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19:1-6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러, 광야에다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아래에 장막을 친 다음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아멘.
로마서 11:25-29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9:41-48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성가대 찬양 감사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여름만 되면 농어촌 봉사를 갔습니다. 논에 가서 물도 대고, 밭에 가서 작물도 심고 참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 농어촌 봉사는 없어지고 해외봉사가 생겨났습니다. 저희들 경동교회도 해마다 그동안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로 해외의료봉사를 다녀왔읍니다. 처음에는 참 격세지감을 느꼈었습니다. 봉사란 자신이 하고 싶어야 하고, 또 받는 사람이 기쁘게 수용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최근에 와서는 해외봉사뿐만 아니라 국내봉사의 양태도 달라졌습니다. 과거 방식의 농어촌봉사는 없어졌지만, 낙도와 같이 인적이 드문 섬에 가서 소위 문화봉사를 하는데, 우리교회 청년들도 아주 고맙게도 섬지역 여러 곳에 자주 봉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TV에서 전라남도 신안군 어느 섬에 가서 봉사하는 주한 외국인 봉사팀의 활동을 봤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와서 봉사를 하는데, 영어도 가르치고, 자기가 온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면서 섬에 있는 학생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 중에 어느 한 장면이 제게 아주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봉사 온 선생들 중에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분이 한명 있었습니다. 국내 어느 대학에 박사과정으로 유학 온 학생인데, 제가 봐도 흑인 중에서도 피부가 굉장히 까만 편이었습니다. 이 분이 자기소개를 하며 인터뷰를 하는데, 섬에 사는 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털도 숭숭 나있고 색도 상당히 까만 이 선생님의 팔을 잡고, "이 선생님은 팔둑이 햇볕에 지독하게 많이도 탔네"라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이 아이의 언어는 참으로 순박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인종주의의 선입관이나 잔재가 없었습니다. 그냥 햇볕을 많이 쬐었나보다, 라면서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때 그 케냐 선생의 얼굴을 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다민족 사회가 사는 미국이나 여러 다민족 연방 국가들에서는 탤런트나 아나운서, 또는 공직자가 공개석상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직장에서 또 사회에서 매장당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인종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인종이 모여 살지만, 이렇게 까만 사람을 보고 햇볕에 많이 탔군요 라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얘기할 수는 없을까요. 편견이나 이념의 색칠없이 말입니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몸이 아파서 힘든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또는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가서 생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위로의 말을 전하며 같이 삽시다, 그렇게 말하며 사랑하며 살 수는 없을까요. 요즘 SNS에 보면 좋은 얘기는 없고 그저 찌르고, 자르고, 죽이고... 그런 얘기뿐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혼탁한지, 인종주의뿐 아니라 성차별, 인종차별, 신분차별 등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문명 이기의 발달과 인간 마음의 퇴락이 같이 가는 듯합니다. 낙도 아이의 천진난만한 언어를 들으며 어린 아이라야 천국에 가지, 저와 같이 언어, 이념,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부패하고 잘못된 세대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못 간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직감했습니다. 티없이 맑은 인간의 고백, 그것이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지만 성인의 입에서도 나올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그 나라를, 그 사회를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작은 천국이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 쓰는 언어란 오염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공동체에서는 죄인도, 의인도, 많이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단순소박하게 하나의 언어를 써야합니다. 신앙의 언어지요. 신앙인이라면 매 순간마다 각자 사용하는 언어로 '하나님 당신은 내 생명의 주인이시지요. 정말로 내가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언어로는 하나님께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할 때 꾸며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 이론적 교리를 얘기하듯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아이와 같은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왜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는데, 이 때 자신이 부름 받은 세상에서도 가장 화려한 동네인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예루살렘을 핵심으로 받치는 성전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수가 사람처럼 우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몇 군데에 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로 울면서 살려내셨습니다. 