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삼열 (전.숭실대교수)
발표·2009년 6월 26-27일 '제2회 기독교 대북 NGO 대회'에서
남북관계가 다시금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적 가치관과 사명감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북 NGO 들은 어떤 원칙과 방향 감각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 아침 우리의 과제인 것 같다. 남북 대화가 단절되고 정부와 남북당국의 태도가 매우 경직되고 있는 국면에서, 대북 협력 사업을 하고 있는 NGO들은 기독교건 불교이건,종교적 단체든, 비종교인 시민사회 단체이든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고, 하던일을 중단 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고 문제가 심각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해오던 일들을 근원적으로 반성해 보아야 하며, 장애물이 생겼을 때, 오히려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며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 일수록 먼저 묻게 되는 것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기독교 대북 NGO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북NGO라고도 하고, 통일NGO라고도 하며 남북관계NGO라고도 불리우는 단체들은 통일부에 등록된 단체들만 2백여 개가 되며 그 종류와 성격도 매우 다양하다. 2007년 까지 통일부에 등록된 201개의 통일관련 시민단체의 분포를 보면, 통일운동단체가 56개, 학술연구단체가 32개, 남북교류 협력단체가 11개, 사회문화 관련단체가 97개, 통일 교육 등 기타분야의 단체가 5개이다. 이들 단체의 목적과 성격을 중심으로 나눠 본다면 1)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하는 단체 2)대북지원사업을 하는 단체 3)북한 인권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의 3가지로 나누어 불 수 있고, 이념적 성향으로 나눠 본다면 진보적 성향, 대중적 중도성향, 보수적 성향으로 나눠 볼 수 있다고 한 조사연구는 밝혔다. (이우영, “2000년 이후 남북관계 의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활동평가,”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 2000년 자료집, 남북관계와 시민사회. 2008년, p 85-113) 대체로87년 민주화운동이후 급격히 성장한 시민사회의 평화통일운동과 함께 나타난 대북NGO단체들 중, 기독교대북 NGO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는 구체적 통계를 잡기가 쉽지 않다. 초기에는 분명히 기독교 통일운동과 기독교적 대북지원활동이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와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일반 시민사회와 지방자치 단체들의 대북활동과 지원사업이 크게 늘어나면서 기독교적운동과 단체의 수자와 비중은 오히려 열세가 되는 경향이다.
기독교대북NGO는 평화통일운동 보다는 대북지원 사업에서 크게 성장했고, 최근에는 새터민 지원등 탈북자를 돕는 인권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주로 인도주의적 지원활동에 치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시민 운동 단체들에도 기독교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고, 조직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대북NGO활동에서 기독교가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북NGO의 북한지원 활동 중 재정적부담의 면에서 보면, 기독교NGO들이 민간단체 중 가장 많은 액수를 지원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5년부터2007년까지 대북지원액을 16억 달러로 보고, 이중 정부가 낸 것이 11억 달러이며, 민간이 5억 달러인데, 기독교 쪽에서 지원한 액수는 1억8000만 달러 (약 1700 억원)로 계상되므로, 대략 민간단체지원액 총액의 1/3에 해당한다고 한다. (김병로,“기독교 대북NGO의 분화와 지형분석”, 기독교통일학회 통일 NGO, 기독교 2008년, p 81-110)
기독교대북NGO활동이 평화통일운동과 남북관계의 개선, 북한동포의 인도적 지원에 끼친 공헌과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조사 연구와 평가가 나와 있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대북지원활동이 남북관계와 정부의 입장이 햇볕정책과 화해협력무드로 호전되던 시기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확장 되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경직되고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지속이 가능한 활동이며, 운동이냐 하는 것은 새롭게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가령, 정부에서 지원해 주지 않고 남북정부의 관계가 대결과 긴장속에 들어가도 화해와 공존을 위한 평화통일운동과 북한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이 계속 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를 심각히 반성해 보는 것이 기독교 대북활동의 정체성과 성격을 진단해 보는데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남북교류협력법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남한의 통일부와 북한의 통전부의 허락을 받아 추진될 수밖에 없는 NGO들의 활동이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활성화 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는 것은 불가피한일이다. 그러나 기독교 대북 NGO들이여건이 좋고 호의적이면 대북지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정부의 태도나 사회분위기가 별로 호의적이지 않고 장애가 많다면, 소극적이 되거나 포기하는 운동이라면 우리활동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한 NGO며 지원활동이냐 하는 것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통일운동이나 대북지원활동의 철학이나 원칙, 다시 말하면, 신학적인 배경이나 실천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신학자 Juergen Moltmann은 분단국인 독일과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 참여한다고 할 때, 어떤 신학적 근거에서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강연 도중에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분단 상황 뿐 아니라, 여러가지 사회문제에 직면했을 때, 참여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데, 항상 두 가지 원칙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복음의 선포(proclamation of Gospel)가 있느냐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봉사(diakonia of people)를 실천하느냐의 것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입장이었고 철학이었다.”
