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성경본문

에베소서 3장 14-21절

[거짓과 우기기로 가득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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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블로그 갈무리)
▲왼쪽 사진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모인 인파이고, 오른쪽의 사진(2번)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의 모습

여러분에게 사진 두 장을 비교한 것(AP 통신)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왼쪽의 사진(1번)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모인 인파이고, 오른쪽의 사진(2번)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입니다. 어느 쪽이 많아 보이시나요? 한쪽은 듬성듬성 빈 곳이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이 끝났을 때,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의 사진을 비교하며 참석 인파가 훨씬 적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자 발끈한 트럼프 대통령이 "광장에는 100만, 150만명이 모였다"고 트윗을 날렸고, 백악관 대변인 스파이서도 "취임식에 볼 수 있는 인파 중 가장 많은 수가 모였다"면서 "사람이 적어 보이는 건 잔디 보호를 위해 흰 천을 깔았기 때문에 드는 착각"이라고, 트럼프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백악관에서는 "언론이 트럼프에 대한 미국민의 지지를 축소하기 위해 고의로 편집된 사진"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언론들은 사실 점검에 들어갔고, 뉴욕타임즈는 이런 사진을 다시 공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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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블로그 갈무리)
▲왼쪽 사진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모인 인파이고, 오른쪽의 사진(2번)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의 모습

이 사진을 보시면 전의 사진보다는 더 확연하게 인파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취임식에는 80-90만 인파가 왔고, 오바마 취임식에서는 180만에서 190만이 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 브라이언 샤프너 교수와 여론조사 전문가 서맨사 럭스가 미국 성인 1,388명에게 이 사진 두 장을 보여주고 어느 사진에 더 많은 참석자가 있는지 물었는데, 이 중 15%의 사람들이 트럼프 취임식 사진을 골랐습니다.(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233)

트럼프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이 사진이 갖는 의미를 감각적으로 눈치채고 우겨댄 것입니다. 이런 조사를 통해 우리는 한 사회의 타락 지수를 측정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행태를 보이곤 합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이나 안위를 위해서, 또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힘겨루기에서 지는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불리하다고 느낄 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우겨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조건 피하는 것이 좋은데,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사람들, 뻔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런 사람들이 특히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 사회는 엉망진창이 되고야 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혼자 살 수는 없고, 여러 사람이 반드시 모여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생각과 취향,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 모든 공동체는 반드시 모두가 지켜야 할 상식과 도덕적 관습이 있고, 규칙과 법을 정합니다. 이런 원칙과 규범들이 인간의 모든 삶을 포괄할 수는 없기에 아주 예외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는 법의 적용을 잠시 미루기도 하고, 법을 넘어서 결정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아주 드문 경우여야 합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 전체가 합의한 것을 멋대로 어길 때, 그 사회와 공동체는 매우 위태롭게 됩니다.

