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하박국서 2:1-4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아멘.
로마서 1:16-17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0:26-33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 아멘.
설교문
경애하는 경동 교회의 목사님, 형제자매님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자주 저희 교회 3층에 있는 목사실에서 일본의 구5가도의 하나인 나카센도우(니혼바시에서 시가현・쿠사츠슈쿠까지)의 길가를 내려다봅니다. 이 3층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서 가는 모습, 달리는 모습을 봤을까요. 신호가 바뀌자마자 경주마와 같이 달리기 시작하는 회사원이나 자전거를 타고 서두르는 학생이 보입니다. 거래처나 수업에 지각할 가봐 그런 것인가요? 봄이 되면 가까이 있는 도쿄대학의 합격 발표가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합격자 게시판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는 수험생들을 본 적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0년전, 니시카타마치 교회 주변도 미군에 의한 대공습을 받았습니다. 그 때도 이재민들은 폭격으로부터 도망쳐서 길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현재도, 출세 경쟁, 경제 전쟁, 수험 전쟁으로 불리는 경쟁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혹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 3월 11일 도쿄의 교통기관은 완전히 마비되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저녁시간에 떼를 지어서 걸어가는 이상한 광경도 목격했습니다. 이윽고 폭발한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 발전소로부터 방출된 방사능이, 니시카타마치 주변에도 바람을 타 대량으로 춤추듯 내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금년 8월, 큐슈에서 원자력 발전을 재가동시켰고, 또 9월에는 안전 보장 관련법, 별명・전쟁 법안을 국회에서 강행 체결했습니다. 그것은 반복되어지는 원자력 발전 사고나 전쟁, 혹은 테러의 발발에 의해서 사람들이 이 도쿄・나카센도우를 다시 재난을 피해 필사적이고 달리는 예고인 것은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서두르고 혹은 달리고 이 나카센도우 길에 니시카타마치교회의 예배당이 80년 전에 건설되어 그 이후 움직이지 않고 계속 세워져 왔습니다. 그 입구 홀에는 많은 교회와 같이 다음 주일의 설교제목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 주일날의 설교제목을 저는 오늘 아침과 같이 「서두르다, 당신에게 알린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서두르는 당신에게, 달리는 당신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의미를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것은 오늘 아침만의 일이 아니라 어떤 제목이든 설교제목은 교회 앞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초대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있어도 간판의 말씀과 교회당의 훌륭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고 문자 그대로 여기에 뛰어 들어올 수 있던 사람들도 많이 계셨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선 구약 성경 하박국서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의 시대는 국제적인 대변동의 시대였습니다. 하박국이 속하는 소유다는 대국 이집트와 바벨론의 사이를 안전보장을 구하면서 우왕좌왕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에게 습격당합니다. 하박국 1장8절에는 표나 늑대와 같이 재빠르게 덤벼 들은 침략자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유다 사람들은 공포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단지 암운에 힘차게 달리고 싶었습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달린 곳에 안전과 생명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 예언자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2)
마라톤 중계를 보면 괴롭게 달리는 선수에게 코치가 메가폰으로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허덕이는 선수에게는 작은 소리로서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메모로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하나님의 생각은 전광 게시판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한 한 크게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이야말로 이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핵심 부분 1장 17절 말씀으로 인용했습니다. 그 의도는 이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를 보세요! 달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서두르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신앙으로 서두르고 신앙으로 달리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구원은 없다. 올바른 자는 신앙에 의해서 산다!"