또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죽기직전 하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피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기도하며 피눈물로 우신일이 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을 보시고, 그 중심에 있는 성전을 보시고 너무 힘들고 안타갑고 기가 막혀서 예수님이 우십니다. 우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고,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하나님은 안 계시고,그 대신에 제사드릴 때 드리는 희생제물인 동물을 잡는 사람, 헌금할 돈을 유대화폐로 바꾸며 돈장사하는 사람들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따뜻한 신앙이 아니라 아주 차디찬 교리가, 관용이 아니라 매서운 정죄와 고정이념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의 "선"의 개념에 의하면 성전에 올 때는 깨끗한 마음으로 와야 하므로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이방인은 예배드리러 오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만민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집은 본래부터 만민에게 열린 공간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갔더니 문들이 닫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소위 교리적, 종교적, 철학적, 신학적 엘리트들만 와서 예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빈곤한 서민들도 없었습니다. 만민이 기거하는 집인데, 선택된 자들만 와서 예배하는 집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은 닫혀있던 것입니다. 같은 유대사람인데 여성은 성적 차별 때문에 성전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이는 아직은 무지하다는 이유로, 아직 덜 컸다는 이유로 성전예배 참여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더구나 죄를 지어서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해서 성전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던 겁니다. 잘난 사람들, 기득권 층에 속한 사람들,많이 배운 사람들,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만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론화하고, 이념화한 그런 것을 되뇌이는 사람들만 성전에 모였습니다. 문자가 있고 사람은 없었습니다. 몸은 있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땅이 있는데 하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이 안 계신 이런 성전이 무슨 성전이냐, 이 썩은 성전을 헐라. 내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감히 하십니다. 이렇게 선포를 하시니, 성전을 이데올로기화하고, 교리화하고, 체제화한 유대교 지도자들로서는 예수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불경죄로 몰아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인데 그 좋은 성전이 변질되어버리고 건물만 남은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사람이 살기 위해 임시로 지은 것이 초막 또는 장막으로, 요즘 우리가 말하는 간이주택입니다. 그 장막 중에 회의할 때 쓰는 회막이 있고, 예배드리는 막사도 있었는데 그 막사를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 성막이 성전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인데, 선택된 백성들과 선택받고 싶어 하는 백성 만이 와서 예배하는 폐쇠적인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보니 이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 표현에 의하면 "강도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정치 강도, 이데올로기 강도, 차별 강도, 이권 강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모든 분야에서 강도짓하는 사람들이 성전을 지배했고, 하나님은 쫓겨나있었습니다. 돌판에 쓰인 율법처럼 박제된 말씀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보니 기도로 대화할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부재의 사이비 성전을 헐고 "내가 십자가로, 부활로 살아있는 성전을 다시 만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을 주러 오셨습니다. 생명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즐기고, 동시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생명을 누릴수있다고 하십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생명의 문화가 없고,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 만이 아니라 생명을 사는 참 인간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아, 살아라. 고통 중에서도 살아라. 죽음 속에서도 살아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하나님이 오늘 성전에 계신다"고. 사는 것이 진짜 복된 것인지, 이 땅에서 살다 죽으면 또 다른 천국이 있다는데 제 2의 생명이 진짜 있는 것인지, 오늘 우리는 생명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고민도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살기가 너무 힘들고, 죄 없는 사람이 무수히 죽어가고, 고통이 너무 심하고, 희망이 없어서 허무하다며 생명의 반대인 죽음을 대안으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생명을 살기가 힘들고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아서, 죽음을 택하고 죽음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대립의 두 세계는 분명 공존하고 있습니다. 생명 중심의 사람이 있는 한편,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죽음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 주신 생명을 산다는 말은 생명의 주님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고, 죽어도 하나님은 죽음 속에도 계셔서 죽음을 물리치고 새생명을 부활을 통하여 주신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이 땅에서 살고 저 하늘에서도 사는, 두 세계를 살아가면서 "이 생명"과 "저 생명" 사이에 죽음이라는 건너는 다리가 잠시 있을 뿐이라고 믿고 삽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가 잘 아는 허무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대변하는 그 반대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 이분의 얘기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죽음으로부터 꾸어 온 일정액의 돈이다. 