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이>, 뇌 복제한 의체가 더 인간적인 이유

영생욕에 감춰진 숙명론적 죽음관에 대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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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넷플릭스)
▲뇌를 복제한 인간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연상호 감독의 신작 넷플릭스 영화 '정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뇌를 복제한 인간 엄마와 딸의 관계를 소재로 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넷플릭스 영화 <정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영화(비영어) 부문 1위를 기록하는 등 남다른 흥행 성적을 올리고 있지만 <정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크게 엇갈리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한국형 SF 장르물이라는 점에 혹해 영화를 시청한 이들의 실망감이 컸다.

<정이>는 SF라는 형식을 차용했을 뿐 그 내용은 모녀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SF의 탈을 쓴 신파극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때문에 <지옥>에서처럼 감독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기대했던 시청자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 특유의 작품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도 있었다. A.I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복제한 뇌를 A·B·C 타입의 의체에 심어 영생을 이어갈 수 있다고 소개하는 장면이다. 거금을 필요로 하는 A타입은 인간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사기업에 뇌 정보를 팔고 의체를 제공 받는 C타입은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없다. 빈부격차가 만드는 A.I의 어두운 세상을 직관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는 A.I 개발 회사인 크로노이드사 회장의 입을 빌려 테세우스의 배의 문제도 잠시나마 언급한다. 뇌를 복제해 의체에 심은 복제인간이 최초 뇌 정보를 넘긴 인간과 동일한 인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뇌를 복제한 A.I가 윤정이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 <정이>는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겨 버리고 말았다.

툭툭 던지는 질문에 그쳐서인지 엄마의 뇌를 복제한 A.I인 정이를 마치 엄마처럼 여기며 정이의 해방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던진 윤서현 팀장(강수연 분)의 사투는 어색할 뿐더러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뇌를 복제한 A.I는 윤정이일까 아닐까 하는 물음표는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며 수수께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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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넷플릭스)
▲뇌를 복제한 인간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연상호 감독의 신작 넷플릭스 영화 '정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다만 인간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대목에서는 감독의 진전된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복제된 뇌를 지닌 A.I의 인간성은 살과 피를 가진 육체라는 제한된 조건을 뛰어 넘은 의체에서도 성립 가능한데 그 인간성을 구성하는 키워드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뇌 복제된 A.I '정이'가 딸 윤서현 팀장의 엄마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이 '관계'의 특수성에서 구축된다.

이 '관계'의 특수성은 식물인간이 되어 '관계'의 단절이 찾아온 윤정이와 복제된 뇌를 의체에 심어 '관계'를 활성화 시킨 A.I 정이와의 대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성을 관통하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살과 피가 흐르는 육체를 가졌으나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윤정이 보다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A.I 정이가 충분히 더 인간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정이'를 포함해 복제인간 장르물은 인간의 영생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역설로 시청자들을 이끌어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게 한다. 이 지점에서 물음을 달리 해보면 어떨까? 영생욕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도전적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저 숙명이고 저주이며 재앙일 뿐이겠느냐는 물음이다. 죽음을 숙명으로 보는 비관주의는 죽음 자체의 수용이 삶을 더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죽음관이 아닐까?

그렇다고 죽음을 예찬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삶에 내던져진 우리에게 죽음과 삶은 더이상 형식논리적 모순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실존방식으로 풀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철학자의 지적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이지만 실상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죽음을 시작하고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죽음은 동시에 삶인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살면서 죽는 것이고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흙으로 돌아가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연질서, 즉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존재방식으로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동시에 삶과 죽음의 순환관계에서 작동되는 지구 생태계라는 '전체'를 보존하는 방법이기에 죽음의 수용이 '개체'와 '전체'의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정이>가 던진 물음에 이제 시청자들이 답할 차례다.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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