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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복음

2015년 6월 21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parkjonghwa
(Photo : ⓒ베리타스 DB)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미가서 7:9, 18-19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 참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내가 주님께서 행하신 의를 볼 것이다. 주님, 주님 같으신 하나님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살아 남은 주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아서,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십니다. 아멘.

디모데전서 1:13-16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끝없이 참아 주심의 한 사례를 먼저 나에게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5:11-3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아멘.

설교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듣고 깨닫고 결단할 때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 하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일반적인 질문을 빼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구주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와 함께 사실까? 이 질문에 오늘 구약에서 주신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아주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 푸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물과 잘못이 있으면 분명히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비판하십니다. 심판도 하십니다. 매로 때리십니다. 그리고 서운해 하고, 아쉬워하며 그 노여움을 우리에게 표하십니다. 단, 그 하나님은 진노하시지만, 진노의 사슬에 메여있지는 않습니다. 진노의 함정에 빠져 계시지는 않습니다. 진노의 울타리에서 헤매지도 않습니다. 그 진노는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 아닙니다. 집을 벗어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잘못한 사람을 회개시켜 용서하고 새 사람으로, 사회가 병 들었으면 병을 고쳐서 용서하고 다시 새로운 사회로, 하늘도 잘못 되었으면 고쳐서 새 하늘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약의 말씀을 보면 진노에 메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노와 심판 없이 우리를 사랑의 영역으로 그냥 이동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메이지 않지만 진노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영역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은 굳게 믿었습니다. 때로는 회초리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에 본인이 선택한 백성을 사랑하기에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이것이 미가 선지자의 고백이고, 우리는 그 고백을 경험하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누구시고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나? 그 하나님은 오늘 예수라 이름하는 자기 아들을 직접 보내주셔서 진노 가운데 새로운 사랑을 창출합니다. 그 예수가 오늘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디모데 전서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그 말은 반드시 믿어야 하고, 우리의 믿음의 확신 속에 서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방법만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노와 사랑, 심판과 구원, 이것을 베풀어 주신 분이십니다. 믿으시지요. 받아드리고 그렇게 생활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피하시지 않으신데 진노를 어떻게 책벌하시나요. 하나님을 진노시키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진노의 목적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게 하심으로 진노를 발휘하시고, 그 죗값으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새로운 사랑, 새 사람, 새 세계는 어떻게 만드셨나요? 십자가에서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끝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메이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만민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 배경 하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커다란 드라마입니다. 오늘 드라마의 주인은 셋입니다. 첫째 주인공은 아버지, 둘째 주인공은 큰 아들, 셋째 주인공은 작은 아들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이민을 떠나고 싶습니다. 저에게 주실 상속을 지금 미리 해주십시오. 그렇게 상속을 받아서 외국으로 떠난 아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 땅에 살던 유대인 숫자가 약 50만 명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헬라, 로마제국까지 식민지 시대를 천년 이상 살았으니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적고, 다 흩어져 지금은 로마가 다스리는 영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400만 명 쯤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둘째 아들은 50만 명 중에 하나입니다. 이 아들이 말합니다. 저도 넓은 곳에 가서 보람 있게 살겠습니다. 제 분깃을 미리 나눠 주십시오. 당시 유대교 법전에 의하면 아들이 둘일 경우, 큰 아들은 재산의 3분의 2를, 둘째는 3분의 1을 상속받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몫인 3분의 1을 상속 받아서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가까운 외국이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시리아로 갔는지, 요르단으로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습니다. 거기까지는 스토리의 중요한 대목이 아닙니다. 오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 상속받은 둘째 아들이 이민을 갔습니다. 잘 살았으면 문제가 아니지요. 성경말씀은 이 사람의 생활을 다음과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 허랑 방탕, 낭비, 탕진, 흉년, 배고픔, 모두 이해하시지요? 마지막 아들이 결단합니다. 여기서부터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이 너무 배가 고파 어느 집에 찾아가 일할 자리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결과 돼지 키우는 일을 역할을 받게 되었습니다. 돼지을 기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머릿속에 내 발 달린 짐승은 먹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돼지는 비극적인 상징이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의 생활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 입니다. 돼지를 기르면서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를 먹을 수 없을까. 그러나 그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돼지 사료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빈곤, 가장 천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돼지 치는 일, 여기서 둘째 아들은 극단의 생의 전환을 합니다. 이것으로 생을 마감할 수 없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 단 한 가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신앙의 결단이 시작됩니다. 최후의 상황 속에서, 한계 상황에 도달할 때만 아버지를 찾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하나님 찾기가 그렇지요. 목이 마르지 않고, 평안한데 왜 하나님 찾습니까. 배고플 때, 병 들었을 때, 제한이 왔을 때, 한계에 부딪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신을 찾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한계 너머에 계시는 신, 그래서 결단합니다. 아버지 집에 가면 그래도 쥐엄 열매보다는 먹을게 많을 텐데, 종들도 더 잘 먹는데 무조건 가서 빌자. 다시 회개하고 받아 달라고 신앙의 결단을 합니다. 아버지 또한 자신의 삶의 결단이 있습니다. 내 아들은 언제와도 좋다. 지금와도 좋다. 무조건 오면 나는 받아드린다. 아버지의 사랑의 기다림과 둘째 아들의 회개하고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오늘 팽팽하게 맞섭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명령을 합니다. 아들이 돌아왔으니 새 옷을 입혀라. 이것은 법적 권리가 회복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복된 아들입니다. 반지를 끼워주어라. 반지는 일종에 권위의 상징인데요, 부권입니다. 아버지가 땅을 팔고나서 서명을 해야 하는데 서명을 위임할 권한은 반지를 찬 사람만 가질 수 있습니다. 너는 아버지의 권한을 위임 받을 자격이 있다. 