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성막 짓기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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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40:32-38, 빌립보서 2:5-11, 마태복음 7:7-8

설교문

어느 행동경제학자가 '이케아 효과'(IKEA effect)라고 알려진 이름의 실험을 했습니다. 이케아 효과란 '자신이 직접 만든 걸 더 좋게 평가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물론 이 이름은 조립식 가구를 판매하는 어느 상점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저도 이 상점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 다 만들어진 걸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무언가 직접 만들어볼 수 있기에 신이 납니다. 물론 디자인과 부품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뚝딱뚝딱 몇 개만 조립하더라도 다 끝나면 '내가 만들었다'는 성취감이 생깁니다. 자부심이 생깁니다.

다른 학자는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종이접기 실험을 했습니다. 종이를 정교하게 접어서 어떤 모형을 만들게 한 다음, 자신이 만든 모형을 소유하기 위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평균적으로 25센트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돈을 주고 살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평균 5센트 내고 사겠다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것에 대해 다섯 배는 더 가치를 부여하고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 실험이 알려주는 것은 똑같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자신이 만든 그것에 대한 사랑도 커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에 쏟는 노력은 단지 그 대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 그 사람을 바꿉니다. 대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접었으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출중한 랍비 사상가 조너선 색스(Jonathan Sachs)가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The Exodus), 곧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기에는 거대한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처음엔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모세를 불러 지도자로 세우시고,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고, 또 백성들이 고기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할 때 하늘로부터 양식을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홍해 바다를 가른 다음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 번도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불평만 가득했습니다. 아니, 배은망덕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출애굽기 분량의 3분의 2인 1장에서 24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5장부터 40장까지 나머지 3분의 1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聖幕, tabernacle)을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성막 이야기가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전환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성소(聖所)나 성막 같은 지상의 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에게 그런 것이 왜 필요합니까. 나중에 이스라엘이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이사야 66:1-2a, 공동번역) 그러므로 성막 짓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취감, 자존감, 존엄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 기회를 주셨습니다. 거대한 '역할 반전'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는 잘 읽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알같이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이케아 가구의 조립 설명보다 더 자세합니다. 한번 볼까요? 먼저 성소를 지을 재료에 관한 설명입니다.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가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애굽기 25:3b-9) 밤에 불면증이 있으신 분들은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을 읽으시길 권합니다.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듣다가 주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성막 만드는 설명입니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그 휘장을 이을 골목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이어질 다른 끝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휘장 끝 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출애굽기 26:1-5a) 어휴, 그만하겠습니다. 깨알같이, 정말 깨알같이 적어놓으셨습니다. 누가 그랬나요.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고.

그런데 다 읽고 나면 퍼뜩 깨달음이 옵니다. '소오름'이 돋습니다. 이 설명서가 단순한 설명서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성막 짓기에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언어와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맨 앞인 1장과 2장의 언어와 출애굽기의 맨 마지막 39장과 40장의 언어가 같습니다. 창조의 완성과 성막의 완성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saw) 보시기에(behold) 참 좋았다."(창 1:31) - "모세가 그 모든 일을 점검하여(saw) 보니(behold) 그들이 주께서 명하신 그대로 하였으므로."(출 39:43) /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completed)."(창 2:1) - "이렇게 해서, 성막의 공사가 완성되었다(completed)."(출 39:32) / "하나님이 복되게 하시고(blessed)."(창 2:3) -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blessed)."(출 39:43) /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sanctified)."(창 2:3) /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라(sanctify)."(촐 40:9) 들으셨습니까? 보셨습니까?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온 생명을 위한 집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집으로 성막을 창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탄생과 '성막'의 건축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우주 창조 이야기는 성막 창조 이야기로 끝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건축자가 될 기회, 창조자가 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길고 지루하게 성막 짓는 법을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는 단 34구절이 사용됐습니다. 성막 짓기에는 무려 500구절이 사용됐습니다. 압도적입니다. 성막은 기껏해야 수년간 광야의 방랑 생활에 필요한 임시 가건물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성막 이야기는 특정한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파라오의 신민(臣民)'을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매사 수동적이기만 한 파라오의 노예들을 창조적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변화시킨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왜 집이 필요합니까. 성막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짓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재창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창조의 기회를 주는 것일 겁니다. 내 삶에 누군가를 위한 여백을 만들고 내 삶에 누군가 숨 쉬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일 겁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할 때 거기에 있지만 짓밟거나 억제하거나 지배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훌륭한 리더는 혼자 모든 걸 다 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도전하고 참여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은 배우자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상대방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결혼예식을 주례할 때마다 신랑과 신부에게 이 시를 읽어주곤 합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칼린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는 것, 그래서 공간을 열어주는 것,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 원리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우주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순간은 영원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 앞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는 마치 블랙홀과 같습니다. 블랙홀의 중력은 압도적이기에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빛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영원인 신 앞에 어떤 것도 단 한 순간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지구 부피의 130만 배가 되는 태양에 지구가 다가가면 순식간에 타버리는 것처럼 어느 존재도 신 앞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주가 존재합니까?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걸음 물러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창조의 여백을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여백이 없는 그림은 숨 막히지 않습니까. 이것을 16세기 위대한 신비주의 사상가 아이작 루리아(Isaac Luria)는 '침춤'(tzimtzum)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 혹은 '자기 비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시고 비움으로써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셨습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자기 비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빌립보서 2:6-8) 했습니다. 보십시오.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분이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그 비우심과 낮추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요한1서 4:16) 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 존재를 지켜 주는 것 / 찾아가 바라보는 것"(이재무, <산을 오르다가>)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우리가 자신의 성막을 짓는 건축자로, 창조자로 살 기회를 내어주십니다.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은 매일 새벽 일어나 스스로 커피를 내렸습니다. 그는 아주 꼼꼼해서 매번 커피콩 60개를 정확히 세어 딱 한 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책상에 앉아 오후 두 시까지 작곡을 했습니다. 이후에는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연필과 오선지를 갖고 다니면서 길에서 떠오르는 음표를 기록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독일사람답게 맥주 한 잔 즐기고 늦어도 열 시에는 침대로 갔습니다.