처음과 마지막에 죽음이 있는데, 우리가 사는 생명은 그 가운데 한 토막을 죽음에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밤에 자게 되는데, 잠이란 부채에 대한 매일 매일 갚는 이자를 의미한다"고. 온 세상 역사와 인간의 개별적인 가장 큰 물줄기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가운데 한 토막일 뿐이랍니다. 이렇게 사생관을 지니거나 믿게 되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허무하므로 그냥 포기해버리자는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또는 사도바울도 많이 말했듯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이 나버리니 사는동안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방탕주의가 생깁니다. 허무주의와 방탕주의는 뿌리가 똑같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을 빌려오려고 성전에 가느냐, 아니면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죽음 세계라도 끌어안고 고통을 새기며 죽음을 극복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성전에 가느냐". 예수의 말씀은 쇼펜하우어의 절규를 받아 허무와 방탕의 삶을 질타하는 것같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사람만 있는데, 그것도 미래가 없는 사람, 정신이 없고 몸만 있는 사람 같다는 말입니다. 그 곳은 하늘이 없는 땅만 있는 세상. 그곳에 가니 건물의 치장은 아름답지만 인간 생명의 희망과 기쁨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저 통곡과 아픔의 절규만 있답니다. 이런 성전은 허물어야 한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르게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슬퍼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을 지켜준 성전이 메마르고, 생명이 없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향한 울부짖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죽은 성전을 다시 허물겠다. 이 성전을 허물 때 성전속에 본래 담겨있던 모든 아픔, 슬픔과 죄악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게될 때, 이 옛 성전도 함께 무너저 죽어야 한다. 무너졌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으로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로 성전을 허물고 부활로 새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옛 성전으로 먹고 사는 기존의 엘리트들은 예수를 죽여 없애야 했던 것이고, 그래서 예수가 죽었습니다. 옛 성전 사람들은 자기 생존 때문에 새 성전세움을 주장하는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옛것에 의존하는 집단들, 즉 status quo의 사람과 집단에게 당합니다. 예수의 역사나 우리의 통상적인 세계의 역사나 그 운명이 같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한 성전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안 계신 성전은 죽은 것과 같다"고.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만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가장 깊은 곳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계십니다. 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시고,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진정한 성전입니다. 여러분, 생명과 죽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없다는 것 중에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살고 싶으면 하나님이 계심을 택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이 내쫓는다 하더라도, 당신의 깊은 곳에 있는 성전에서는 내쫓지 마십시오. 당신의 생각의 핵심 속에 생명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삶의 속속들이에 생명의 하나님을 확실히 모시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없이 살겠습니까. 신앙을 가지고 싶으시면 하나님을 삶의 밖이 아닌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난관과 아픔에서도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교회건물에서만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곳마다, 일하는 곳마다, 삶의 둥지를 트는 곳 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디에서나 그 분을 갈구하는 자에게 함께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을 찾는 결단, 고백을 해보세요. 찾아보세요. 그저 풍족한 은혜만 기적적으로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생명 길을 동행하며 함께 살아주시는 분이 오늘도 우리 자신속에, 함께사는 가정 속에, 이 땅 곳곳에, 온 세상의 조직 속에 그분과 그분의 숨결과 뜻이 살아 있는지 찾아보세요.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악해질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성전에서, 신자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내어쫒아놓고서, 허황되고 가증스럽게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실 때에만 우리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각자의 마음, 우리 사회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과 존재가 살아계실 때에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와 대화하십니다. 허공에 대고, 삶의 밖을 향하여 헛되이 찬양하지 맙시다. 차라리 우리 속에서 때로는 함께 우시는 하나님, 때로는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오늘부터 다시 찾읍시다 그리고 그 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살아 움직이는 성전들입니다. 귀한 성전이 행복하게 빛나서 하늘에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여러분 삶에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