신발, 농경시대의 신발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경영하는 모든 사유를 다니면서 관리할 수 있다. 아들권의 회복입니다.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빌면 아버지가 용서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아들이 회개하러 돌아왔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먼저 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의 간절함 소원보다 아버지의 기다림이 먼저였습니다. 사람의 간구보다 하나님의 알고계심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이 아들의 간구보다 훨씬 크고, 깊고, 넓었습니다. 오늘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보다 먼저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람이 간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은 인간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세상에 오셨지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오심에 우리는 감사하다고 응답하는 것 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다. 사랑이 먼저다. 그러면 그 사랑은 아무나 받나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없습니다만 성경말씀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회개 없는 사랑은 베풀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선물로 주실 때 십자가 통해서 주셨지 십자가를 건너 띄고 부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면 구원하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때 반지가, 신발이, 옷이 주어졌습니다. 회개와 용서함 없이 구원 받으면 그런 구원은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 부활이 하나님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은혜를 값싼 은혜라 이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값싼 은혜가 없습니다. 아주 비쌉니다.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이 있고, 회개를 걸쳐서 용서함이 있습니다. 용서함이 있어야 새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랑을 베푸시고, 사람에게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베푸신 것과 동시에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한 장면 밖으로 갑니다. 큰 아들이 말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지 재산이 큰 아들 재산입니다. 그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태평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은 오히려 왜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도 축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면서 왜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이렇게 성대한 잔치를 베푸십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지 않았느냐 입니다. 그러나 너의 동생은 나를 떠나서 항상 빈곤 속에 있었고, 너는 매일 축제를 맛볼 수 있지 않았느냐. 둘째 아들이 이제 돌아왔으니 축제를 베풀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 예수께서 주신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먼저 믿어서 구원 받은 사람들은 형과 같습니다. 이제 막 구원 받은 사람들은 동생과 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아프냐면 구원 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축제가 아픈 것이 아니라. 먼저 된 자들이 하는 교만, 시기, 질투입니다. 제가 표현해 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굉장히 배고팠습니다. 먹여 주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굉장히 배 아팠습니다. 여러분, 배고픔이 큽니까. 배 아픔이 큽니까. 사람마다, 종교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큰 아들은 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또 다른 아들은 불행하게 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분단되고 분열된 극과 극으로 갈라진 이 운명을 하나님의 운명으로 용인하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이 강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가족을 세상을 극과 극으로 대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배 아픈 자들을 회개시켜서 사랑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픈 자들은 먹여서 배부르게 하고, 둘이 합하여 아버지와 함께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잘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둘의 연합을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행복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둘 아들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 드립니다. 사람이 구원을 결정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어떻게 빌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느 분 소설을 읽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신앙이 깊어졌고, 그 당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썼습니다. 그는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게 천국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영혼 속에 천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을 썼을까요. 이 사람이 27살 때 이 당시 러시아 황제가 독재를 했고, 젊은이들은 이에 항거 했습니다. 우리말로하면 분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많이 잡혀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열혈 운동권 중에 하나로 잡혀가 사형대 앞에 섰습니다. 몇 사람이 사형 현장에 끌려왔습니다. 1849년 봄입니다. 명령을 합니다. 총이 발사되면 모두 죽는 순간에 갑자기 말을 탄 병사 하나가 사형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형집행 중지와 황제 특사라는 이 두 마디만 합니다. 이로 인해 사형이 중단됩니다. 이 얼마나 청천병력 같은 소리입니까. 그 자리에서 한 청년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간질병을 앓던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는 그 때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그때 하늘이 땅으로 내려와 나를 완전히 감싸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 안에 오신 하나님을 받아 드렸고, 그 분이 나의 온 몸으로 오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게 다입니다. 그리고 거품을 물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나중에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사형수들은 시베리아로 유배생활을 떠납니다. 4년의 유배생활 동안 반입이 되는 책은 유일하게 성경책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경을 수십 번 읽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크시다. 내 회개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높으시다. 아니 내 생각보다 하나님은 훨씬 넓고 깊으시다. 여러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오늘 탕자 옆에 있는 말씀 아버지는 이 세상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쁜 자와 슬픈 자로 나눠져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시키고, 용서해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엄청난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함은 세상을 뒤바꿉니다.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심은 세상의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제안입니다. 나의 이 기쁨에 큰 아들아 배 아픔을 물리치고 동참해다오. 너는 매일 매일 주어지는 일상의 기쁨을 만끽해야 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매일 매일을 기쁘고 즐겁게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 둘째는 매일 매일이 지옥이고, 이제야 비로소 축제에 참여한다. 불평하지 말아라. 매일매일 축제를 누리는 사람들과 이제야 겨우 큰 축제 누리는 사람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나와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자. 희망이 있다. 기쁨이 있다. 사죄함이 있다. 새로 나자. 가자. 내일은 밝다. 이 내일을 오늘 순간순간 속에 가지고 옵시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여러분에게 이 날이, 이 시간이 열려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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