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구약학회, 제81차 춘계학술대회
평택대 유윤종 박사의 '시편의 최근 연구 동향' 기조강연 전문
I. 시작하는 말
최근 성서학 연구의 주된 방법론을 범주화할 때 가장 흔히 쓰이는 용어들은 ‘통시적’ (diachronic), '공시적' (synchronic)일 것이다. 전자는 역사비평으로 불리며 자료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을 포함하며, 후자는 신문학 비평으로 불리며 정경비평, 수사비평, 구조주의 비평, 독자반응 비평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분류를 시편에 적용시켰을 경우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각 방법론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방법론상으로 구분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1) 따라서 최근의 시편 연구는 크게 보아 개별 시편에 대한 연구인 미시적 연구 (micro-approach)에서 시편 전체가 어떠한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 채구성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거시적 연구 (macro-approach)로 나눈다.2) 미시적 연구는 1970년대까지 지배적이었으며 개별 시편 연구에 집중되었다. 미시적 연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전형적인 역사비평의 관심사로 저자, 연대, 표제의 역사성, 역사적 사건의 언급, 텍스트의 초기 상태 등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벨린저(Bellinger)는 “개인적/역사적 방법”으로 불렀다.3) 19세기를 풍미했던 이 흐름의 주요 학자는 빌헬름 드 베테 (Wilhelm de Wette, 1780-1849), 프란츠 델리츠쉬 (Franz Delitzsch, 1813-1890), 찰스 브리그 (Charles Briggs, 1844-1913)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전개될 양식비평, 시편의 주제별 연구, 최종 형성, 편집과정에 대한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둘째 단계는 헤르만 궁켈 (Herman Gunkel, 1862-1932)의 양식비평과 함께 시작한다. 양식비평의 주요 관심은 시편의 문학적인 양식 ( Gattungen) 또는 장르와 삶의 정황( Sitz im Leben)라 불리는 시편의 사회 역사적 배경에 있다. 궁켈은 시편의 장르를 ‘찬송시, 공동체 탄원시, 개인 탄원시, 감사시’ 등으로 분류했다. 또한 이들보다 빈도수는 작은 장르로 왕조 시편, 시온시편, 야웨의 왕위즉위 시편, 입례송, 지혜시편 등으로 분류했다.4) 그리고 각각의 장르마다 일관된 문학적 형태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같은 장르 내에서도 전개되는 형태와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어떤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장르를 구분하는 것 또한 용이하지 않다. 쿵켈은 기본적으로 시편은 포로후기에 쓰여진 것이라는 역사적 연구의 기본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이전 시대의 원형에 근거해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삶의 정황에 대해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픈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른 것이라고 본다. 기도에 동일한 형식이나 내용이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상황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불평과 탄원에서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신뢰와 찬양으로 바뀌는 것은 제사장의 구원신탁에 대한 시편기자의 반응이라고 본다. 또한궁켈의 제자인 모빙켈 (S. Mowinckel, 1884-1965)은 양식비평의 핵심 개념 가운데 시편의‘삶의 정황’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덴마크의 인류학자였던 그론벡 (V. Gronbeck)의 영향을 받아, 원시 사회의 구조와 행동, 특히 사회내의 제의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빙켈은 모든 개별 시편 뒤에 놓인 삶의 정황을 제의와 연결시켰다.5)
거시적 연구는 최종 형태로서의 시편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즉 개별 시편뿐만 아니라 시편과 시편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다. 거시적 연구는 미시적 연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시적 연구의 모든 결과를 이용한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최종 형태로의 시편을 대상으로 신학적 목적을 연구하는 거시적 방법론은 근본에 있어서 역사적 질문이다. 최종 형태로서의 시편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 채 형성되었는가? 최종 형태로서의 시편은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구성으로 신학적인 목적을 전하고자 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지만, 텍스트의 문학적인 분석과 그 뒤에 놓여진 역사적 질문을 한다는 의미에서 시편 연구는 한두 가지의 방법론으로 전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이 글에서 나는 시편 연구의 흐름을 크게 다섯 가지로 범주화시켜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1970년대까지 주류였던 역사적, 양식비평을 잇는 그룹이다. 둘째1985년 제럴드 윌슨의 연구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최종형태로서의 시편 뒤에 놓여진 편집의도를 찾는 그룹이다. 셋째, 전통적인 연구주제인 시편신학을 찾는 그룹과, 넷째 고대 근동 및 성서내의 자료와 비교하는 연구 또한 시편 연구의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다섯째, 위의 네 가지
흐름 외의 주제로 해체주의, 독자반응, 여성주의, 사회학적 및 해방신학적 접근 등을 들 수 있다.
시편 연구에 대한 흐름은 대부분의 시편 개론서에 소개되어 있으며, 연구사적으로 정리한 학자는 쿤츠 (J. K. Kuntz),6) 하워드 (D. M. Howard)7)가 있다. 하워드의 글이 1999년 작품이므로, 벌써 약 10년이 흘렀다. 2000년 이후 약 10년간 나온 연구도 너무 많아 정리할 수 없다. 기본적인 방향은 위에서 제기한 4가지 흐름이지만, 특징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 하나의 흐름이 주도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풍미했던 최종 형태로서의 시편에 대한 주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2005년 윌슨의 사망이후 막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II. 최근 시편 연구의 주요 흐름들
1. 역사비평/양식비평의 계승자들
궁켈과 모빙켈이 사용한 양식비평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학자는 베스터만 (C. Westermann), 게르스텐베르거 (Gerstenberger), 굴더 (Michael D. Goulder) 등이 있다.
