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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종교 다원 사회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의 변혁

필립 크레이튼 교수(美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원장)

[편집자 주] 본 글은 지난 2011년 10월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연구실장 김진호 목사)가 주최한 해외석학 초청 강연회에서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교수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신학의 변혁"을 주제로 강연한 원고 전문이다. 필립 크레이튼 교수는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학장이자 철학과 종교 교수이며 과학과 신학, 과학과 종교, 철학적 신학, 종교다원주의, 구성신학 등에 관한 세계적 석학으로 손꼽히는 학자이다. 연구소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한다. 아래는 강연문 전문.

종교 다원 사회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의 변혁

Transforming of Christian Theology in a Religiously Pluralistic Social Situation

필립 클레이튼 (Philip Clayton,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학장) 번역: 박혜경 (이화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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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제공=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교수(美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원장)

오늘 여기서 강의하고 한국 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고 독일 위대한 학자들의 마지막 세대에게서 배웠 습니다. 머리카락이 희끗 희끗한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를 다니며 신학자들 과 기독교 사상가들을 만나면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난의 세 월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교회로부터 많이 배워야만 하는 이유일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교회는 종교 다원주의의 사회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단일한 종교 현상속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때는 지났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글로벌(global)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들과 파트너쉽이 요구 됩니다. 그러나 종교간의 파트너쉽을 형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교인들은 기 독교인들과 일하는 것에 친숙해있습니다. 사회 선교나 환경 문제, 특히 글로벌 구제와 같은 일들의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인과 힌두교인 그리고 불교인과 함께 일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것이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문제를 함께 풀어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나는 신학과 기독교 실천 안에서 변혁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변혁들은 이 새로운 도전 을 대면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글로벌 교회)는 국가, 문화, 인종,계급으로 만 구분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두 그 룹은 "진보(progressive)"와 "보수(conservative)"로 구분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르게 구분될 것이다. 신학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이런 양분화가 지닌 문제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상황과 비슷한지 다른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미국 상황만을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보수주의자는 불의를 언급하기위한 신학적 틀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백인 그룹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생한 부정의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공립학교에서 기 도를 할 수 없거나, 미국의 이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비용을 백인들이 대신 지불한다고 생각할 때 부정의가 발생했다고 봅니다. 그 백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종과 문화적인 선입견으로 인한 희생자들를 대신해서 정의를 요구하지 않고, 글로벌 교역의 영향으로 일어난 경제적 불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변호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전쟁으로 인한 경 제적인 손실이나 그에 따른 희생자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불의한 글로벌 구 조의 중심부에서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직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글로 벌 구조가 인간과 환경에 무수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백인 그룹들은 미국과 글로벌 시스템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해야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진보주의는 이러한 미국과 글로벌 시스템들을 잘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확고한 기독교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암 5:24)"로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독교 라는 하나의 특정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로 보거나 또는 특별한 한 구세주(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해 서)를 믿는 사람들로 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는 모든 사 람들의 고난과 관련되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심도 깊은 기독론을 신학적으로 성립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렇 다면 우리는 부정의와 억압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우 리는 예수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들에서 문제가 보입니까? 몇 세대 동안, 미국 기독교인들은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로부터 서로 자신의 편이 되라고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한국의 기도교인들도 같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난 몇 해 동안 이런 분열은 교회에 피해를 가중시켰고 통제를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그릇된 양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 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는데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의 싸움들이 더 이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는 한국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십년동안, 한국 학생들은 나에게 한국 문화는 "중도(middle way)"에 가치를 둔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강연에서 나는 현대 신학에서 두 경쟁적인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기 독교 신학자로서 강의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오늘의 강연을 지난 수년간 함께 해 온 나의 한국 학생들에게 헌정합니다.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신학자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조직신학의 대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신학의 자리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강의는 세 부분 (기독론, 성령론 또는 성령에 대한 교리, 교회론 또 는 교회에 대한 교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기독론

나는 어렸을 때, 축구 시합을 즐겼습니다. 내가 집에 오면 아버지는 승부에 대해 질문하시곤 했 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최종 점수에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축구 시합에서 중요 한 것을 항상 놓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기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하고, 운동장에서 공을 잘 차고, 공을 골인 시키는 그런 드라마가 축구 시합을 이끄는 것입니다. 점수와 승부에만 관심을 보일 때 축구의 제 맛을 잃는다는 것입니 다.

