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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그의 이름은 정의입니다 (1)

삶을 위한 신학-신학을 위한 삶 / 2009년 5월 방한 강연

다음은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방한 중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공개 강연한 발제문이다. 몰트만 박사의 허락을 받아 강의 내용 전문을 싣는다.  


▲ 튀빙엔 대학 위르겐 몰트만 교수
1977년 저는 6주 동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트리니다드를 들며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강연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 저는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해방신학자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 자리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진리를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제1세계 신학자'로 취급받는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를 어떤 신학적인 인식으로 인도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신학"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억압하는 자의 해방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억압받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 모두의 인간됨을 위한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가 억압과 학대와 착취라는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양쪽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은 자명한 것입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의 하나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든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저는 그 강연 여행에서 돌아와 "억압하는 자의 해방"에 관한 논문을 한편 썼는데 그 논문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제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 신학과 영성이 범하고 있는 근본적인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중세의 고해 성사가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악행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도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죄와 악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불의와 폭행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흘려듣지 않았습니까? 죄인의 칭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피해자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주 세속적인 이유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서구 법률 체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로마의 법률 체계는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예컨대 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벌을 받음으로써 속죄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악행을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냥 도둑질 당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 선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을 주는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정의, 즉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오늘 강연을 통해서 저는 바로 이 창조적인 정의,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천착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칭의론을 쓰고,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우선 전통적인 참회론(고해성사 Bussakrament)과 신앙론의 결점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가톨릭의 참회 성사는 악의 힘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잘못으로 환원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해자 중심의 사유로서 피해자는 완전히 잊히게 됩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활없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념과 실천도 철저하게 가해자 중심이고 죄의 종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그 죄의 피해자들을 잊어버립니다. 중세의 참회 성사와 마찬가지로 칭의론도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사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안고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죄의 말씀과 용서의 언약은 인간의 믿음을 수동적인 수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칭의, 즉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적극적인 칭의와 차원을 잃어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죄인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합니다(롬4:25)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구원하시는 정의(시31:1)이며,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함께 고려하지, 피해자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정이의 목표는 영혼구원 혹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입니다.

1. 정의를 향한 외침

피해자 : 오늘 우리는 정의를 향한 외침을 어디서 듣고 있습니까? 그 외침은 가해자, 큰 죄를 진 사람한테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들, 불의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서 들려옵니다. 그들에게는 정의를 향한 외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외침입니다. 억압당하는 민중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을 듣습니다.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있는 이 땅 피조물의 신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분의 정의를 향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만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치솟아 오르는 절규입니다. 악의 세력에 힘없이 내맡겨져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 같이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인간 대학살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또 이른 나이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 그 소름끼치는 숫자를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의 운명이 있습니다. 그 운명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외침은 인류의 큰 범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쓰나미와 싸이클론과 지진은 수천명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일가요? 우연은 변덕스럽고 운명은 눈이 멀었습니다. 범행과 자연 재해의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가해자 :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또 다른 외침은 가해자의 외침으로, 그 가해자가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게 됐을 때 터져나오는 외침입니다. 가해자들이 희생자를 약탈하거나 억압하거나 심지어 살해했을 때, 그들은 악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시켜서 일을 했거나 그걸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악의 희생자였습니다. 물론 그 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희생자들과는 다르지만 가해자들도 악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책을 떠안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은 악순환에 연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가해자들의 외침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맹목성과, 여러가지 고발을 대하는 완고함과, 우리 사회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과, 사랑없음, 냉소주의,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이기주의 속에서 그 외침을 인식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정의에 대항하는 외침이 될 때가 많습니다. 1944년 한 장교가 러시아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과 정의가 존재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 때문에 전쟁 이후 독일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죄의 희생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상황 속에서(in Gottverlassenheit) 정의를 향해 부르짖는다면, 그 죄의 가해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in Gottlosigkeit) 하나님에게 저항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잘못을 저주하는 정의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도 이렇게 거친 인간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 하지만 이 세상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네." 실제로 우리가 악을 경험할 때, 개인적으로 그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경험하거나, 사회적으로 가해자 집단과 피해자 집단 사이에서 경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구조, 정치적 체계, 즉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악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사회보장이 잘 돼있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자와 약자를 분리해 놓는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우리의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될 상황입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생명의 힘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체제 안에서 살고 일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패배자"인 가난한 자, 약한 자, 이 땅, 우리 자녀들에게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불의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늘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런 불의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까요? 여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요?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만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요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니느웨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니느웨'에 살고 있으며, 예언자의 음성도 듣고 있습니다.


2. 하나님-정의의 태양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로마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는 분이며, 공의를 보증해 주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의는 하나님이 친히 맺으신 언약에 대해, 또 그분이 직접 만드신 피조세계에 대해 그분이 보여 주시는 신실함입니다. 제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던 노예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언약의 땅,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되(시146:7, 103:6)이라고, 그들이 어디에 있건 그렇게 하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변호하시되(신10:18, 시82:3, 사1:17),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시니, 이는 이스라엘이 한 때 직접 이방민족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시편 31편 1절에 기대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정의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 구원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자비'(Erbarmen)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공의를 세우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정의야 말로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하나님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과온 땅을 위한 이스라엘의 희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의 메시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바른 판결을 내립니다."(사11:4) 그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1)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시96: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영을 부어주시면,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정의가 머물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가 될 것입니다."(사32:15-16) 그러므로 예언자 말라기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이라 부릅니다. (말4:2 - 독일어 성경은 말3:20)

이 정의 개념은 이집트나 로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온 것입니다. 두 강의 땅[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의미함]에서는 왕이 곧 재판관이요 태양신 샤마슈(Samas)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태양을 모범으로 삼아 신적인 정의를 집행합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만물이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다시 소생합니다. 그의 인간적인 정의도 이처럼 만물을 살게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정의롭습니다. 건강한 것은 정의롭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알맞게 사는 것도 정의롭습니다. 건강한 것도 정의롭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알맞게 사는 것도 정의롭습니다. 재벌은 형벌과는 무관하며, 일으켜 세우고 바로 잡고 치료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강자가 약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도 자기의 권리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왕은 땅을 인간의 착취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의 태양" 관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재판과 그분의 심판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의 구원으로 환영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신다는 산상수훈의 말씀(마5:45)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공의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정의로운 분으로 계시합니다. 인간이 악의 지배 아래서 고난을 당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분이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곧 그분이 당하는 일입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가지들 편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정의의 계시가 시작되고 그 정의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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