분단 상황에서의 말씀의 선포는 평화의 복음을 의미한다. 반평화적인 현실을 보면서, 정의와 인권이 짓밟히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의 증거 태도와 입장의 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불쌍하고필요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도움을 주는 실천행위가 따라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 통일운동이나 NGO 활동이 반평화적 현실 속에서 평화와 정의의 복음을 외치는 평화운동과, 곤경에 처한 북한동포와 궁핍한 사회를 돕는 지원활동의 양면에서 전개된 것은 몰트만의 신학을 따라서 보더라도 바른길이었다고 활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불의와 억압, 폭력과 독재가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그 피해자들이나 억눌린자들을 구제하고 지원하는 일만 할 수는 없으며, 복음의 정신에 따라 현실을 비판하며 현실을 개조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예언자적인 행동을 해야한다.
평화통일운동이 반평화적인 대결체제를 비판하며 화해와 신뢰구축을 통해 상생과 통일에 도달해야한다고 선언문을 내고 외친 것은 말씀의선포 (proclamation)행위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분단체제에 의해 희생된 이산가족의 재회나, 군비경쟁과 전쟁 때문에 궁핍해진 서민대중들의 식량과 의료, 교육을 돌보는 일은 봉사적 활동 (diakonia)에 속한다. 한국기독교의통일운동이 시작되던 1980 년대에는 금지되었던 통일논의의 자유화를 부르짓고 억압 되었던 북한과의 접촉과 대화, 교류를 트는 것이 예언자적인 선포에 해당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가 중심이 되어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함께 84년에 도산소회의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86년에 북한의 교회대표들과 만나 글리온 선언을 발표하고, 88년에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88선언에는 분단에 대한 죄책고백과 함께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5대 원칙을 내 놓았다.
7.4공동성명의 3대 원칙을 준용하여 1) 민족우선의 원칙 2) 평화우선의 원칙 3) 신뢰와 교류우선의 원칙 세 가지를 만들고, 다음으로 4) 인도주의 우선의 원칙 5) 민주적 참여와 민중우선의 원칙을 덧 붙쳐 5대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이들 원칙에 따른 여러 가지 정책의 제안 중 통일논의의 자유화와 남북교류협력, 평화통일운동에 시민사회의 참여 등 여러 가지가 88년 정부의 7.7선언과 92년 남북합의서를 통해 실현되었으나, 평화 협정체결 등 평화체제실현을 위한 방안들은 아직까지 실천되지 못했다.