베스터만은 그의 저서 「시편에서의 찬양과 탄식」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8)에서, 히브리어에는 ‘감사하다’는 동사가 없으며, ‘토다’라는 히브리어는 감사라기 보다는 찬양으로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시와 찬양시를 독립된 각각의 장르로 분류한 궁켈의 분류에 반대한다. 찬송시 (psalms of praise)는 찬양에 대한 묘사이고 감사시 (psalms of thanksgiving)는 찬양에 대한 선포 혹은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찬송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창조적 능력을 축하하며, 감사시는 국가나 개인의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구체적 행위에 대한 반응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시편은 궁극적으로 ‘찬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시편에 나타난 ‘찬양’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 결과 그는 시편의 장르를 “공동체 탄원시편,” “공동체의 이야기식 찬양시편,” “개인 탄원시편,” “개인의 이야기식 찬양시편,” “묘사적 찬양 혹은 찬송시편,” “창조시편,” “제의적 시편,” “왕조시편,” “왕위즉위 시편,” “지혜시편” 으로 분류한다.9)
게르스텐베르거 (Gerstenberger)10)는 시편을 제의 문학의 유형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그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의적 시의 본질과 기능을 살피면서, 개별시편을 양식 비평적으로 구조, 장르, 배경, 의도 등을 주석한다. 그는 베스트만 보다는 궁켈의 시편 분류를 따른다. 반면 그는 제의적 목적에서 시편의 분류가 모호할 경우 교환가능하다고 본다. 그의 주된 시편의 관심의 제의적 기능에 있다. 그는 제의를 정기적 제의 (절기) 및 비정기적 제의 (전쟁의 승리)로 구분하며,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회정치적 변화에 따라 제의가 수정되었다고 보며, 지혜시편도 제의적으로 연결시켰다. 나아가 그는 중앙 성전이나 유명한 지혜학파에서 시편이 나온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씨족과 같은 작은 사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즉 많은 시편의 경우, 포로이전에 쓰인 것이며, 기원이나 기능은 제의적이 아니며, 제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포로 후기에 이르러 제의적 중요성이 증대되었다고 주장한다.11) 그는 나아가 시편 93-100편 및 47편에 나타난 야웨의 우주적 통치 개념을 조사한 후, 3천년대 및 2천년대에 걸쳐 나타난 고대 근동의 우주적 통치의 개념과 비교한 후,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이념과 연결시킨다. 그 결과 그는 야웨의 왕권에 발견되는 우주적 통치의 개념을 제국주의적 전승 내에서 평가한다.12)
고울더 (Goulder)는 네 권의 그의 저서에서 현대적인 학문적인 경향을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역사비평이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려고 시도한다.13) 그는 시편은 그것이 쓰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14) 그리하여 그는 시편 42편에서 150편까지, 시편의 표제뿐만 아니라 시편의 나열 순서에 근거해 분류한 다음 연대문제를 찾으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다윗의 기도 (시편 51-72)를 다윗시대로 분류한다. 물론 다윗의 저작이 아니라, 다윗 시대, 다윗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는 궁정 시인에 의하여 쓰인 것으로 주장한다. 시편 51-72편은 쓰인 순서에 따라 배열된 것이며, 다윗의 삶 속에 나타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는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 (Song of Ascents, 120-134)를 느헤미야 시대로, 107-119편을 성전 재건 시대로, 135-150편을 에스라 시대로 본다. 물론 고울더는 표제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 놓인 기본적 개념을 수용한다.
2. 최종형태로서의 시편
2.1. 제럴드 윌슨과 최종형태로서의 시편
1981년 차일스의 지도하에 예일 대학교에 제출한 제럴드 윌슨 (Gerald H. Wilson)의 학위논문 “히브리 시편의 편집” (The Editing of the Hebrew Psalter)은 최근 시편 연구의 물꼬를 새롭게 연 출발점이다.15) 150편의 시편의 순서 뒤에 어떤 신학적인 목적이 있는가? 이에 대한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니메이어 (C. T. Niemeyer)의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난다: “그러한 순서를 발견하기 위한 이전의 모든 시도는 단지 일부의 외적인, 인위적인 근거를 내키지 않은 텍스트에 부과할 정도로만 성공적이었다.”16) 이에 대하여 윌슨은 “마소라 텍스트의 150편의 시편 내에는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이 과정으로 얻은 통일성은 단절된 항목을 편리하게 조합하다 보니 어쩌다가 우연히 형식적인 순서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편집적인 조직의 결과로 현재의 최종적인 형태를 띤 것이다”라고 주장한다.17) 그는 편집활동이 명백한 수집물 사이의 이음새를 면밀히 관찰하여, 최종 편집자들이 150편의 시편을 나열시키는 데 사용한 편집 기술을 설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순서를 나열하고 최종 형태를 결정한 편집자 자신의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메시지는 부분적으로 이전의 시편 수집물을 대체 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18)
윌슨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먼저 고대 근동의 찬송가의 수집과 편집에 나타난 목적을 찾아낸다. 그는 고대 근동의 두 작품을 끌어들인다. 아카드의 사르곤 대제(2334-2279 BCE)의 딸이자 여사제인 엔헤두안나 (Enheduanna)가 편집한 수메르 성전 찬송가 (Sumerian Temple Hymns)와 기원전 2112에서 539 사이에 나온 “찬송가 첫줄 목록” (Catalogues of Hymnic Incipits)이다. 42편의 찬송으로 구성된 수메르 성전 찬송가중 41편의 찬송가는 각 지역의 성전에서 온 것으로 찬송가가 나열된 순서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의 성전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42편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유일하게 니사바 신에 대한 영광송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영광송은 아부 살라비크에서 발견된 성전 찬송가에서 잘 알려져 있다. 68편의 찬송 모두에 성전과 그들의 신에 대한 영광송이 나온다. 그러므로 윌슨은 수메르 성전 찬송가의 42번째 시편이 단지 성전 찬송가가 아니라, 전체 수집물을 완성하고 결론짓는 역할을 하는 영광송이라고 주장한다.19) 또한 윌슨은 42번째 시편에 포함된 콜로폰(colophon, 책의 마지막에 저자/편집자가 덧붙인 글)은 이미 정형화된 형태로, 이후에 나오는 다른 책의 편집에도 동일한 형태로 반복된다. 따라서 윌슨은 수메르 성전 찬송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 형태를 유지해온 것이며, 수집될 당시에 사르곤 왕과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언급을 삭제한 채, 다른 역사적 배경에 반복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되었다고 주장한다.20) 수메르 성전 시편에 근거하여, 윌슨은 고대에서도 무작위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편집한 찬송가가 있었다고 결론 내린다.