기독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며 (고 후 5:19)"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 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빌 2:9-11)"만을 강조하는 것은 최종 점수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다해 (때론 몸을 다해)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 보지 않는다면 기독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드러난 초대 교회 찬가의 절정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9)"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결론에 해당하는  "이러므로(therefore)"입니다. 위대한 기독론적 선언들이 결론지은 이야기들로 사람들이 동시대안에서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선언들은 공허한 구 절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μορφή)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μορφὴν)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새번역).

나의 스승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berg),  그 다음의 스승인 제프리 웨인라이트 (Geoffrey Wainwright)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들은 송영찬가/영광송(doxological)으로 이뤄진 찬양 언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언어는 궁극적인 실제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선언문 시리즈로서 취 급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언어는 자신을 포함해서 이뤄집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면 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연관시키지 않고, 신성한 삶속에 참여하도 록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그릇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론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됩니다. 인간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자기-계시 가 일어나는데, 이런 예수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질은 신학적으로 설명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원천(infinite Source)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 없이 당신 스스 로를 유한한 존재라고 기술할 수 없듯이, 이 사건을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학자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를 소지가 가장 많 습니다. 신학서적들은 기독론을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기독론을 객관적인 대 상으로 취급해서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뒤집어서 모든 면 들을 다 보이려고 합니다. 더 나쁜 것은 어느 한 기독론을 무기처럼 이용해서 다른 신학자들을 반 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문자적 무기들을 사용했던 (지금도 때때로) 것처럼 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론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기독론 연구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잘 못된 일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장 자주한 질문은 아주 직설적인 질문인데, "그러 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 15)"입니다. 나의 스승이신 예일대 한스 프라이(Hans Frei) 교수는 나에게 "자기만의 기독론을 쓰기 전까지는 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러므로, 나는 신학 수업을 바로 시작하면서 신학생들에게 자신의 기독론을 서술하라고 요구합니다.

진보주의가 기독론 연구를 기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기독론 연구 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다섯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1) 삼위일체 그리스도. 성부에게 자신을 영원히 내어주는 신의 위격으로서의 삼위일체 그리스 도(Trinitarian Christ)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지상 사역이 신적 존재 자체의 영원한 역동성을 명시 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2)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 이것은 교회나 국가로부터 눈을 돌 려 전 세계가 직면한 우주적으로 중요한 예수의 사건을 질문하게 합니다. 3) 요한복음의 대제사장 기도문안에 나온 그리스도의 영(요한복음 14-17)은 우리가 현재에 주목하도록 즉, "우리와 함께 하 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실존의 직물 안으로 짜여 들어 온 성령에게 주목하도록 만듭니 다 (이 부분은 다시 다룰 것입니다). 4) 신비한 그리스도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기독론입니다(신비적인 표현인 en Christo는 서신들에서 93번 정도 반복됩니다).

5)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수많은 표상들(faces)이 있지만, 빌립보서 2장의 케노틱 그리스도 (Kenotic Christ), 자기-비움의 예수보다 더 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케노시스(kenosis, 하나 님의 자기비움) 안에서,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정의의 기독교 신학을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권(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방신학자들은 그 "우선권"이 바로 자기를 비운 예수의 케노시스를 정확히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다섯 가지 기독론에 대해 많은 공통점을 가 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여기 제시한 위대한 기독교적인 논증들을 가지고 서로 결속되어 있 는 시점에서, 비-기독교인 세계와 우리의 논쟁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저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II. 성령론

위르겐 몰트만은(Jürgen Moltmann)은 "성령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령간의 관계성은  무엇인 가?" 하고 질문합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과 부활이 반 드시 현존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시작하도록 신적인 성령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몰트만은 "성령 안에 거함이란 열광적이고 차고 넘치는 완전성을 향해 가는 것을 의 미하는데, 이는 예수안의 삶의 신적인 역동성을 몰고 오는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방법은 약자에게 강함을 주는 것이고 강자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길은 힘의 축적함 보다는 항상 타자들을 위해서 존재함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은 예수를 고난으로 인도하고, 종국에는 십자가로 향하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의 고난의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부재를 견디도록 힘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과 부활은 성령의 한 행동이면서 동시에 두 측면인 것입니다. 즉 "출산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3)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아침 교회에 임한 성령은 신적인 역동성과 함께 활동하며 영적인 선물들(charismata)을 사역위에 부여하며 교회에 임합니다. 성령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 들의 소원을 빌기 때문에 "법"을 초월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이 있습니 다. 만약에 우리가 이와 같은 성령을 따르고 있다면, 오늘날 성령이 교회에 부여한 힘은 예수가 말 했고 행동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도록 지시할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성령의 진정한 사역 을 말하고 있는데, 성령 안에서 우리의 참여는 반드시 예수의 지상 사역 기준의 반대로 측정될 것 입니다.

