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20. - Day 21. 그래도 혼자보다 여럿이 낫다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레온(León): 9시간 30분 (46.7Km)

leon_01
(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산티아고 순례를 하며 마주하게 되는 대도시, ‘레온(León).’ 도시를 알리는 레온이라는 큰 글자와 그 글자 위를 걷고 있는 한 소녀가 마치 이곳이 누군가에게는 환승역이지만 누군가에는 정착역임을 알려주었다. 누군가는 머물고 누군가는 떠나야만 한다.

동생들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모레다. 하지만 지난밤 잠들기 전에 생각이 달라졌다. 이틀에 나눠 걸을 거리를 하루로 단축 시키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나의 동행들은 레온에 있다. 그리고 나와 그들 사이에는 까마득한 거리가 놓여있다.

레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전인 어스름한 새벽, 나는 왜 무리하면서까지 단번에 그곳으로 넘어가려는지 궁금했다. 질문은 나름 진지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외로웠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 시간 속에서 몹시 외롭던 것이다. 더구나 혼자가 된 이때 머물게 된 마을이 작고 조용하며 사람도 보이지 않는 마을이라니. 여러 상황이 중첩되었기 때문일까? 혼자된 기분은 평소보다 배가 된다.

물론 외로움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레온으로 빨리 가려는 걸 보면 혼자보단 여럿이 있는 게 더 나은가 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은 혼자 살긴 힘들다.

동트기 전 출발한 걸음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멈춰섰다. 거의 10시간 만에 목적지 도착이다. 지금까지의 순례 중 가장 긴 거리를 걸었기 때문일까? 무릎에 통증이 유별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끼니를 해결할만한 적당한 식당도 찾지 못해 과일로 대충 위를 채우다 보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좀비처럼 레온으로 입성하는 나를 산책 중이던 동생들이 존경의 안경을 쓰고 맞이해 준다. 세상 반가웠다. 딱 하루 못 본 것뿐인데 무척이나 보고 싶었나 보다.

leon_02
(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손 십자가를 한 손에 거머쥔 채 길을 걷는다. 순례자를 향해 “그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실크로드 위에 그의 슬픔과 삶의 공허감을 내려놓도록, 그리고 그의 영혼이 맑게 씻겨 반짝이는 눈으로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바랐던 <오자히르>라는 소설 속 주인공 이야기가 계속 가슴에 남았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영혼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맑게 씻기고 반짝이기를 기도한다.

그날 알게 된 사실은 현정이의 발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이 걷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라도 함께 걷자고 제안했던 나였었기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동안 아픈 걸 꾹 참고 함께 걸어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다시 한번 되뇌는 말이지만, "그저 가까이 혹은 멀리에서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마음의 유대는 더 특별하게 완성된다"라는 김효정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김효정, 『미래에서 기다릴게』, 허밍버드, 2014, p.42) 참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

힘들지만 벅찼던 하루를 마무리하다 전에 휴대전화 속에 메모해 두었던 시 한 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문재 시인의 시였는데, 시 화자는 '자유'와 '고독'의 개념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반복해서 읽어도 또 누군가에게 소개해도 좋을 시 같아 이곳에 옮겨 적어본다. 여전히 홀로됨이 두려운 내가 머지않아 자유 속에서 고독을, 고독 속에서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할 수 있길 함께 바라본다.

leon_03
(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대도시에 가게 되면 항상 잊지 않고 검색해 보는 것이 있다. 그건 알베르게도 아니고 맛집도 아닌 바로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자재 마트다. 그곳에 뭔가 엄청난 게 숨겨져 있어서일까? 아니다, 단지 김치와 신라면이 매우 그리웠기 때문이다. 부르고스(Burgos)에서 허탕을 치는 바람에 이번엔 기필코 성공하리라는 마음으로 레온에 입성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p.22-23)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