근대 계몽주의 철학의 거장인 칸트의 일과(routine)도 유명하지요. 그는 일어나, 커피 마시고, 글 쓰고, 강의하고, 식사하고, 산책했는데, 이 모든 것에 정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웃들은 칸트가 손에 스페인 지팡이를 들고 회색 코트를 입고 문밖에 나서면 정확히 3시 30분인 걸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메이슨 커리의 책 『매일의 의례 Daily Ritual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50여 명의 위대한 철학자, 예술가, 작곡가, 작가들을 연구한 이 책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매일의 의례'(daily rituals)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옥한 토양이 되어 거기에서 그들 창작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별로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의도적으로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도 죽기까지 변호사로 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그것을 고집한 이유는 그 일이 자기 삶에 규칙성과 규율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역설에 주목하십시오. 이 책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위대한 발명가, 개척자, 선구자들입니다. 새로운 사상을 열고, 새로운 과학적 발명을 하고, 새로운 표현양식을 만들어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천재라 불렀습니다.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일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틀을 깨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은 이것입니다. 틀을 깨어버린 그들의 삶의 일상은 그와 반대로 틀에 박힌 일과였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매일의 의례'(daily rituals)를 행하는 지루한 일상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을 바꾼 과학적 발견, 학문의 돌파구를 연 새로운 연구, 놀랄 만큼 성공적인 신상품, 탁월한 소설, 유명한 상을 받은 영화는 거의 언제나 오랫동안 매우 세부적인 것들에 주목한 결과들입니다. 성막 짓기처럼 말입니다. 창조적인 것은 '매일의 힘든 수고'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대 히브리어에 '아보다'(avoda)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일의 힘든 수고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하나님을 섬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렇게 수고스럽다는 뜻이겠지요. 학문과 예술과 과학과 산업에 적용되는 것은 영적인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지속가능한 위대함'은 지루하고, 단조롭고, 평범하고, 반복적이며, 틀에 박혔고, 세부적인 것들에 사로잡혀서 아주 재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 나옵니다. 바로 거기서 소설을 쓰고, 교향곡을 작곡하고, 영화를 제작하고, 큰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일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의례가 되어야 합니다. 의식(儀式, rituals)이 의식(意識, consciousness)을 지배합니다. 주일예배 한 번쯤 빠져도 되는 거 아닌가요? 편하게 누워서 설교만 들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위대한 생각은 행동의 습관이 되고 마음의 습관이 되기 전에는 위대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드리는 기도, 매일 묵상하는 말씀, 매 주일 드리는 예배,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보다', 즉 힘들고 수고스럽더라도 그 반복적인 매일의 의례가 내 삶을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아름다운 성막으로 짓는 역사(役事)위가 될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했습니다. 여러분의 성막을 지으십시오. 여러분을 성막으로 지으십시오. 오늘의 출애굽기 본문을 보니 모세가 하나님의 설명서대로 성막 짓기를 마쳤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애굽기 4034-38) 했습니다. 이 구절이 출애굽기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여러분의 성막을 지으십시오. 여러분이 성막이 되십시오. 매일 수고하며 힘써 지으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러분이 지으신 성막 위에 환히 빛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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