방금 미국의 예를 들었지만, 저는 지금 우리나라도 미국만큼이나 매우 위험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금방 탄로가 날 거짓말들이 난무하고, 직필(直筆)로 세상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이 자본과 권력의 눈치나 보면서 제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을 정밀히 수사하여 범죄자를 처단하고 피해자를 돌봐야 하는 법조계와 치안이 비상식적인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내 목소리와 내 얼굴과 몸짓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으니, 앞으로 전화 통화나 심지어 영상 통화에서도 온갖 속임수와 사기가 난무할 것으로 보입니다. 눈앞에서 직접 본 것도 이렇게 아니라고 우기는데, 이제 연예인이나, 유력 정치인, 전문가들, 유명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가짜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낼 때, 우리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미국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서 선거에 영향을 주는 일이 발생했고, 11월 대선을 앞두고 13개 주가 규제하는 대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며 대비하는 우리는 앞으로 모든 영상에 대해서 반드시 따지고 묻고 하면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기고(指鹿爲馬),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매하는 수법(羊頭狗肉)이 날로 노골적이고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기에 깨어 있는 정신으로 분별하지 못하면 정말로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혼탁하기에 이럴수록 더더욱 참된 사람, 특별히 참된 믿음의 사람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짐승만도 못한 파렴치한 사람들 사이에서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 사도의 속 깊은 마음이 담긴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이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하기에 제가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으며, 그 일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환난은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영광이 될 것이라면서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저는 바울의 이 기도문을 살피면서 우리 생명사랑교회 교인들이 2024년 1년 동안 이뤄야 할 신앙적 성숙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은 땅 위에 사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서 하늘에 사는 천사들, 온갖 신비한 영의 세력들을 포함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갑니다. 특별히 하나님 없이 살려는 인간은 그의 생이 어떤 궤적을 그린다 해도 허무(虛無)에 빠질 수밖에 없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가 창조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창조자는 모든 존재에게 그것이 사물이건, 동식물이건, 사람이건, 천사와 영이건 간에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합니다. 모든 존재는 실행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 몰라라 하시며 저 멀리 계시지 않고, 불려 마땅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이름값을 하며 살도록 도우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2024년을 살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어떤 이름값을 하시며 사시렵니까?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 주님께서 정해주신 그 사명을 되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편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진행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의 세상이 매우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지요. 심지어 가정에서도 비슷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세상 풍조가 믿음의 가정도 뒤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가 10대 20대 자녀에게 그리스도교 신앙 유산을 물려 주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실로 가장 큰 도움이시고 지혜이시며 뒷배이신데, 그 사실을 거부하는 가족과 이웃들,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으로 가는 길 1. 올바른 기도와 살아 있는 말씀]

바울 사도는 오늘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해 주시기를 간구하는데, 첫째는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머물게 하는 것에서는 믿음을 언급합니다.

거룩한 영과의 소통 속에서 내 속사람이 단단해져 단련된 인격을 얻으려면 정확한 기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영적 신호'의 감지입니다. 영혼의 호흡이란 기도가 없다면 몸과 혼은 살아도 영은 죽었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으면 무신론자, 비신앙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내 얘기도 하고 하나님 얘기도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기도는 내 욕심과 욕망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면서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과 진정으로 대화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내 형편을 있는 그대로 아뢰고,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맞춘 연습과 훈련을 한 사람은 깊은 침묵 속에서, 그리고 고요함 속에서 침묵의 강과 고요의 바다를 건너 내게 압도적으로 몰려오는 거룩한 영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신호를 받아들여 내 뜻은 사라지고 주님의 뜻만이 나에게서 발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어둠도 있고, 죄악으로 물든 굳은 마음도 있고, 관계 속에서 생겨난 깊은 상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결핍과 예상치 못한 고난에서 비롯된 좌절과 낙담,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나를 휘감을 때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오관을 자극하는 세상에 맞춰, 내 욕망이 미친 말을 타고 달리듯 세상만을 향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기도는 우선 나를 내려놓고 내 안에 거룩한 영이 들어오시도록, 그가 나를 이끄시도록 내 힘을 빼고 내어주는 훈련이 첫째로 필요합니다. 둘째는 미약하게 감지되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도전해보고 그 결과를 보고 하나님의 뜻인지, 내 뜻인지, 악령의 속삭임인지 세상의 유혹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내 상황을 아뢰고 주님께 듣고 실천해서 결실을 맺는 반복적 훈련 속에서 우리 속사람은 강건해집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머물게 해 달라는 기도도 우리는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적 모습을 지니고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살결을 만진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남겨진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님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한평생을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진지한 고민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본받고 실천하다 보면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싹틉니다.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내가 경험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게 할수록 그리스도가 내 안에 머무시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만 간다면 결코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으로 가는 길 2.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가 닿으려는 목표는 바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기도와 말씀의 목표가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으라고 바울 사도가 명확하게 꼭 짚어서 말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왜일까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이런 물음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낯설고 먼 존재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우리 심장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고 말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는 매우 밀접하게 마치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 우리는 하나님을 잘 만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품고 있고, 하나님 또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같은 하나의 눈입니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최근에 제가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아주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넷플릭스에 있는데, 여러분도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인상 깊은 장면 하나가 나오는데, 문어의 천적인 상어가 문어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 문어가 숨는 방법입니다. 이리저리 피하기도 하고, 미역 같은 해조류나 조개껍데기 같은 것으로 자기 몸을 감싸기도 하면서 숨던 문어가 완전하게 상어로부터 벗어나서 상어의 눈에 띠지 않으면서 숨은 곳이 있는데 바로 상어의 등이었습니다. 상어에 등에 쫙 달라붙은 문어를 상어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깊게 달라붙어 계셔서 우리가 찾기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면서 지식을 초월한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아는 것', 즉 '지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지식은 선악을 구분하는 앎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얻은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 이 지식은 선과 악을 구별하면서 사람도 선인과 악인으로 나눠버립니다. 그런데 놀랍게 사람은 자기편은 선이라고 하고, 다른 편은 악이라고 하는 오류에 너무나 쉽게 빠집니다. 지식은 자기중심적 판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사랑은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을 내려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절대적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상대자인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자기가 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자기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는 자기 없는 사랑으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은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책임지고 응답하는 인간은 근대와 현대적 인간상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성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녹아들 때만이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에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4년 우리는 모두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이 내 욕심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손바닥에 물을 담아 얼굴을 씻으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손바닥 가득 하나님의 생명, 손바닥 가득 그리스도의 사랑, 손바닥 가득 성령의 평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이 내 얼굴에 가득하기를!"

