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49 대 51"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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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열왕기상 19:1-8, 고린도후서 1:3-7, 마태복음 5:4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나 힘들 때 곁에서 위로해주는 사람 하나 없을 때입니다. 아무도 내 아픈 맘 몰라줄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 깊은 울음 하나씩 갖고 산다. 조롱박처럼... 안으로 안으로만 키우다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울음... 누구나 그렇게 참다 참다가 다 타버린 울음들 하나씩 갖고 살아간다. 그때 가슴을 열면 재 한 줌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 있다."(배준석 시인) 성서에서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는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예레미야 애가 1:21)라고 한탄하며,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예레미야 8:18) 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전도서 4:1) 했습니다.

서울의 마포대교는 우리나라에서 'SOS 생명의 전화'가 처음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때가 2011년이었습니다. 12년 전 일입니다. 지금은 전국 20개 교량 위에 75개의 생명의 전화가 설치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국가입니다. 지금도 하루 평균 약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얼마 전 SOS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나지훈 교수님(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상적인 기사였습니다. 그는 지난 10년간 일주일에 한 번은 밤에 깨어 있었습니다. 자살 시도자의 전화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매주 금요일 혹은 토요일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12시간 동안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언제든지 전화 연결이 가능하도록 누군가는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것이 핵심입니다. 술을 마시고 전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통 새벽 2시부터 4시까지가 제일 전화가 많이 옵니다. 저는 한 번 근무할 때마다 평균 2~3회 정도 전화를 받았습니다. 상담 시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누군가는 50분도 통화하고 누군가는 5분 만에 끝납니다. 당장 뛰어내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인 경우 경찰이 바로 출동하기 때문에 통화 시간이 짧습니다. 경찰 도착 전까지 자살 위험자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면서 붙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지훈 교수의 이야기에서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이야기는 자살 위기자가 한강대교에서 수화기를 드는 이유는 그에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 교수는 "'내가 죽으려 하는데 힘든 상황을 가족들에게 대신 알려달라'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것은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현재의 삶을 같이 고민하는 것입니다"라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살 충동을 수치로 표현하면 '100 대 0'이 아닌 '49 대 51'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살 시도자들은 살고 싶은 마음 49, 죽고 싶은 마음 51 사이에서 저울질합니다. 수화기 너머 상담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힘든 부분에 공감해주면 스스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삶의 추가 51로 기웁니다. 실제로 죽음을 생각하고 오신 분이 전화를 끊을 때쯤이면 '다시 살아야죠' '다시 돌아가야죠'라고 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한탄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 기자의 탄식입니다.

엘리야는 도망쳤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와 사악한 왕비 이세벨을 추종하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에서 겨루어서 이기고 그들을 다 죽인 다음의 일입니다.(열왕기상 18장) 왕이 왕비에게 이 일을 알리니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2절) 위협합니다. 엘리야는 즉시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칩니다]."(3절) 죽음의 사자를 피해 마을 버리고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4절) 하지만 너무 지치고 무섭고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죽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라고 청원합니다. 왕과 왕비가 보낸 자객들에게서 그가 피할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러다 지쳐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엘리야는 누군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깼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 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5-7절)

언젠가 저도 죽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누워 며칠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미웠고, 내가 조용히 죽어주는 것이 복수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정신이 혼미한데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밥 차려 놓았다. 일어나 먹어라'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저를 어루만지며 '먹고 일어나라'라고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했습니다. 엘리야가 먹고 마시고 다시 쓰러져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두 번째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어라" 했습니다. 주의 천사는 이렇게 부드러운 손길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먹고 일어나라'라고만 했습니다. 성경을 보니 엘리야가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열왕기상 19:8) 했습니다. 하나님의 산, 드디어 안전한 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SOS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자 나지훈 교수는 우리 "주변에 자살 위기자가 있을 수 있다"라며 "이들에게는 '힘들었겠다'라는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됩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살 위기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 힘들다'고 표현했던 경험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도움 찾기'라고 하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경고 신호를 주변에 보냈는데도 어떤 반응이 없을 때 사람은 자살을 떠올리게 됩니다. 부쩍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 소중히 생각했던 물건을 주변에 나눠주는 등 경고 신호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혹시 주변에 이런 분들 계신지요.