또한 성전 찬송가 9는 신격화된 왕 슐기 (2094-2047 BCE)에게 바쳐진 것으로, 첫수집이 시작된 지 200년 뒤에 엔헤두안나 찬송가에 첨가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다음 윌슨은 42번째 성전 찬송가에서 영광송이 사용된 것을 마소라 사본의 시편 150편이 150시편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책을 마무리하는 편집기술로 비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형화된 콜로폰”을 시편의 표제와 관련지었다. 즉 수메르 성전 시편은 이후에 원래의 제의적 배경을 왜곡시킬만한 편집과 개작을 거쳤지만, 정형화된 콜로폰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제의적 배경과 기능을 지녔지만 현재 마소라 사본의 시편에 그대로 유지된 시편의 표제와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윌슨 수메르 성전시편은 4가지 점에서 현재 마소라 사본의 150편 시편의 구성에 대한한 전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기원전 3천년대에 수집된 찬송가를 조직하는 일련의 원칙이 존재했다. 둘째, 이후에 이 찬송가는 원래 수집될 당시와는 다른 목적을 위하여 재사용되었다. 셋째, 책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마지막 찬송가에 영광송을 사용했다. 넷째, 이후에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 첨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콜로폰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윌슨은 “찬송가 첫줄의 목록”에서 수집자가 찬송을 배열하는 구체적인 원칙을 찾아내어 1) 장르, 2) 찬송의 대상이 된 신, 3)유사한 어구 등에 따라 배열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가사첫줄로 보아 22편 중 16편은 장르가 같으며, 찬송의 대상이 된 신이 같은 경우는 22편 중 7편이며, 마소라 텍스트의 엘로힘 시편과 유사한 경우라고 본다. 또한 각 가사 중 유사한 어구끼리 연결되도록 배열된 경우도 있다.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사한 단어나 어구에 의하여 병치시킨 많은 예들이 있다.”21) 유사한 단어나 어구를 목록의 전후에 병치시킨 원칙은 이미 델리취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으며, 궁켈은 그러한 델리취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한 분류화는 충분히 규칙적이어서 단순한 우연으로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러한 노력에 완전한 일관성을 부여할만한 명백한 증거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22)
윌슨은 수메르 성전 찬송가와 찬송가 첫줄 목록이 쿰란 사본과 마소라 사본에 나타난 시편의 배열 뒤에 가려진 조직적 편집기술을 밝혀낼 선례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사해사본 11Q Psa와 마소라 사본 시편 150편을 비교해보면 마소라 사본 시편 150편 뒤에 숨어있는 편집과정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해사본과 마소라 사본의 시편은 순서가 다르다. 또한 마소라 사본 150편에 포함되지 않은 시편이 사해사본에 포함되어 있다. 윌슨은 이러한 차이점에 근거해, 정경의 문제를 제기한다. 샌더스는 마소라 시편은 그 자신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공동체는 계속 지지 되었으며, 사해사본은 그 지지자의 지지를 받는 사본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스케한은 쿰란 시편은 분리된 별도의 정경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마소라 사본 시편 150편의 정경에 이차적으로 근거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윌슨은 마소라 시편 150편 및 사해사본 시편 사이의 차이를 그의 시편 편집 이론에 이용하고자 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정경적이며 외경적 제의적이거나 도서관 판이 아니라, 마소라 이전, 시편의 또 다른 편집과정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윌슨은 시편 1-89편 은 이른 시기에 고정되었지만 11Q Ps에 의하면, 90-150은 여전히 유동적인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 사본은 예루살렘에서 복사되었으며, 그 원본이 후에 마소라를 형성하는 시편, 즉 정경이 되었다고 본다. 마소라 사본 150편과 11Q Ps 와 비교한 후 윌슨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 시편 4-5권의 순서에서 마소라와 쿰란은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자유로운 편집활동이 있었으며, 시편이 점차적으로 안정화되어 갔음을 증명한다. 둘째, 쿰란사본에서는 “호두”와 “할렐루야”가 한 세트로 되어 있다. 이것은 편집의 기술로 한 그룹의 시편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두 시편 가운데 두 번째 시편에 표제가 안 나온다. 이것은 쿰란에서는 두 시편이 하나의 시편으로 다루었지만, 마소라 사본에서는 두 시편으로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넷째, 다윗 저작의 시편이 마소라 시편 보다 많이 나온다. 이것은 쿰란 시편은 다윗에게 더 큰 권위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쉬르 하마알로트”를 분산시켜 놓았다. 이것은 편집자가 시편의 순서를 자유로이 나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근동 및 쿰란 사본에 나타난 편집활동의 증거에 근거하여, 윌슨은 마소라 시편 150편을 대상으로, 각각의 시편을 하나의 책으로 묶는데 드러난 편집활동의 증거를 찾고, 편집활동 뒤에 놓인 신학적 목적을 찾고자 했다. 먼저 그는 마소라 시편 150편의 편집 활동의 증거를 “명확한"(explicit)과 “암묵적” (tacit)로 구분했다. 그는 “명확한” 편집활동의 증거를 고대 근동의 콜로폰과 쿰란 텍스트의 “다윗 저작”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는 마소라 시편 150편에서는 명백한 종류의 편집활동의 의도를 서술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데 놀랐다.23) 그는 시편 72:20에 기록된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났다”는 서술이 유일한 명백한 편집활동의 증거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편집자가 목적하고자 하는 마소라 사본 150편 뒤에 놓인 암묵적인 편집 기술을 찾고자 한다.
