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부르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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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6:8-12, 베드로전서 3:13-17, 누가복음 4:21-30

설교문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찾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멋진 말 같기도 하고, 그 말이 그 말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해 365일, 우리는 왜 또 살아가야 합니까?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소명'(召命)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소명이란 사전적으로 '신하를 부르는 왕의 명령'입니다. 소명은 특별한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선 생명 자체가 소명입니다. '생명'(生命)이란 글자 그대로 '살라는 명령'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창세기 1:3)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불러내셨습니다. 비존재에서 존재를 불러내셨습니다. 불러내는 것("to summon")이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나를 지으신 창조주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예레미야 1:5)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시편 기자는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71:6)라고 노래했습니다. 성서에서 '택하심'과 '부르심'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성서는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 설교' 혹은 '취임 설교'로 알려진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렀을 때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러 서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 4:18-19) 이것이 주님의 '사명 선언'(mission statement)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이렇게 설교하십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 4:21)

우리말 번역에는 "이 글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신약성서의 원문인 헬라어(그리스어)로는 "오늘"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오늘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즉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오래전 선포된 성서의 약속과 예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역사의 종말에 가서가 아니라 "너희가 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교회(ekklesia)란 '부르심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행하신 소명을 계속 이어가라고 부르심 받은 무리가 교회입니다.

한희철 목사의 기도시 <나를 몰아가는 당신>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에서 함께 묵상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몰아가십니다 / 휘몰아가십니다 / 익숙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라 하십니다 / 내일을 짐작할 수 있는 둥지를 떠나라 하십니다 /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을 벗어나라 하십니다 / 멀리서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을 등지라 하십니다 / 또 하나의 광야 / 인적이 없는 길 / 그 길을 걸으라 하십니다 / 모래바람 속에 웃음으로 계신 당신 / 모래바람 헤치느라 / 행여 당신 지나치는 일 없게 하소서."

목사인 시인은 왜 익숙하고 편안한 집과 둥지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잘 아는 길을, 그리고 멀리서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을 등지고 떠나려 합니까? 주님께서 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휘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마친 후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길을 가신 것처럼, 그가 우리를 또 하나의 광야, 그 길을 걸으라고 휘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기도는 저의 이야기 같아 울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겨우 13살 적에 저의 어머니께서는 자기의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구약성서의 한나 이야기에 감동하셔서 그만 저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셨습니다. 저는 커서 매일 술만 드시고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제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부르심의 길이라는 확신을 얻기까지는 이후 15년의 세월이 더 걸려야 했습니다. 그 확신을 얻은 곳은 뜻밖에 필리핀의 네그로스섬이라는 아주 낯선 곳이었습니다.

네그로스섬은 세계 사탕수수 주산지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설탕이 거기서 나옵니다. 하지만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일어난 곳은 어디나 그렇듯이 대다수 소농이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곳입니다. 자기 집 앞마당에 사탕수수 대신 쌀을 심었다고 자경단(vigilante)에 의해 살해당하는 곳입니다. 거기에 가서 농부들의 고단한 삶을 취재해 세계교회에 보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아름답게 석양이 내리는 시간에 사탕수수를 베어낸 고즈넉한 언덕 위로 '꼬레아'에서 왔다는 '리포터'를 구경하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모깃불 냄새는 구수하게 피어오르고, 뗏국물에 절은 아이들은 그 크고 예쁜 눈들을 엄마 치마 뒤에 감추고서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이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대표가 들려준 그들의 가난과 고통의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는 물어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인터뷰'를 끝내려고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약 지금 미화 100불 가지고 계신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네그로스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내가 쉽게 요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통역자가 그들의 말로 제 질문을 옮기는 동안 저의 머릿속에는 보통 사람들이 갑자기 금전적 행운이 따랐을 때 사고 싶어 하는 것들의 목록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옷을 좀 산다든지, 구두를 산다든지, 여행이나 유흥을 즐긴다든지, 아니면 일부를 저축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제 질문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마치 합창이나 하듯이 거기 있던 온 마을의 성인남녀가 일제히 '부가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내가 '부가스'가 뭐냐고 통역자에게 묻자, 그들은 자기네 '합창' 소리에 내가 놀란 것을 미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잠시 미소를 짓더니 통역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쌀이라는 뜻입니다." "쌀이라고요?" 나는 잠시 멍해졌습니다. "아니 '겨우' 쌀이라는 말인가! 일 년 치 이상의 임금인 그 큰 '여윳돈'을 가지고 '고작' 쌀을 사겠다고?!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저들의 무슨 이야기를 들은거지?!" 그때 마을 사람들의 '부가스'라는 외침이 제 가슴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렇구나. 쌀이구나! 저들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조금의 여유도 없이, 절실하게 필요한 게 쌀이구나, 쌀이야!" 그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고난을 제법 이해한다는 제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사치스럽고, 여유 있는 말장난인지 사정없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부가스!' 그 외침은 이 세상의 맨 밑바닥에서 울려 나온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갇힌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아시아 여러 가난한 나라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전쟁터에 종군기자로 들어갔다가 시콜스키 헬리콥터의 공대지 미사일 두 번이나 맞고 죽을 뻔했고, 의사도 또 약도 없는 인도의 한 깡시골에서 이름도 모르는 열병에 걸려 일주일을 헛소리하며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해골탑 앞에선 넋을 놓아 울기도 했고, 스리랑카의 콜롬보 공항을 빠져나온 뒤 5분 후에 그 공항은 차량 폭탄 테러로 쑥대밭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오사카의 재일동포 빈민촌 히가시꾸조에서 한겨울에 200명씩 얼어 죽는 노숙자들을 보기도 했고, 홍콩의 화려한 뒷골목에서 숨어 지내는 베트남 보트피플의 참상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여행자'(tourist)가 아니라 '순례자'(pilgrim)로 아시아 밑바닥을 여행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역사의 깊이와 고통, 그리고 그 안에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 해방과 자유의 희년을 선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서원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결심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를 "또 하나의 광야 / 인적이 없는 길 / 그 길을 걸으라" 휘몰아가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명(順命)하기로 했습니다.

