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 두려움이 변하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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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민수기 6:22-26, 요한1서 4:16-19, 누가복음 12:4-5

설교문

단테는 "인간에게 최고의 두려움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실패라고 합니다. 나의 건강이, 학업이, 결혼이, 사업이, 그리고 종국에는 나의 인생이 실패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듯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눌려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그렸습니다.

파리에 어느 변호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센강 강변을 거닐다 우연히 한 사람이 투신해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 변호사는 그 즉시 물에 뛰어들어 그 사람을 구하지 못한 자신을 괴로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로움에 견디다 못한 그 변호사는 그 사람이 뛰어내린 센강 다리 위에 올라가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여보시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뛰어내려 주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을 구하고 나도 구하겠소!'

인간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원천은 성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창세기의 보도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겼을 때 맨 처음 느낀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이후 인간의 삶은 갑자기 어디선가 엄습하는 두려움에 짓눌린 삶입니다. 숱한 고난을 경험한 구약성서의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욥기 22:10-11)

반복되는 두려움은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을 낳습니다. 인지행동치료의 창시자 아론 벡은 우울증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패턴을 감지했습니다. 그들은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사건을 부정적으로, 운명론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자존감을 해치는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계속해서 스스로 '나는 실패자다. 나는 쓸모가 없다. 상황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학습된 무력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어느 광야에 진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민수기 13-14장) 모세는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열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居民)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또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등을 정탐하고 오게 보냈습니다. 사십 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열두 사람 중 열 사람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가보니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릅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우리보다 강하고 성읍은 견고합니다. 그들은 거인들이고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 즉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했지만, 열 사람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공포에 질려 밤새 통곡하며 모세를 원망하며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 했습니다.

그런데 훨씬 뒤에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훗날 여호수아가 다시 정탐꾼을 보냈을 때 정탐꾼들은 자신들을 숨겨준 여인 라합을 통해 가나안 땅 주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에 기록된 라합의 말입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가]... 하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당신들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여호수아 2:9-11, 새번역) 그랬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모세가 보낸 정탐꾼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에 빠져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그 두려움은 사실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이름 없고, 비합리적이며, 정당화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루즈벨트가 그의 취임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은 정탐꾼 이야기와 놀랍도록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구하시는 분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허에 대한, 그리고 정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을 읽다가 감동을 받은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안심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마태에만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 때 예수께서 다가와 먼저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는 구절입니다.

첫째는 9장 2절에,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둘째는 9장 22절에,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여 예수님 뒤로 몰래 다가가 그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의 일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감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 번째는 14장 27절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사나운 풍랑을 만나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어둠을 뚫고 바다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져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安心)이 무엇입니까? 근심 걱정이 없어 마음이 편안한 것을 안심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화가 안심입니다. 그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열린 아테네 올림픽의 한 경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탁구가 다시 부흥하고 있는데, 당시 한국탁구의 유승민 선수가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여긴 중국의 왕하오 선수를 통쾌하게 이기고 금메달을 땄었습니다. 탁구의 만리장성을 넘었다고 모든 국민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유승민 선수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납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왕선수를 보니 다리를 떨고 있더라는 겁니다. 결승전을 앞두고 말할 수 없는 압박감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유승민 선수의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결승까지 진출했으니 이미 선전(善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금메달을 지켜야 하는 세계랭킹 1위의 왕하오 선수는 혹여라도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두 다리를 떨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져도 좋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하는 선수와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선수가 맞붙으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먼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 12:4-5)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들은 "내 친구"라고 부른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을 친근하게 부르시고 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 10:28-31)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삶 전체-몸과 영혼-를 그 손에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유진 피터슨, <메시지 묵상성경>)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최초의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숨어있는 두려움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반복해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두렵고 위대한 하나님"(신명기 7:21)이시며,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다니엘 9:4)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이사야 8:13,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악인은 누구일까요? "그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는]"(시편 36:1) 자가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자의 귀에는 죄의 속삭임뿐 하느님 두려운 생각은 염두에도 없다"(공동번역) 하였습니다. 살아보니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는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아닙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첫째로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상한 날씨나 천기의 변화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방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예레미야 10:2)라고 말합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둘째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는 만약 예수님을 풀어주면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압박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요한 19:8)라고 했습니다. 무슨 방도로 예수님을 죽일까 궁리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을 두려워"(누가 22:2) 했다 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 29:25)라고 말합니다.

저는 가끔 제 아내가 두렵지만, 성서는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명기 3:16) 또 말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시편 118:6-7)라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다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46:1-3)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편 27:1)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피난처'이시며, '힘'과 '빛'과 '구원'이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서의 신앙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본문은 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본문에 나오는 축복기도입니다. 제사장의 축복기도인데, 예배 시간 중심에 사용되던 것입니다. 그 단순함과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기도문입니다. 단 세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6:24-26) 이 축복기도는 유대인 부모가 금요일 밤에 자녀들을 축복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혼인식장에서 사용합니다. 오늘밤에 자녀들의 침대 위에서 이 기도를 들려주십시오.

이 기도의 첫 줄은 물질적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두 번째 줄은 도덕적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리고 세 번째 줄은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평화를 주시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어느 바닷가 언덕에 군중이 모여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 아이에게 왜 그러는지 물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은 저 배의 선장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배는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여기 우리는 이렇게 많잖아. 도대체 선장이 너를 어떻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배의 선장이 제 아빠거든요. 아빠는 군중 속에서 지금 저를 찾고 계시니까요!'

이것이 바로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축복기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당신의 얼굴을 돌리시는 분입니다. 나는 군중(群衆) 속에서 알아볼 수 없는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봄과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고 계시며, 내가 그분에게 손을 흔들면 그분은 나에게 손을 흔드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바로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평화의 원천입니다. 가장 깊은 영적인 평화의 기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쟁과 갈등과 불법과 폭력은 '내가 중요하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심리적 욕구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너보다 더 힘이 세고, 나는 너보다 더 부자이며, 나는 너보다 더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툽니다. '난 널 두렵게 만들 수 있어, 난 널 내 뜻대로 부릴 수 있어, 난 널 내 부하로 만들 수 있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나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교수도 승진승급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당신의 얼굴을 지금 나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분에게 손을 흔들면 그분이 나에게 손을 흔드신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적 평화의 기초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볼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출애굽기 3:6)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첫 번째 사람들이 범죄 한 이후 "하나님의 낯[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찬송가 27장 1절)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예수께서 "영 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떠나서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3절)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이어서 부른 찬송에서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415장 2절)라고 노래했습니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 뿐"이라고, 그래서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3절)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요한 14: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 예수께서 당신의 얼굴을 나를 향하여 드사 평화 주시기를 원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실패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십시오. 두려움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악이 쳐놓은 그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넘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이 당신의 인식을 왜곡하지 않게 하십시오. 당신은 메뚜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대적하는 사람은 거인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십시오. "두려움은 삶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워하는 삶, 곧 죽음을 두려워하고 심판을 두려워하는 삶은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한 삶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한1서 4:16-19, 메시지 묵상성경)

모세는 홍해 바다를 건넌 다음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마나 좋았든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신명기 32장 전체가 그 유명한 '모세의 노래'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시작하는 이 노래를 모세가 어떤 가락에 맞추어 노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파라오의 전차 군단이 뒤를 덮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사실입니다. 홍해를 가를 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결국 홍해 바다 앞에서의 두려움은 변하여 노래가 되었습니다. 감사와 희망의 새 노래가 되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시편 12:2-3) 오늘 여러분의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 기도와 노래가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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