윌슨은 면밀한 분석을 통하여 현재의 시편 순서는 우연히 놓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편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수메르 성전 찬송가의 경우 그 순서는 성전의 위치에 의하여 따라 순서가 나열되어 있었다. 마소라 사본 150편의 경우 암묵적인 편집 기술은 1-4권의 시편 마지막에 영광송 (doxology)이 놓였다는 점이다 (41, 72, 89, 106). 영광송을 각권의 마지막에 나열함으로 각 권이 끝났음을 알리고자 한 편집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왕조시편 (특히 2, 72, 89)은 의도적으로 첫 3권의 책 (2-89편)의 이음매 위치에 의도적으로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시편 89편은 다윗 왕조의 왕들과 왕국을 보존함으로써 그의 언약의 약속에 따라 사는데 실패한 야웨를 맹렬히 고발한다. 첫 세권의 책은 다윗왕조를 거절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책망하고, 야웨가 그의 약속을 신실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89:46-51). 그 의도는 다윗 왕조의 패망에 대한 포로기의 답변으로 시편의 구획이 그어져 있다고 이해했다. 즉 다윗 왕국과 유다의 운명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얻기 위한 의도였다고 본다. 마지막 두 권 (90-150편)의 책은 시편의 마지막 편집의 부분으로 후에 첨가되었으며, 지혜자의 관심을 반영하며, 이전의 3권에서 제기된 질문과 희망에 대한 답변이라고 본다. 그 의도는 독자들의 희망을 이 땅의 다윗왕조에서 야웨의 왕권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4-5권에는 야웨 홀로 왕으로 나타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24) 또한 윌슨은 지혜시편인 1, 73, 90, 107이 1, 3, 4, 5권의 서두에 145편이 5권의 마지막에 놓였음에 주목한다. 즉 시편 1편을 서론에 위치시킴으로써 전체 시편을 토라로 읽도록 인도하며, 시편 90편과 107편은 마지막 두 책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윌슨에게 있어서 시편 145편은 시편의 본론에 대한 결론이며, 마지막의 할렐 시편 (146-150)은 삶의 목표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라는 의도를 명확하게 한다.25)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이후에 제기되는 문제에 답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확대해 나갔다.26) 그러나 그는 2005년 만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2. 윌슨 이후
윌슨의 주장은 대체로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 주장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편의 구분에 대한 의문제기이다. 윌슨은 시편을 1-3권의 책과 4-5권의 책으로 구분한다. 그 기준은 포로 혹은 포로 이후의 독자들이 1-3권은 실패한 다윗왕조에 대해 야웨께 고발한 내용이고, 4-5장은 야웨만이 왕으로 오시며 희망의 근거가 됨을 역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그만은 시편은 1-2권과 3-5권 사이를 구분한다. 즉 시편 73편을 기점으로 시편의 방향이 ‘복종’(obedience)에서 ‘찬양’ (praise)으로 전환하며, 시편 1편과 150편은 신앙에 대한 경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27) 시편 1편은 의도적으로 전체 시편의 서론으로 복종을 요구하며, 150편은 전체 시편의 결론으로 의도적으로 마지막에 놓였다고 보았다.28) 즉 윌슨과는 달리, 부르그만은 1-2권과 3-5권 사이에 전환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편 73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편 73편은 복종에서 찬양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어려운 순례에 있어서 뚜렷한 위치에 놓여있으며....나는 그것이 정경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중심이라고 제안한다.”29) 미하이라 (Mihaila) 역시 시편 73편은 개인 탄원시 (1-2권)와 공동체 탄원시 (3권)을 나누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시편기자가 의도적으로 현재의 자리에 배열했다고 주장한다.30) 이에 대해 윌슨은 시편 73편이 두 개의 신학적인 단계 사이에 위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르그만의 주장은 시편의 최종형태의 이해에 있어서 모호하게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정체성과 신앙의 위기가 명확하게 언급되는 곳은 3권의 마지막인 89편에 와서야 발견할 수 있다.”31)
둘째, 서론으로서 시편 1편의 기능이다. 차일스 이후 많은 학자들은 시편 1편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 기능에 대해 연구해왔다.32) 윌슨은 시편 1편을 시편 전체에 대한 서론으로 보며, 시편 2편은 1권에 대한 서론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하워드는 시편 1-2편을 하나의 시편으로 보고, 시편 3편을 1권의 시작으로 본다. 그 결과 그는 야웨와 그의 기름부은 받은 자의 통치라는 시편 2편의 주제는 전체 시편의 핵심적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윌슨의 1-89편의 실패한 다윗왕조가 90-150편의 왕으로서의 야웨의 주제에 종속 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또한 시편 144편은 왕조, 다윗시편이고 145편은 야웨의 왕권을 선포하는 시편이다. 즉 시작뿐만 아니라 결론에서도 시편 2편의 주제는 반복되어, 시편의 독자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33) 로젤 (Christoph Rosel)은 시편 2편을 시편 2-89편의 책의 편집적 특징으로 파악한다. 즉 시편 1편과 4-5권으로 시편을 완성하기 전에 시편 2-89편은 이미 메시아적 편집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34) 또한 일부의 학자들은 시편 1편과 2편, 즉 개인적인 덕을 강조하는 토라시편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통치를 강조하는 왕조시편이 언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삶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합하려는 시편기자의 성향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35) 과연 시편 1-2편을 두고 시편기자의 편집의도를 읽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멀피 (Ronald Murph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이중적인 관점은 시편 1편이 전체 시편에 주는 관점을 인식하는 힘을 약화시키며, 궁극적으로 시편기자 자체의 진의파악에 제한이 된다.”36)
