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새해주일설교] 담쟁이 예수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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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잠언 16:1-9, 히브리서 11:1-6, 마태복음 5:14-16

설교문

어느 목사님이 한밤중에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사님이 차를 너무 거칠게 모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난 목사님이 점잖게 말했습니다. '저기, 기사님, 길도 어둡고 험한데 차를 너무 빨리 모는 건 아닌가요?' 그러자 택시 기사님이 답했습니다. '손님도 참, 그렇게 무서우시면 저처럼 이렇게 눈을 꼭 감고 계세요!'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천국 문을 지키고 있는 베드로 앞이었습니다. 결국, 큰 사고를 내고야 만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천국 명부를 보며 말했습니다. '음... 총알 택시 기사님... 어서 들어오세요!' 택시 기사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여 얼른 천당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은 '허허,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천당에 들어가겠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자네는 지옥으로 가야겠어.' 깜짝 놀란 목사님이 항변했습니다. '아니, 총알택시 기사도 천당에 갔는데, 왜 제가요?' 베드로 사도가 답합니다. '자네가 설교할 때는 신도들이 모두 졸았지만, 저 택시 기사가 운전할 때는 모든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자네도 방금 전에 그러고 있지 않았어?'

새해가 밝았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목사들이 말씀을 전할 때 졸지 말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들도 천당에 가야 하질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여러분, 눈을 감고 운전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앞길이 캄캄하고 무섭다고 해서 눈을 감고 운전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도 자동차 운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길, 저런 길, 또 좋은 길, 험한 길, 그런가 하면 밝은 길, 어두운 길 모두 만나기 마련인데, 혹 지금 낯설고 캄캄한 밤길을 만나 무섭다고 두 눈을 꼭 감고 무조건 가속기만 밟고 계신 분은 안 계신가요?

영국의 콜린스 사전은 2022년 '올해의 단어'(Word of the Year 2022)로 '퍼머크라이시스'(permacrisis)를 채택했습니다. 영어 '퍼머넌트'(permanent, 영구적인)에 '크라이시스'(crisis, 위기)를 합성한 단어입니다. 위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 혹은 긴 기간 지속되는 불안과 불안정을 가리킵니다. 지금처럼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비틀거리며 가는 상황을 '퍼머크라이시스'라는 단어는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 옮긴다면 '항구적 비상상황'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순이지요. 어떻게 비상상황이 항구적일 수 있습니까. 코로나, 기후위기, 전쟁, 그리고 고물가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한 인류의 현 상황을 이 단어는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지만, 상황은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365일은 더욱 캄캄하고 험한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잠언 16장에는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을 살아갈 생명과 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3절) 먼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경영'은 히브리어로 '마아라크'인데 면밀하게 검토하고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몫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길을 계획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렁뚱땅 사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은 고민과 섬세한 계획과 땀 흘리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에는 "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편 37: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 "여호와께서 [신]실한 자를 보호하[신다]"(시편 31:23)라고 했습니다. 내 삶이 성실하고 신실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됩니다.

성실하고 신실하게 내 삶을 경영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안해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풀을 벨 때 들판의 끝을 보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풀을 베던 사람이 일어나 들판의 끝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풀을 벨 힘을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아이고,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았나!' 아니면 '아직도 요것밖에 못했나!' 하며 지금 하는 일이 하기 싫어지거나 더 힘들어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풀 베던 낫을 던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지금 풀을 베고 있다면 풀 베는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베느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주어졌느냐, 정말 하기 싫다' 등의 생각을 하지 말고 오직 풀을 베는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할 수 있고,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습니다.(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 마디』 중에서.)