"웃이야 왕이 죽던 해"(B.C.E. 739)에 이사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웃시야 왕은 남유다왕국의 열 번째 왕으로 매우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기에 유다는 과거 전성기 때의 국력을 회복해서 백성들은 평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죽었다는 건 이제 번영과 안정의 시기가 저물었다는 뜻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앗시리아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며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맡은 소명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이사야에게 여호와께서 주신 소명은 이것이었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사야 6:9-10)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들어 깨닫게 하고 보고 알게 하라 하셔도 시원치 않을 텐데 오히려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니요. 아, 그랬습니다. 이사야가 받은 소명은 이스라엘이 준엄한 심판을 받아 완전히 황폐하게 될 때까지 그들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거짓 평화를 말할 때 눈앞에 닥친 패망을 있는 그대로 직설(直說)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너무도 당황한 이사야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러자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이사야 6:11-12)라고 답하십니다. 민족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악역(惡役)을 맡으라는 것이 이사야에게 주어진 신명(神命)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었겠습니까. 물론 이후에 소수의 '남은 자'가 회복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주시지만, 이사야가 걸어야 했던 소명의 길은 절대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받은 그는 그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 설교를 끝내셨을 때 청중의 반응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청중은 "놀랍게 여겼다"(누가 4:22) 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이 반응이 180도 달라집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누가 4:22) 수근거렸습니다. 한갓 요셉의 아들 따위가 무슨 선지자 노릇을 하느냐는 반감의 표시입니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을 예상이나 하신 듯 예수님은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네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과 같은]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해보라] 하리라" 말씀하시며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한탄하십니다. 그리고는 과거 구약의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유대인이 아니라 두 이방인, 즉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의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누가 4:23-27) 결국 대소동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심으로 위험을 모면하셨습니다.(이상 누가 4:28-30) 도대체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분노했을까요?

예수께서 겪으신 참담한 일은 그분에게서 끝나지 않고 이후 그분의 사도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사도 베드로도 물론이지만(사도행전 3-5장), 사도 바울이 안디옥의 한 회당에서 설교한 직후 겪은 청중의 반응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겪으신 일과 거의 판박이입니다.(사도행전 13:44-52)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도 반대와 적대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르심의 길을 가는 예수의 사도들에게도 극심한 반대와 적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 역시 그런 반대와 적대를 만날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21)

요한복음 10장 3절에,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새번역)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자는 양의 무리를 하나의 집단으로 보지 않고,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 마리, 한 마리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 중에서 단 한 마리를 잃어도 목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계곡을 뒤져 그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 양을 아흔아홉 마리 중의 한 마리라는 산술적 숫자로 기억하지 않고 그 양의 이름과 얼굴과 성격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 곧 호명(呼名)이 곧 소명(召命)입니다. 호명은 '불러내는 것'입니다. 제 이름은 '윤재'입니다. 한자로 미쁠 '윤'(允)에 실을 '재'(載)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제가 '믿음직한 일꾼'이 되기를 바라면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솔직히 잘 먹고 잘 살라는 편한 이름을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제 부모님의 기대와 기도에 얼마나 응답하며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름 안에 담긴 기대와 소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 대로 살고 있습니까?

여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외에 한 가지 공통된 이름이 주어져 있습니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대 '프리드릭스버그 전투'(Battle of Fredericksburg)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를 남겨놓은 채 쌍방을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나갔습니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군 장교 하나가 북군 병사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What is you name?" 그 병사가 답했습니다. "My name is Christian."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 값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와 목숨을 건 이름이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보시면 눈에 띄는 아주 재미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이 선언문은 당시 26세의 청년으로부터 70세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목사, 의사, 변호사 등 56명이 서명했습니다. 이때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아주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56명의 서명이 모두 여섯 줄로 나란히 적혀 있는데 유독 존 핸콕(John Hancock)이라는 사람의 서명만이 선언문은 제일 윗부분 한가운데에 그것도 대문짝만한 글씨로 씌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사람들도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 눈이 나쁜 영국 국왕 조지가 내 이름을 똑똑히 보아야 하지 않겠소!" 그는 자기의 이름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름, 그 소명에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베소서 5:8) 했습니다. '빛의 자녀'가 우리의 이름이고 신분이며 소명입니다. 성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다]"(디모데전서 6:10-12) 했습니다. 눈앞의 편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 곧 크리스천의 소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서는 또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연민]하며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베드로저서 3:8-9) 했습니다. 서로 한마음이 되어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신 이유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이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며, 지금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마서 1:6)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입니다. 부르심은 특별한 사람만 갖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로, 곧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가 되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디모데후서 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아무 값없이 주어진 가장 값진 은혜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복이고 영예이며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2023년 새해에도 이 부르심의 은총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로"(고린도후서 2:16)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도 "더욱 힘써 [여러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십시오]."(베드로후서 1: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로마서 8:28)입니다. 2023년 새해 우리 앞의 부르심의 길에 어떤 난관과 역경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 이기리라"(요한계시록 17:14)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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