실로 '당신이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은 결정적인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에 온 마음을 다해 귀 기울이고 있다는 믿음은 '죽고 싶은 마음 51 대 살고 싶은 마음 49'를 '살고 싶은 마음 51 대 죽고 싶은 마음 49'로 바꿉니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마음 100 대 살고 싶은 마음 0'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 100 대 죽고 싶은 마음 0'인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늘 '51 대 49' 혹은 '49 대 51'을 오갑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입니다. 넘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그가 걸치고 있는 옷에 대한 주목이나 찬사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가진 사람도 자기 존재 자체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깁니다. 오히려 더 배를 곯습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 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 중에서.) 그렇습니다. 누군가 내 맘 들어주고, 내 맘 알아주면 내 맘에 봄이 옵니다. 살고 싶은 봄이 옵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4a) 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새번역)라는 말입니다. 사실 '애통'(哀痛)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원어인 그리스어 '펜데오'는 보통의 슬픔이나 울음이 아닙니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정도의 슬픔이 아닙니다.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울음, 끊어지는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 울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릴 울음을 뜻합니다."(『(이덕주의 산상팔복 이야기) 八福』 중에서.) 그것이 슬플 '애'(哀) 자에 서럽게 울 '통'(痛) 자를 붙인 '애통'입니다. 서럽게 우는 것, 그러니까 '깊은 슬픔에서 우러난 고통스런 울음'이 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마태복음 5:4b)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새번역)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 27:10)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이사야 49:1)하신다 했습니다. 성서는 이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사무엘상 16:7), 즉 내 존재 자체에 주목하신다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이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편 86:17)라고 말합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 7:6)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서럽게, 고통스럽게 우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거꾸로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누가복음 6:24a)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기]"(누가복음 6:24b)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은총이 임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했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자, 위로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보혜사'(保惠師)라고 언급하신 '성령'과 '위로'의 어원이 같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이고 위로는 '파라클레시스'입니다. '파라', 즉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옆에서 '클레오', 즉 도와주고 말해주는 것이 위로이고, 그렇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곁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슬피 울며 괴로워하는 이를 끌어안고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네 맘 안다. 너무 서러워 말아라' 위로해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보혜사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야훼여, 저를 어루만져 주시어 마음의 상처를 고쳐주십시오"(예레미야 17:14, 공동번역)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성서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도 심판 다 끝난 후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을 일을 이렇게 예고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요한계시록 21:3-4)

냉동식품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한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기 전 늘 하던 대로 냉동 창고에 들어가 점검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쾅!'하고 문이 저절로 닫혀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도움을 요청했지만 문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서 얼어 죽고 마는 건가?' 생각하며 절망감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5시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습니다. 그 직원의 몸은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냉동 창고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뜻밖에도 경비원 아저씨가 거기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구조되고 난 후, 그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어떻게 자기가 거기에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경비원이 냉동 창고 문을 연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경비원 아저씨는 자기가 공장에 온 지 35년이 됐지만 그 직원 말고는 누구도 자기에게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직원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늘 "안녕하세요!", 또 퇴근해서 집에 돌아갈 때에도 또 "안녕히 계세요!" 하며 매일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날 사고 당일에 퇴근 시간이 됐는데도 그 여직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비원 아저씨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공장 안을 여기저기 순찰하며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냉동 창고까지 확인해봤던 것입니다. 경비원 아저씨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대했지만, 당신은 매일 나에게 인사를 해주니 늘 당신이 기다려지더군요. 내가 그래도 사람대접을 받는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SOS 생명의 전화'의 자원봉사가 나지훈 교수는 최근 자살로 세상을 떠난 교사가 늘어난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훼손될 때 자살을 시도합니다. 존중받아야 할 개인들이 [어떤]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경험을 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냉동식품 공장의 경비원은 날마다 자신에게 건네진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라는 짧은 인사 한마디에 자신이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여직원이 날마다 건넨 짧은 인사 한마디가 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마디가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힘들었겠다"라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립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요한복음 20:19) 꽁꽁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맨 처음 하신 말씀도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다들 잘 있었느냐?"(요한복음 20:19,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이 십자가 사건 이후 도망쳤던 제자들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의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몇 대 몇입니까? '살고 싶은 마음 49 대 죽고 싶은 마음 51'입니까, 아니면 '살고 싶은 마음 51 대 죽고 싶은 마음 49'입니까.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마태복음 6:34)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영감을 받은 한 시인이 이렇게 우리를 위로합니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다 /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린도후서 1:3-5) 했습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 7:6)께서,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시편 86:17)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여러분을 위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쓰라리게 울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몸 마음이 아파서 / 외롭고 우울한 이들 위해 / 오늘은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 고통을 더는 일에 / 필요한 힘과 도움 되지 못하는 / 미안함, 부끄러움 / 면목 없음, 안타까움 / 그대로 안고 기도합니다 / 정작 위로가 필요할 땐 곁에 없고 / 문병을 가서는 헛말만 많이 해 / 서운할 적도 많았지요? / '자비를 베푸소서!' 외우는데 /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 이 가난하지만 맑은 눈물 / 작은 위로의 기도로 받아주시면 / [설교자인] 제게도 작은 위로가 되겠습니다."(이해인, <아픈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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