세수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며 옷을 입을 때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몸에 옷들이 걸치는 순간, 주님의 날개로 내 영혼 또한 감싸주소서."

우리는 매 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 가는 길 축복하소서. 하나님, 내 발이 닿는 땅도 축복하소서. 은총의 하나님, 내 삶의 모든 날과 시간마다, 축복하소서." 우리가 하는 일을 두고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소 젖을 짜던 한 농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작은 소에게, 하나님의 복이, 내 소망에,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님과 나, 우리의 노동에, 내 손이 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축복이. 젖꼭지마다, 하나님의 복이, 손가락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통에 떨어지는 방울 방울마다 성령님의 축복이."

기도로 하루를 보낸 이가 잠에 들기 전 이부자리를 펴면서 기도합니다. "이불을 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가 잉태된 밤의 이름으로, 우리가 태어난 밤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 받은 낮의 이름으로, 모든 밤과 낮의 이름으로,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의 이름으로"

이렇게 우리의 삶과 노동이 기도가 된다면, 주님께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면, 그렇게 우리의 2024년을 보낸다면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방식으로 기적과 표징을 보이실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에서도 물들지 않으며, 어두운 세상에서도 밝게 빛나며, 메마른 광야 한복판에서도 생명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진리다."라고만 말하지 않으시고 동시에 "길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이 아닌 진리는 죽은 것이며 생명을 주지 못하는 진리 또한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사랑 믿음의 식구들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을 때 우리와 우리 이웃의 삶은 생명으로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하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첫사랑을 마음에 품고 다시 새걸음을 걷고자 합니다. 올 한해 지식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고자 합니다. 알고 깨닫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올바르게 걷기 위해, 방황하지 않도록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에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하나 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랑 안에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주님의 길 안에서 걷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우리의 발걸음에 함께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굴곡이 있고, 그늘이 있고, 때때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이 있더라도 감사를 놓지 않게 하여 주소서. 불평과 불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헛되게 소비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보이는 것에 취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작은 일에 얽매여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건져 주소서.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모두 받아주소서. 받으셔서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빵은 필요하지만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준비된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더욱 더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시오. 믿음 안에서 언제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머물게 하십시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를 때까지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 축도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으로 한 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어, 여러분을 보는 모두에게 그 기쁨이 전해지길 빕니다.

생명의 하나님 광채가 여러분의 목을 두르고,

사랑의 그리스도 빛이 여러분을 에워싸며,

은총의 성령 바람이 여러분에게 불어오기를 빕니다.

이제는 지난 세월을 지켜 주시고 새로운 한 해를 열어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 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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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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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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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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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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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