셋째, 윌슨은 마소라 시편 1-150편의 편집의도를 다윗왕조에 대한 실패 및 왕으로서의 야웨에 대한 기대로 파악한다. 윌슨의 주장 이후 전개된 시편 편집의 의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어 왔다. 밀라드 (Matthias Millard)는 양식비평의 방법론으로 개별시편의 문학적 및 편집사를 추적하면서 시편을 그룹화한다. 그 결과 시편의 핵심적인 방향은 탄원시에서 찬양 및 감사시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수많은 시편을 분류하고 그룹화 했지만, 그 그림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그는 시편의 주요 주제는 지혜 시편, 즉 토라로 순례의 길을 가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는 다윗의 역할을 시편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인물로 파악한다. 포로 후기 시편 공동체에게 있어서 다윗은 제 2 성전 시대의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상처받는 찢긴 자로 탄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밀라드는 시편의 분류 및 표제에 근거하여 시편은 가정에서 드리는 개인의 기도에서 온 것을 수집한 결과 최종적인 형태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고 본다.37) 메이스 (Mays)와 맥칸 (McCann)은 전체 시편의 구성에서 토라 시편의 위치를 강조했으며,38) 쉐파드 (Sheppard) 및 쿤츠는 지혜 시편을 시편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파악했다.39) 윌슨의 주장에 대해 가장 강력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미첼이다. 시편의 편집자가 시편 89편을 기점으로 다윗왕조를 포기하고, 야웨만 신뢰할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윌슨의 주장에 대해 미첼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시편의 편집자가 다윗왕조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왜 시편 4,5권의 표제에 다윗의 이름이 16회나 등장하는가? 만일 전체의 메시지가 야웨를 신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왜 시편 1-3권은 야웨가 그의 약속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지적을 하면서 마치는가? (시 89:35-39)40) 대신에 미첼은 시편의 주요 주제는 종말론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시편 연구사에서 미첼은 1820-1970년까지를 제외한다면 가장 지배적인 시편의 해석방법은 종말론적이라고 지적한다. 미첼은 아삽의 시편과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은 종말론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첼은 시편의 종말론적 운동을 예언자적 종말론의 상황에 설정한다.41) 이 그림은 크게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방국가들의 연합, 야웨에 의한 구원, 이스라엘과 살아남은 이방인들의 야웨 경배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그는 시편이 다음과 같은 종말론적 프로그램에 의하여 짜여져 있다고 본다: 왕이 오심 (시편 45편), 이스라엘이 모임 (50편), 이방국가들이 전쟁을위해 모임 (73-83), 왕의 단절 (89편), 메시야 왕에 의한 구원 (110편), 메시야에 의한 승리의 찬가 (111, 118편), 장막절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이스라엘이 성전으로 올라감(120-134).42) 길링함 (Gillingham)은 “종말론적” 혹은 “지혜적”이냐는 분류를 거부하고, 시편기자의 중심 의도를 ‘시온’전승에서 찾는다. 그녀는 시편의 편집자들은 성전과 관련된 레위인들로 규정한다. 그의 주장을 증명하고자 그녀는 시편에 나타난 ‘시온’의 기능에 초점을맞춘다. 그결과 그녀는 ‘시온’이 시편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시편 120-134; 15-24). 나아가 그녀는 원래는 다른 성소에서 기원된 시편도 편집자에 의하여 시온 시편으로 전환시켜 현재의 위치에 두었다고 주장한다.43)
젠거 (Erich Zenger)는 시편 5권이 가운데의 두 수집물 (113-118: 유월절 할렐, 120-34, 135-36: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위대한 할렐)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찬송가라는 점에서 매우 강한 제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두 수집물은 이제 편집적으로 5권의 상황에 통합되어 결과적으로 제의 이후의 정황 (a post-cultic Sitz im Leben/Sitz in der Literatur)을 가진다. 한편에서 5권은 시온과 성전에 신학적으로 연관된 주제와 개념들로 퍼져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대기와 비교해보면 놀랄 정도로, 구체적인 성전제의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5권은 제의 이후이며 우주적 왕이신 야웨와 시온에서 토라를 가르치는 시내산의 하나님의 자리이신 시온으로 “영적인 순례” 과정에서 불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시편 119편을 의도적으로 5권의 가운데 둔 것, 시작부분인 시편 1, 1-2편으로 보아, 시편은 살아있는 토라로서의 야웨에 문을 여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또한 종결부인 할렐 (146-50)과 관련지어 볼 때 전 우주에 스며든 삶의 방법으로서의 토라인 시편을 낭송하고 부르라는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4) 또한 젠거는 양식비평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편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를 덧붙일 것을 제시한다. 첫째, 개별 시편에 대한 예술적 미, 즉 은유와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주제어나 은유를 통하여 서로 연결된 시편 (111편과 112), 제의적 시로 그룹화된 시편들 (90-92), 드라마 시편들 (52-68), 수집 단위에서 결론의 역할을 하는 시편 (예, 93-99편의 결론으로서의 100편), 전체 시편의 구조를 통하여 전체로서의 시편에 작용하고 있는 신학적인 의도를 찾는것이다.45)
그랜트 (Jamie A. Grant)는 정경비평 및 본문 상호비평을 통하여 토라 시편과 왕조시편이 병치된 이유를 찾고 시편의 형성에 대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는 세편의 시편 단위 (시편 1-2, 18-21, 118-119)에 초점을 맞추어, 토라 시편과 왕조시편이 같이 나오는 것은 시편의 최종 편집자의 의도적인 형성이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신명기 17:14-20에 나타난 왕에 대한 율법은 포로후기 시대 시편이 최종화될 당시에 재사용되어 시편이 현재적 모습으로 구성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46)
3. 시편신학
시편신학이라는 주제는 광범위하기 때문에 종합화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또한 본질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노력의 결과이므로, 오경이나 예언서처럼 계시적 성격이 아니다. 따라서 신학적 성격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계시적 성격의 책과 신학이 다르지 않다. 즉, 본질에 있어서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탄원의 내용이기에 신학과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일관되게 시편의 신학사상을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위에서 소개한 거시적 연구 또한 시편의 순서 뒤에 놓인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시편 신학은 매우 다양한 접근방법을 통하여 찾아야 함을 말해준다.
