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에베소서 5장 22-33절)
설교문
하와이의 해리스 목사는 어느날 한 청년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교회 출신으로 몬태나의 해병대 기지에서 훈련받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보낸 편지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훈련이 끝나면 고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주례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다섯 장에 걸친 편지에서 그 여자를 소개했는데, 그녀에 대해 너무 찬사를 늘어놓아 해리스 목사는 이 청년이 엘리자베스 테일러 정도 되는 미녀를 데리고 오는 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제대를 하고, 데리고 온 여자는 평균 이하의 용모를 가진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해리스 목사가 그 청년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데 '그 청년이 그녀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랑의 과장'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면 눈에 뭐가 씌인다'는 옛말처럼, 사랑하면 상대방이 그렇게 특별해 보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멋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서학에도 '거룩한 과장'(Divine exaggeratio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주님이 행하신 일의 위대함과 주님에 대한 사모함을 나타내기 위한 과장법적 표현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과장'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13-14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 기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 10명의 정탐꾼이나 여호수아와 갈렙, 모두 과장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10명의 정탐꾼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표현한 반면, 적들을 '거인'이라고 과장해서 표현했습니다. 막강해 보이는 적들을 보고 자신들이 느낀 좌절감을 이렇게 과장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큰소리칩니다(민 14:9). 이것도 일종의 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장은 '거룩한 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승리에 대한 과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의든 악의든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나쁜 것을 과장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과장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부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새해에 여러분의 가정에서 내외간에 서로 '사랑의 과장' '거룩한 과장'을 하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부부관계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5장 33절에 나와 있습니다.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이 말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바울이 살았던 고대 로마 사회의 심각한 가부장주의를 생각하면, 여성의 지위를 매우 획기적으로 높여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아직도 남녀차별이 있기는해도,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성의 지위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에서 소속된 재산이나 노동력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여성의 지위를 인정했던 헬라 사회조차도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이방세계와는 달랐지만,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구절을 내세워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이 질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창조질서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깰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여성은 창조질서에 따라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서, 남편에게 도움이 되어야 축복이 되고, 덕이 되라고 권면하곤 했습니다. 물론 구약에 나타난 여성관은 이방사회와 비교할 때, 훨씬 더 여성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남녀 평등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남녀 평등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라고 해서 남자보다 열등하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 주셨습니다. 기독교 때문에 여성의 지위는 상승되어 교회와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하나님을 영광 돌리는 파트너로서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온 다음에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신비롭고 숭고한 일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가정이 이뤄지고 자녀를 낳아 번성함으로써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됩니다. 또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작지만 특별한 사회를 통하여 인격이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아내를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골로새서에서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라고 하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가정의 기본질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벧전 3:1)라고 하면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성경적 견해가 세상의 가부장적 문화와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신앙적 이유와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그리스도인들이 주께 자율적(自律的)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아내도 주 안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남편의 권위에 따르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23절에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여기서 "머리"라는 말은 "지도자" 혹은 "통치자"라는 의미인데,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도자인 것 같이, 남편이 아내의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의 의미는 세상의 무력을 앞세운 권력자와는 다릅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지도자'로서, 아내와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는 말이 바로 그 말인데,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구속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주님의 말씀에 복종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우리 주님의 권위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희생하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유입니다. 남편도 아내의 보호자로서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라, "주께 하듯이" 혹은 "신앙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은 상대적인 명령입니다. 즉, 남편이 부당하고 비양심적이고, 불신앙적인 요구를 할 때, 그것까지도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한 가지의 오류도 없지만, 남편은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비 진리를 주장할 수도 있고, 비신앙적인 것을 말할 수도 있고, 비상식적인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요구가 신앙적이고 양심적이었을 때는 복종하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채워주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에 대한 '복종'을 권면했던 바울은 곧 이어서 남편에게 아내에 대한 '사랑'을 권면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여기에서 "사랑"은 부부의 육체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 곧,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아가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아가페'를 요구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 마음속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기에 앞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혼식 때, 결혼서약을 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도와주고 위로하며 신실한 남편의 책임을 다하기로 서약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여기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당하든지"라는 말은 상대방이 늙거나, 병들거나, 불행을 당해서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 말대로 부부가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배우자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남편의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28절에서 한 번 더 남편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이와 같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은 자신의 몸과 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몸에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듯이, 아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창 2:24의 말씀처럼, 남편과 아내는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기에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몸인 것처럼, 아내의 머리인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개체가 아니라 한 몸입니다. 따라서 남편의 아내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도록 희생하신 것처럼 인격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이렇듯 부부관계에 대한 세속적 통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사회통념에 따라 가정을 이루어 왔습니다. 물론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도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복종을 요구하고 희생을 강요하며 올바른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신앙 안에서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 주시고, 교회가 예수님께 순종한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복종할 때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금년 2016년에,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 주님을 모시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정의 비밀이요 축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