미래는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 앞의 미래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은 미래에 달린 일이 아닙니다. 현재에 달린 일입니다. 현재가 미래를 낳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성실한 현재는 풍요로운 미래를 낳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9:62) 했습니다. 뒤돌아보거나 망설이지 마십시오. 또 성서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 실제 상황]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그 믿음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성취하게 할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이 사람에게 있다고 한 잠언 16장은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감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토겐'은 양을 재고 무게를 측정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그 계획의 동기를 자세히 살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생각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는 말은 사람이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의 길을 잘 계획하여 준비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면 실행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로마서 12:2, 새번역)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고 그에 따라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새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365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누구에게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뜻하는 헬라(그리스)어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 시간으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반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영원성이 있는 절대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위기'라고 말할 때 그 영어 단어 '크라이시스'(crisis)의 어원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회심과 결단의 시간입니다. 변화와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했습니다. 여기서 '때'가 카이로스입니다. "때가 악하다"라는 말은 '지금이 위기의 시간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위기의 시간은 단지 파멸로 향하는 위기가 아니라, 그 파멸의 길에서 깨닫고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회심과 결단, 변화와 은총의 시간입니다. 한자로도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가 악하다고 말하고 나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언인가 이해[하십시오]"(에베소서 5:17)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 생명의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새해라는 시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얼마나 거룩하게 여기고 사용할 것인가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위험 속에서 생명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 안에 살도록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잠언 16장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성실하게 살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3절) '맡기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굴린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돌을 굴려버리듯 너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돌을 굴려버리면 나는 그 돌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 돌이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굴러갈지 나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굴려버리십시오. 그가 완성하고 이루실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했습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되고 안 되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절) 했습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되,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대 후문 이대부중 앞길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곤 합니다. 통행하는 차는 많고 길은 좁아 혹시라도 우리 학생들이 다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 있으면 왜 그렇게 푸른 신호등은 늦게 켜지는지요. 그때마다 저는 이대부중 담벼락을 온통 뒤덮은 담쟁이를 보고 신기해 하곤 합니다. 연약한 수천 개의 작은 잎으로 담벼락을 다 덮은 담쟁이들을 보면서 그 담대한 용기와 싱싱한 생명력에 감동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담쟁이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은 분이실 거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입니다. 새해의 첫 공동기도문으로 읽었습니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벽입니다. 어쩔 수 없는 벽입니다. 새해 앞길을 보니 절망의 벽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그 벽을 오릅니다.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 뼘이라도 반드시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갑니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절망을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결국,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그 벽을 넘고야 맙니다. 이 시에서 그 "담쟁이 잎 하나"는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들립니다.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벽을 넘게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들립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히브리서 10:19-20)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넘을 수 없는 벽을 자기 몸으로 덮어 생명의 길을 내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서 호령하는 분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에베소서 2:7-8)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에베소서 2:14) 우리를 참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바로 그가 2023년 새해의 벽두에서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말없이... 서두르지 않고... 함께 손을 잡고...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이 세계의 절망을 포월(匍越)하시는 분, 곧 담쟁이처럼 절망의 벽을 기어서 기어코 넘으시는 분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2023년 한 해에도 여러분의 손을 꼭 붙잡고 저 어둠과 절망의 장벽을 넘어 여러분을 소망의 나라에 이르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한때 북한산 향로봉을 등반했습니다. 30m 바위벽을 맨손으로 오르곤 했습니다. 지금은 사고가 많아 등벽을 막았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바위벽을 맨손으로 오르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 멀리서 보면 잡을 곳이 전혀 없는 바위를 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이 세상에 조그만 틈새가 없는 바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리 험준한 바위산이라도도 반드시 '틈새'(niche)가 있습니다. 그리고 틈새가 있는 이상 바위산 정복은 시간문제입니다. 저는 등반하며 배웠습니다. 인생의 앞길에는 언제나 거대한 바위벽이 버티고 서 있으나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면 틈새 없는 바위는 없고 못 오를 바위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명기 31;6) 하셨습니다. 그가 "크신 긍휼로 [너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너희]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너희의] 갈 길을 비추게 하셨[다]"(느헤미야 9:19)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시편 46:7) 우리는 2023년 새해의 모든 장벽을 다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퍼머크라이시스' 시대입니다. 이 위기에서 저 위기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비틀거리며 갑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눈을 감고 인생의 자동차를 운전하진 마십시오. 깨어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자기의 삶을 경영하십시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은 고민과 철저한 계획과 무한한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풀을 벨 때는 절대로 들판의 끝을 보려고 일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해하지 말고 오늘을 충실하게 하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인간의 시간에 이리저리 떠밀리지 말고, 우리를 새로운 존재와 생명의 역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사십시오.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성실하고 신실하게 내 삶을 경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굴려버리십시오.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돌을 굴려버리듯 여러분의 일과 삶을 하나님께 굴려버리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가 완성하고 이루실 것입니다. 푸르게 저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담쟁이 예수'께서 우리 손을 꼭 붙잡고 저 벽을, 저 바위산을 오를 것입니다.

2023년, 토끼의 해 계묘년(癸卯年) 한 해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민수기 6:2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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