바울은 원래 교회 박해자였습니다. 크리스찬을 잡으려고 먼 다마스코스까지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 박멸을 위한 질주에 의해서 반대로 자신을 멸하려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그 와중에 그는 "복음"을 내던진 듯이 세차게 내리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이 그의 눈앞에 크게 말씀을 써주신 사건이라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달리는 것에 의해서 구원 받지 않다. "신앙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율법이나 행동에 통해서 살 수 없다. "의인는 신앙에 의해서 산다" 이 복음에 의해서 바울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럼 그 후 바울은 달리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마스코스 도상에서 말씀을 받은 바울은 주님으로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늘 아침의 편지로 로마에 가고 싶다고 더욱 나아가 땅 끝까지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울은 확실히 그리스도와의 만남 모두가 문자 그대로 180도 회심 해 버렸습니다만 하나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달리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라는 복음입니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전에 보다 더욱 달리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비유하면 아이가 한 알의 엿을 사고 잔돈을 손에 쥐고 달렸을 때 길에서 한 남자가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맛있는 케이크를 받았다고 합니다."무상으로", "달리지 않아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아이는 기뻐해서 케이크를 높이 들고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지는 않을까요.
바울은 다른 편지로 썼습니다."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율법은 아닌, 행동은 아닌, 신앙만이라고 그래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 그 복음을 정말로 안 사람은 정말로 희한한 일입니다. 바울만이 아닌 개혁자 루터도 카르빈도 교회의 창립자도 그랬을 것입니다. 기쁨으로 교회를 짓기 위해서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개혁자의 복음주의 신앙이란 그처럼 사람의 마음에 구원을 받은 감동과 환희를 상기시켜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1) 새로운 힘을 주는 일이 그치지 않습니다.
혹은 미국 영화에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제목은 사형수가 감옥에서 처형대까지 걷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사형수는 벌써 죽은 사람의 걷는 모습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미 얼굴이 새파랗기 때문일까요. 공포로 다리의 흔들림이 멈추지 않기 때문일까요.
잔혹한 영화지만 그러나 구원은 수녀 헬렌의 존재입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사형수 청년 머슈의 특사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살해당한 아이들의 유족으로부터 머슈가 한 너무도 잔혹한 살인의 상황을 들어 충격을 받습니다. 차로 돌아가는 길 헬렌은 어느새 몇 십 킬로 스피드 오버를 하고 경찰 오토바이에 잡힙니다. 어째서 일까하고 말하면 그것은 헬렌이 어릴 때의 일을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토끼를 잡고 괴롭혔었습니다. 그 때 남자아이한테 봉을 건네받아 "헬렌 쳐라, 헬렌 칠 수 있다"고 아이들이 외쳐습니다. 주저 하고 있었지만 소녀 헬렌은 결국 치기 시작합니다. 점점 강하게 마지막에는 세게 저항하지 못하는 토끼를 계속 쳤습니다. 피가 눈앞에 퍼진다. 그것이 기억나는 와중에 스피드 위반을 해 버립니다.
영화는 뭘 말 하고 싶은 것일까요. 실은 헬렌도 같다고 말합니다. 그녀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항하지 못하는 생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다. 그 죄책감이 그녀를 사형수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살인은 최악입니다. 그것을 한 머슈는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버림 당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헬렌은 머슈 안에 자신의 비참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개혁자가 재발견한 복음은 주예수가 우리의 죄를 모두 아시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 주신 은혜의 사실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듯이 주는 우리와 같은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에 동정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하면서 걸을 수 밖에 없는 달릴 수 없는 우리에게 깊은 동정을 주시고 항상 귓전에 위로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아무래도 죄를 범하는 너의 그 아픔을 나는 알고 있다고... 너의 괴로움을 내가 담당한다고... 그래서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설사 죽음에 향할 때도 그림자와 같이 너와 나는 어디까지나 함께한다고 계속 속삭여 주십니다.
탄원도 거부당하고 머슈의 사형 집행일이 왔습니다. 헬렌은 수녀로서 사형수에게 마지막까지 시중드는 터무니없이 무거울 책임을 담당합니다. 사형수의 가장 곤란한 순간 데드 맨 워킹의 헬렌은 청년의 어깨에 손을 대어 함께 걸으면서 귓전으로 성경을 계속 읽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그 때 헬렌이 읽어 들려준 성경의 구절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장면에서 역시 사도 바울로의 말이 생각해 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 사도 바울을 살려 루터를 격려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오늘 아침도 또 이 사랑하는 경동 교회의 예배에 모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달리는 기쁨과 시련의 발걸음에도 참을 수 있는 위로를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