크라우스의 시편신학은 시편 신학에 대한 전통적인 방법론을 보여준다.47) 크라우스는 시편 신학이란 시편을 부르고 기도했던 사람들의 ‘케리그마적인 의도’라고 본다. 따라서 크라우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주요 주제를 추적한다. 하나님에 대한 주요한 주제는 이름, 형용어, 계시, 왕위즉위 등이며, 이스라엘 대한 주요 주제는 기원, 역사, 제의 등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소, 제의에서의 왕의 역할, 이스라엘 공동체와 개인적 삶을 위협하는 적의 힘, 하나님의 현존 앞에선 개인, 신약성서의 시편 사용 등이다. 그의 신학은 두 권의 시편 주석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48)
부르그만 (Brueggemann)은 그의 책, 「시편의 메시지」에서 폴 리코르 (Paul Ricoeur)의 심리학적 분류를 빌려와 시편을 인간 경험의 현실의 형태와 관련시켜 세 단계로 분류했다. 첫 번째 단계는 모든 것이 안정되고 질서 정연한 상태로 적응단계(orientation)이다. 창조시편, 토라시편, 지혜시편, 응보시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편들에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질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고통이 가해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탄식하게 된다. 유대인의 경우 고통당하는 경험이고, 기독교인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인 방향상실 (disorientation)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나온 시편이 개인 탄원시와 공동체 탄원시이다. 이 단계에서 깜짝 놀랄만한 영적인 변화, 즉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희망을 가지게 된다. 즉 세 번째 단계인 재적응 단계(reorientation)이다. 찬양과 감사의 시편이 여기에 속한다.49)
맥칸 역시 시편 신학에 합류한다.50) 그는 시편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토라’로 설정한다. 이 경우의 ‘토라’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교훈’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서의 ‘토라’ (시편 1, 19, 119)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편의 ‘하나님의 통치’ 즉 왕조시편(시편 2, 95, 96)은 토라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시편 2편이 1편과 나란히 놓여 ‘바라크’로 수미상관을 이룬다고 보았다. 본질에 있어서 시편을 기도로 본 맥캔은 기도를 탄식/불평 시편, 용서에 대한 시편 (예 51편), 복수에 대한 시편 (예 137)으로 분류해 시편의 이해를 돕는다.
메이스는 시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개념을 “야웨께서 통치하신다”에 둔다. 그는 토라 역시 “야웨께서 통치하신다”의 주제와 연결시킨다. 이때의 토라는 모세오경이 아니라, ‘가르침, 교훈’을 의미하는 일반명사로 본다. 즉 시편은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야웨께서 통치하신다”는 교훈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야웨께서 통치하신다”는 주제와 쉽게 연결된다. 부르그만이 주장하는 적응-상실-재적응의 개념 또한 메이스의 이론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경험의 흥망성쇠에 적용될 수 있다. 그는 또한 하위 개념에 속하는 창조시편, 시온시편, 왕조시편 역시 “야웨께서 통치하신다”는 신학적 개념에 속한다고 주장한다.51)
메이스의 제자인 크리치 (Creach)는 시편의 주제를 ‘피난하다’ 라는 단어로서 전체 시편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시편 2:12에 처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대부분의 시편에 발견되며, 시편의 단락단락 마다 배치되어 전체 시편의 구조를 풀어내는 암호역할을 한다고 본다.52) 이 방법은 하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시편 전체의 주도적 의미를 파악하고 신학적 의도와 구성적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생산적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시편이 하나의 주제로 다 다룰 만큼 단순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점일 것이다.
