 오르는 경건한 한 주간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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