보수와 진보 기독교인들 간의 분열로 인해 성령론보다 더 큰 피해를 본 논의는 없을 것입니다. 해방 신학을 탄생시킨 라틴 아메리카는 이제 오순절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교회들의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해방 신학자들과 오순절파가 함께 연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협 력체가 될 것인가요? 전 세계를 향한 간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그룹은 서로 비판하는 것에 힘을 쏟아 붓고 있으며, 연합된 교회보다는 분리된 교회로 세계에 비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의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 바울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보수주의건 진보주의건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동의 장을 부여하는 성령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해방의 성령론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령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가 행한 모든 행동과 그가 말한 모든 비유에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를 위해서 이 비유들을 말했습니까? 예수 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눅 5:32)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카리스마타(charismata), 성령의 선물들을 설명하길 좋아하는데 이는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성령이 주어졌는지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성령론에서 성령은 파라클레토스(Paracletos 요 14:16), 보혜사(Comforter, 위로자) 또는 "옆에 계시는 자"를 의미합니다. 누구 옆에 있는 것일까요? 그는 고난을 위로합니다. 바울은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곳에서 카리스마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고 했기 때문이다. SCM Press, 1992)[한국어판: 『생명의 영』, 김균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2], 61을 보라. 몰트만은 예수 의 사역을 오순절 경험과 깊게 연관시키고 있다.

판넨베르그는 성령은 성자를 영광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요 16:14), 성령은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 14:26)"라고 강조합니다. 예언들과 가르침들이 얼마큼 힘 을 가지고 있든 간에 복음서의 예수에게 빛을 비추지 못하면, 이는 성령의 예언들과 가르침이 아닙니다.

미국 초 대형 교회들의 성직자들은 부와 번영에 대한 설교로 유명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개 인의 부에 대한 설교들과 오순절 예배를 매우 대중적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는 원 칙들은 성령이 부와 권력과 명성과 혼합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 성령은 아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의 말씀들로부터 예수의 성령을 분 리시키길 원한다면 이것은 성령을 단지 부와 권력과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합니다.

앤드류 성 박(Andrew Sung Park)은 그의 훌륭한 책, 『상처에서 치유로: 상처입은 자의 신학』(From Hurt to Healing: A Theology of the Wounded)에서 "죄인들(sinners)"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 (the sinned-against)"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용납(acceptance)을 구하는 것이고,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의 은혜는 두 그룹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 하나님의 근원적인 신학적 특징이 (죄인들을 위한) 연민(compassion)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justice)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이 두 가지 사역들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인들 의 기도가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기도를 압도하도록 우선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이런 분열을 결코 만들지 않았습니다.

III. 교회론

나는 친구이자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의 교수였던 앤드류 성 박 교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 니다. 특별히, 그는 교회와 한(恨)을 항상 같이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한은 서양인들에게는 이 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최고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한은 아무런 도움을 받 을 수 없는 악한 상항에서 무죄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무력하고 소외되 고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의 경험이 한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교회론 은 바로 한의 장소에서 반드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연민(compassion)을 인류에게 계시합니다. 복음서들을 통해서, 한을 치 유하는 특별한 방식 안에서 연민은 유발됩니다. 예수는 부자들에게 좀처럼 설교하지 않지만, 설교 할 때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그의 사역은 억압받는 자나 상처 입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박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는 근본적으로 유죄(guilt) 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유죄는 권력을 가정하 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예수는 사회 소외층들이 느끼는 상처받기 쉬운 수치심(shame)에 대해 말하 였습니다.6)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파괴된 관계성을 치유하는 것인데, 가난한 자들이 희생으로 부자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서 생긴 파괴된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주변사람들의 한을 치유하는 것만 하지 아니었습니다. 예수도 직접적으로 한을 경험합니다. 박해와 거절, 재판과 고문, 그리고 십자가상의 고뇌하는 외침에서 한을 경험합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 예수의 고난은 죄의 결과도 하나님의 인과 응보와 정의를 위한 필요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한을 나타내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고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으로써 우리도 같은 의미 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박 교수에 의하면 한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보살핌(care)과 존경(respect)과 도전(challenge)이라는 세 단계를 요구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치유의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부활은 고통의 최상의 두려움인 죽음 자체에 도전하지만,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이 지닌 인 간성을 부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전합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의 폭력에 도전합니다. 동 시에 하나님은 세계를 포용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세계에 제시합니다.