4. 고대 근동과 시편
19세기에 시작된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성서의 수많은 텍스트는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집트, 가나안, 메소포타미아 등의 고대 근동 지역과 활발한 교류 가운데 영향을 주고받으며 탄생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도 예외가 아니다. 시편은 고대 근동 지역의 음악 및 시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면서 탄생한 것이다.53)
이집트와 시편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시편 104편이다. 엘 아마르나 시대의 아메노피스 IV 당시의 Aten 찬가54)와 시편과의 관계를 밝히는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55) 크루제만은 시편 104편이 이집트의 찬송시를 명백하게 의존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자료이론을 내놓기도 했다.56) 이집트 찬송이 시편 104편에 활용된 것에 대해, 다훋(Dahood)과 크레이기 (Craigie)는 페니키아, 우가릿 등 가나안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57) 이집트 태양신 찬송시와 시편 104편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문학적 의존관계를 지닌다. 그러나 시편 104편이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차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같은 문화적 배경 혹은 유일신 사상이라는 동일한 신학적 배경에서 유사성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크니게 (Carstein Knigge)는 아케나톤의 태양신 찬가와 시편 104편 사이에 존재하는 약 600-8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을 메우기 위해 신왕조 시대 이후의 이집트 찬양문학을 연구해 그 전통이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며, 이집트 찬양문학의 많은 주제들이 시편과 다른 구약성서 텍스트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58) 코흐 (Koch)는 태양신 레의 아들이라는 바로의 호칭을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왕을 야웨의 아들과 연결시키며, 신약시대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에까지 확대시킨다. 바로가 태양신 레의 육적인 아들이라는 지위를 둘러싼 고대 이집트의 개념을 살핀다.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레는 성관계를 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며, 그 지위는 즉위식을 통하여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코흐는 시편 2편과 110편은 이집트 자료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편 2편과 110편 (또한 72편과 89편)은 포로이전의 작품이며, 포로기 및 포로후기에 왕가에 의해여 보존되다가 이스라엘이 이방지도자에 계속 지배당하는 것에 항거하여 현재 시편의 자리에 통합되었다고 결론내린다.59)
메소포타미아의 기도는 기원전 약 2500년에서 신 바벨론 시대의 말기인 539년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되어 있다. 수메르의 작품을 원형으로, 후대의 앗시리아 및 바벨론은 그 작품을 번역하고, 개작하면서 발전시켰다. 장르는 신에 대한 찬송시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드리는 탄식의 기도가 주를 이룬다. 롱맨은 최근에 시편과 고대 근동의 기도 장르를 비교한 후 유사성과 차이점을 설명했다.60) 그는 다섯가지의 유사성을 설명했다. 첫째, 수메르의 성전 찬송시는 시편의 시온 찬송시와 평행을 이룬다 (예 시편 48편). 둘째, 고대 근동에서 왕에 관한 찬송은 이스라엘의 왕을 드높이고 기도하는 시편에 반영되어 있다 (시편 2, 20, 21편). 셋째, 할로는 사 39:9-20을 수메르 배경에서 찾았으며, 믹탐 (miktam)으로 불리는 이 장르는 시편 16편, 56-60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넷째, 히타이트의 무실리 (Murshili) 재앙 기도는 삼하 24:17과 유사하며, 시편 30편과 필적할 만 하다.61) 또한 차이점을 세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이스라엘의 찬송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내용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고대 근동의 경우 주로 신의 속성이나 형용어로 그들의 신을 찬송한다. 둘째, 메소포타미아의 탄원시는 찬양으로 시작하며, 이스라엘의 탄원시는 찬양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고발하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시편 77편).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며 덜 존경하는 것일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계약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탄원시에서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은 신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 아첨하는 것일 수 있다. 셋째, 메소포타미아 기도의 하위 장르는 주문의식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기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62) 페리스 (Paul W. Ferris Jr.)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공동체 탄원시인 발락 (balag)과 에르셈마스 (er?emmas)를 시편 내의 19개의 시편과 애가 등과 비교한다. 그 결과 그는 각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항상 동일한 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며, 하나의 삶의 자리에 매이지 않음을 주장한다. 페리스는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공통된 문화적 뿌리에서 출발했음을 지적한다.63) 아르넷(Arneth)은 앗수르바니팔의 즉위 찬양시를 자세하게 분석한 후, 이 찬양시가 중기 앗시리아의 즉위의식의 개작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태양신 샤마쉬가 아수르 바니팔의 수호자로 나타남을 드러내 보인다. 그다음 시편 72편으로 방향을 돌려, 원자료층과 편집층을 구분한 다음, 편집층은 왕의 이방정책 책무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다음 아수르바니팔의 즉위 찬양과 72편의 원 자료층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아르넷은 시편 72편은 아수르바니팔의 자리에는 요시아가 대신하고, 샤마쉬의 자리에는 야웨를 대신한 개작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72편의 편집층을 고레스 실린더와 비교한다. 즉 편집은 포로 후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이 시편은 이사야 60장과 슥 9:9-10에 의하여 이용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64) 힐버 (Hilber)는 시편 110편을 앗시리아의 제의에 사용된 예언양식에 비추어 해석하면서, 시편 110편의 본질, 양식, 정황, 연대의 문제를 다루었다.65) 오토는 시편 2편과 18편 (89편 72편 포함)을 신앗시리아 정황에 비추어 해석해, 신앗시리아의 주제들이 예루살렘 자신의 왕조신학을 더욱 정교화하는데 이용되었다고 보았다.66)