KNCC의88 선언은 분단 50 년이 되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7년 뒤의 평화와 통일의 실현을 위해 전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운동하고, 평화교육을 실시하며, 북한교회와 함께 매년 8,15 광복절 기념 주일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주일로 지키기로 하였다. 이 선언과 희년선포는 북한교회,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지지도 받아, 남북교회가 함께 매년 공동기도문을 발표하고 열심히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 모두가 평화의 복음을, 평화가 없고 억눌리는 한반도에서 선포하며 증거하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던 평화와 통일은 95년에 오지 않았지만, 90 년대에 와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89년에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에 동서독이 통일되었으며, 그 뒤 속속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민주화되고, 소련연방이 15개 공화국으로 해체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한반도에도 평화통일의 기운이 올라 92년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 선포되고, 남북한 유엔동시 가입이 실현되었으며, 중국 소련과 한국이 국교를 맺는 북방정책이 실현되었다. 이러한 토대와 과정을 거침으로 2000년 6월에 1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2007년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었다. 90년대의 이러한 정세 변화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곤경에 처한 북한의 인민들을 돕고, 홍수피해로 기근이든 북한에 식량과 의약품을 보내는 등 대북구호와 지원사업에 많은 열성을 보였다. 남북나눔 운동을 비롯하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십여개 기독교 대북NGO들이 조직되고 활동을 강화했다. 봉사(diakonia)에 해당하는 많은 사업과 활동이 전개 되었고, 많은 단체들과 NGO 운동가들의 헌신적 노력과 봉사활동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과 6자 회담의 정체, 금강산 관광정지, 개성공단갈등, 남북대화의 단절 등으로 대북NGO 활동이 거의 정지된 상태에 이르고 있다. 2009 년에 들어와 방북허가를 받아 북한을 다녀온 NGO 단체는 한 두개 밖에 없다고 한다. 작금에 와서 북한의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6자회담 폐지 선언, 남한의 PSI 가입, UN안보리의 대북제제결의, 한미정상들의 핵우산합의 등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달리고 있다. 무력충돌과 전쟁재발의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한반도와 남북관계는 중대한 시련과 위기를 맞게 되었고, 우리 대북NGO 활동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우리는 지금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쟁준비를 강화하는 상황인데도 대북지원사업을 계속 해야 하느냐, 아니면 압력과 제재를 위해 일체의 지원과 경제 협력을 중단해야 하느냐의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더구나 북한내 인권탄압이 심각하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높아지고 있고, 국제기구들도 북한의 인권문제를 맹렬히 고발하고 있는데, 우리가 남북관계 유지와 북한의 자극을 피하기 위해 계속 침묵하고 있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일기도 한다.
지금정부가 채택하고 있는 대북정책은 냉정한 상호주의이다. 네가 하나 양보하면 나도 하나 주고, 네가 한대 치면 나도 한대 쥐어박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갚겠다는 율법적인 원칙이다. 핵무기를 폐기하면 국민소득 3.000달러까지 올리는 경제원조를 하겠고, 핵실험을 또 했으니 우린 미국의 핵우산 속으로 들어가고, PSI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의 원칙은 상호신뢰와 선제적 양보에 있는데, 처음부터 불신과 의혹에 곽 차서 “더는 않 속겠다” “믿지 못하겠으니 먼저양보하면, 나도 하나 던져 주겠다”고 부정적 상호주의를 내 세우면, 남북관계처럼 오랜 불신과 적대감으로 악화돤 대결 구조는 해소되기 어렵고, 점점 더 경직되고 위험한 긴장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에 획기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핵실험을 통해 긴장 상태가 되었더라도, 쌀과 비료같은 인도적 지원은 계속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연례적으로 진행되었고, 약속했던 지원이라면 중단해선 안된다. 설사 정부의 돈과 물자를 보내는 것은 잠시 중단했더라도, 민간운동이, 특히 종교단체가 하는 지원활동은 중단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 대북NGO들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인도적 지원사업을 계속해야 한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해외의 선교단체나 국제기구를 통해서라도 적은 물자라도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신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서독의 분단시기에 장벽을 넘어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났어도, 서독의 신문과 TV를 금지 시키는 인권탄압이 자행 되었어도, 서독의 교회들은 동독의 교회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성탄절과 부활절 때 선물을 실은 열차가 몇대나 동독으로 넘어갈 정도로 인도적 지원을 계속 했다.(이삼열, “독일교회와 통일문제",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편,분단현실과통일운동.민중사1984.p256-367)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40여년 동안, 영구분단이 될지, 통일의 길이 열릴지, 전쟁이 날지 모르는 냉엄한 분단체제의 현실 속에서도 동. 서독은 인도적 지원과 동족간의 편지교환, 가족간의 일시적 방문등 교류의 맥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로운 분단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며, 때가 왔을 때 평화적인 통일까지 이룰 수 있었다. 분단시기에 독일교회의 신학적 성명서들을 보면, 외세에 의한 정치적인 분단을 감수 하더라도 민족의 삶 (Das Leben
derNation) 과 평화를 분단체제 속에서라도 확보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코 동독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성명을 내지 않았다. 이제 기독교의 통일운동과 대북NGO 활동은 군사적 충돌과 전쟁의 위험마저 도래하는 위기의 현실을 보면서,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민족 내부의 나눔과 봉사마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 하기위해 평화체제를 실현 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아 국내외 정치인들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적 입장은 분명하다. 민족의 삶과 평화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 선지자들과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막아야 하며,평화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 길을 모색하기위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합심해 노력해야하며, 특히 기독교 대북NGO들이 연대하고 결속해야 한다고 믿는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