한의 치유는 오순절 경험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상처 입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초월합니다. 또한 성령은 타자들을 똑같이 돕도록 상처 입은 세계에 하나님의 치유를 몰고 옵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구조 속에서 억압자들에게 도전합니다. 

앞서 설명한 기독론과 성령론이 교회론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세 가지 주제는 교회가 우리의 상처 입음과 치유와 성장을 위한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성령이 가져온 치유는 독일인들이 말하는 "wozu" 구조를 가지고 있습 니다. 우리가 치유되고 그러므로(so that) 우리는 치유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종류의 치유를 이뤄내고, 교회는 어떤 종류의 치유를 실천합니까? 나의 보수적인 친구들은 개인적인 치유, 특별히 개인 구원에 중심을 두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나의 진보적인 친구들은 교회의 사명은 사회와 세계의 치유자가 되 는 사회 정의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치열한 논쟁 싸움 속에서 신학은 피를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감리교 전통은 중요한 공헌을 합니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 종교라고 설교했습니다.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에게 있어 기독교를 혼자만의(solitary) 종교로 돌리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진정한 웨슬리 신학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성화(sanctification)와 사회적인 성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 니다.) 박 교수도 이에 동의하며 "개인적인 치유는 구조적인 치유와 친밀하게 서로 섞여 짜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조적인 한과 따로 떼어서 개인적인 한을 치유하기는 어렵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신학은 경건과 개인적인 성화를 확실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은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에 대해 도전하는 경제윤리를 수반합니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 원들의 통합성을 가지고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풍부한 개념들을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이 두 차원들안에서 성화가 일어나도록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개인적인 형태와 사회적인 형태로 기독교 선교의 싹을 틔우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세계 많은 국가들안에 교회의 역사는 비슷한 세 단계로 움직였습니다. 건강하게 균형이 잡힌 복음의 시기에는 내적인 변혁과 세계 안에서의 행동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박해의 때 에는 종교적이 되거나 정치적이 됩니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박해 받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내향 성을 띄게 됩니다. 이 때 신앙의 내적인 삶과 교회의 사적인 삶이라는 만연된 두 주제가 있습니다. 박해 이후, 교인들은 "정상적"이 되길 원하고 주류가 다시 되길 원합니다. 교회는 많은 수의 보수 파와 적은 수의 진보파로 갈라집니다. 이 반대적 성향은 각각의 그룹을 각자의 성향쪽으로 점진적 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이 양분화는 신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안의 핵심주제들은 모두 "양자/모두(both/and)"의 문제이지 "양자택일(either/or)"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는 내적인 구원과 성화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회가 오늘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예수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갖고서 권력에 대항하는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합니다. 성 령은 내 적인 자아를(마 15:10-20, 롬 12:1-2) 변혁시키고, 변혁시켰고 우리도 변화되어 우리를 둘 러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악의 변혁에 참여합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 다원 세계에서 복음의 한 면만 제시한다면, 우리는 혼동 속에서 잘못된 연합을 창출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지상의 소금이 되고 세계의 빛이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21세기 세계의 복잡한 글로벌한 도전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이끌어내야만 할 것입니다.


1 ) 나는 이 논문 작성에 많은 도움을 준 저스틴 하인제커 (Justin Heinzekehr)조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2 ) 몰트만의 성령론을 위해서는 그의 책, The Spirit of Life: A Universal Affirmation. Margaret Kohl 역 (London:

3 ) Andrew Sung Park, From Hurt to Healing: A Theology of the Wounded (Nashville: Abingdon Press, 2004), 104.

4 ) Andrew Sung Park, The Bible and Han," The Other Side of Sin: Woundednes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inned-Against, Andbrew Sung Park and Susan Nelson 편집 (Albany: SUNY Press, 2001), 45-49 (직 접인용 47).

5 ) Andrew Sung Park, From Hurt to Healing (예, 35-49).

6 ) 윗글 28.

7 ) Hong-ki Kim, "An Interpretat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e Wesleyan Perspective," Global Impact of the Wesleyan Traditions and Their Related Movements, Charels Yrigoyen, Jr. 편집 (Lanham, MD: Scarecrow Press, 2002), 201-216 (직접인용 204).

8 ) 윗글 201

9 ) Andrew Sung Park, From Hurt to Healing,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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