우가릿 시와 시편 사이의 관계는 매우 큰 관심을 끌어왔다. 미첼 다훋은 그의 시편 주석을 통하여, 우가릿 시문학에 근거해 수많은 시편의 텍스트를 개정할 만큼 의욕적으로 시편에 대한 우가릿의 영향을 극대화시켰다.67) 그러나 그의 지나친 우가릿 만능주의는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다훋 이후 가장 큰 공헌을 한 학자는 아비슈르 (Yitzhak Avishur)이다.68) 그는 성서와 성서 외의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짝 단어를 비교 분석해, 각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짝 단어의 유사성을 제시했다. 이것은 당시에 시어를 다루는 사전이 존재했느냐 아니냐는 논란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올브라이트와 다훋의 방법론을 폐기하고, 카수토 (Cassuto)와 로웬스탐 (Loewenstamm)의 방법론에 따라 문체와 문학적 특징을 비교한 후 성서내에 존재하는 29, 16, 19, 82, 93, 110편을 가나안 기원으로 돌렸다. 프린슬루 (Prinsloo)는 시편 20편과 아람어 텍스트인 Papyrus Amherst 63을 비교한 후, 시편 20편은 고대의 가나안 시편을 야웨 신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69)
5. 기타
시편의 해방적이며 사회구원적인 성격을 강조시켜 다룬 학자는 플레인즈 (David Pleins), 라이드 (Stephen Breck Reid) 등이다. 플레인즈는 사회정치적인 주제인 정의, 자비, 희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시편의 양식비평적 시도를 한다. 그리고 그 시편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내세우면서 현대적 상황에 적응시켜려 노력한다.70) 라이드는 시편을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가난한자와 이방인이 주변인이 되는 현상을 다룬다. 그는 소외된 자들에게 시편이 얼마나 매력있는 책인지를 제 3세계의 관점에서 빌어와 이해하고, 현대사회에 주는 의미를 제공해준다.71) 또한 터커 (Tucker)는 시편 2-89편에 나타난 가난한 자들의 언어를 분석한 후 시편은 민주화된 왕권의 발전에 핵심적 개념이며 그 사상은 이사야 55장과 연결 된다고 주장한다. 즉 시편 89편은 민주화된 왕권을 통한 이스라엘 사회의 갱신을 요구한다고 보았다.72) 부르그만 또한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시편을 읽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믿음의 삶에 기초하며, 찬양은 반드시 ‘여기 그리고 지금,’ 즉 현실적 삶에 견고히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찬양으로 인하여, 실제적 찬양의 삶으로 형성되며, 현재의 찬양이 없다면 실제적으로 우울하고 공허한 삶이 형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73) 아다모 (D. T. Adamo)는 아프리카에서 시편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를 소개해 준다. 아프리카의 나이제리아 사람들은 성경을 일상적인 문제 해결의 도구로 이용한다고 말하며, 성경이 살아있는 신앙의 문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경우, 그 지역의 문화를 알아야 함을 요구한다. 나이제리아에서 성서는 쓰인 책이 아니라, 기억된 텍스트로 악귀를 막을때, 특히 마녀를 물리칠 때 사용된다고 소개한다. 많은 시편들은 마사지, 수치료법(hydrotherapy), 금식, 약초의 사용 등으로 치료할 때도 시편이 낭송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의 모든 상황에 시편이 암송되고 있다고 소개한다.74)
시편의 기독론적 이해는 가장 긴 해석의 역사를 담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이 주제 또한 시편의 연구에서 꾸준하게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왈키 (Bruce K. Waltke)는 시편을 정경의 형성과정 (개별시편, 수집물, 시편전체, 구약성서, 기독교 경전)을 따라 다양한 단계에 맞추어 그 과정에 숨은 정경 공동체의 신학적 의도를 찾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5) 윌리엄 할러데이는 시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소개와 아울러, 현재까지 어떻게 읽혀져 왔는지에 대해 소개하면서, 기독교 내에서 궁극적으로 시편은 기독론적으로 읽혀왔으므로, 시편은 기독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76) 또한 개별시편들에 연구이지만, 수사비평적,77) 독자반응적,78) 여성주의적,79) 해체주의적,80) 생태학적81) 방법론을 시편에 적용한 글들도 시편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참여하고 있다.
III. 맺는 말
현재 마소라 사본의 150편의 시편은, 개별시편이 모여 그룹을 이루고, 그룹이 모여 현재 150편의 행태로 전승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개별 시편을 다양한 관점에서 장르를 분류하고, 개별시편의 사회적 제의적 정황을 찾는 역사적, 양식 비평적 방법은 시편 연구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양식 비평적 방법은 시편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개별 시편에 대한 문학적 분석과 고대 근동적 배경의 연구 또한 개별 시편의 장르와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150편의 시편의 순서 뒤에 놓인 신학적 의도를 찾는 작업도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즉 왕조시편이냐, 지혜시편이냐, 메시야 시편이냐 등으로 구분한 후 주도적 흐름을 찾으려는 시도 보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나오는 합창의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과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를 지배하는 시편 신학 역시 미시적 작업 뒤에 얻어지는 산물이어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두 가지 신학적 개념 (예를 들어 지혜, 메시야 등)으로 시편 전체를 다 아우르기에는 너무나 다양하여 하나의 보자기에 다 담을 수 없다. 따라서 나름대로의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시편 신학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그 다양성 속에 몇몇 주된 가지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고대 근동과 시편과의 관계를 다루는 연구 분야의 경우 현재 주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첼 다훋 이후, 조심스러워졌지만 고대 근동의 배경없이 시편 자체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주제에 걸쳐 시편은 고대 근동의 영향 하에서 역동적인 반응을 하면서 쓰여졌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체계적으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둘 사이의 비교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상의 독창성을 찾으려는 시도 역시 매우 신중히 다루어야 함을 최근의 많은 연구는 지적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시편 연구의 방향은 점차 더 확대되어 주된 흐름이 없어 보인다. 이는 구약성서 내의 일반적인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구약성서 학계의 주류는 무엇인가? 통시적, 공시적 논쟁도 시들해 보인다. 수정주의자와의 논쟁도 나아갈 탄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 주제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연구의 분야를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지고 있다. 이점은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역적, 종교적,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시편을 읽고 해석하며, 시편 연구에 동참하고 있다. 미시적 및 거시적 연구외에도, 70인역과 비교하는 본문비평, 아프리카의 상황, 영성신학, 환경 등 현대적 요구에 답하려는 연구방향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지평을 넓힐 때와 넓힌 것을 다시 분류하고 정리해야 할 때로 구분한다면, 현재의 상황은 각자의 주어진 상황에서 지평을 넓히고 있는 때로 보인다. 또 다른 10년이 지나2020년쯤 된다면 다시 지난 20년을 되돌아보고 분류할 주제들이 분류되고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