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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교회] 가장 작은 자의 하나님

2015년 11월 15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아모스서 5:4, 14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아멘.

로마서 8:18-21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25:31-46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멘.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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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박종화 목사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원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 국민도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라마다 자기 나라를 다른 나라에 알리기 위해 이미지와 홍보작업을 많이 합니다. 각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특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무엇이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외국에 나가보면 '조선'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조선의 의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입니다. 항공사에서도 모닝캄 이라는 등급을 매기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가 조용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조용하다는 아침의 나라가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이런 가운데도 나라가 발전하고 있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자유민주 사회라 더욱 구러하겠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면 자기들의 이미지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 중에 프랑스는 서양 국가들 중에 포용성이 가장 큰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념도, 민족도, 사상도, 종교도, 다양한 가치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자 하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여러 말 중에 '포용'이라는 용어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톨레랑스(tolerance), 즉 관용입니다. 이렇게 넓은 품이 프랑스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했던 톨레랑스가 최근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슬람국가(IS) 집단의 폭력으로 백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지혜를 모아도 폭력 집단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입니다. 평화가 무색해지고, 깨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평화를, 화해를, 행복을 주셨는데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평화가 화해가 행복이 깨어집니다. IS가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자위적으로 했고 행복을 위해서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분노가 집단적으로 표출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노를 자초한 것은 우리 자신들 일수도 있습니다. 다만 폭력을 행사하면서 "알라의 이름으로"라며,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로 인해 죽으면 알라 신 앞으로가 포상을 받는다고 믿으며 기꺼이 폭력에 참여합니다. 이런 알라 신이진짜 본래 모습의 신이라면 참 불쌍한 신일 뿐입니다. 저는 이런 알라를 신으로 믿지도 않지만, 그런 알라를 믿어야 한다면 저는 거부하겠습니다. 이런 신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왜곡 된 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역사적으로 이렇게 이슬람 신자글 만 신의 이름을 빙자해 폭력을 행사했나요?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세계에서도 특히 중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무슬림 백성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힘없는 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막판에 가면 잘못 이영한 신으로 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전파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힘으로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 던 서구의 열강 제국주의 세력도 한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권력을 가진채 식민주의 지배와 제국주의 지배를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신은 어떠한 종교에서든지 힘없는 피지배자들을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이 인간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박대한 결과 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에서 말하는 특별한 신이 한 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그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신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이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자(人子)'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분이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신(神)자가 아닌 인자가 되셨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일상사를 모두 경험하신 하나님의 아들, 아니 인간의 일상사 속에 깊이 들어오셔서 인간과 함께 웃고 우르며, 함께 죽고 사는, 인간세계의 모든 고난과 행복의 역사를 다 함께 몸에 지니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당하시고, 죽은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활까지 하신 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인 그분, 인간의 만사를 다 아시는 그분입니다. 그러나 신의 영역까지 우리 인간을 높히셔서 구원하신 그분, 이름하여 사람의 아들 "인자", 그렇습니다.

오늘 이분이 마지막 심판대에 심판주로 서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자신이 배곺았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는지 아닌지 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당신이 나에게 배가 고팠고 또 고프다는 말을 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 배고픈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언제 당신이 오셨습니까. 그 배고픈 사람 속에 내가 있었다고. 여러분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모두 하나님입니까? 목마르면 다 신입니까? 감옥에 갇히면 모두 신입니까? 밟히며 갈면 모두가 신입니까? 인자의 되물음은 계속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목마른 자가 나였다. 배고픈 자가 나였다. 옥에 갇힌 자가 나였다. 왜 그 때 나에게 주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당신인줄 알았다면 당연히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심판하신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고픈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신앙으로 고백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계시는지,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따로 하늘에 계시고 나만 따로 땅에 사는지, 하나님은 성전 밖에 두고 안에서 우리들 홀로 예배만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분은 내 안에 항상 살고 계시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오늘 고백처럼 내 안에 살고 있는 분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입으로 만 고백만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말씀은 분명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은 계십니다. 배고플 때 하나님은 함께 배고파하십니다. 목마를 때 하나님도 목말라 하십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도 죽으십니다라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우리가 믿는 신은 우리 안에 함께 계시고, 우리의 역사를 함께 만드시고,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내가 왜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고 말하십니다. 그 말은 "내가 배고픈 자 안에서 있으면서 나를 믿으라고 초청할 때 왜 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믿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하늘에 두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난한 자 속에 있다고 하셨으면 가난한 자를 찾아와야 하지 않느냐. 믿음을 들고 찾아 와야 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거 아니냐. 하나님은 어느 곳에 계시기에, 그 계신 곳에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허공에서 믿지 마십시오. 배고픔 속에 계시는 함께 배고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늘나라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오셔서 배부르게 하시고, 풍성한 배부름의 나라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 생각을 하면서 가끔 꿈을 꿉니다. 독일의 통일 과정 가운데 동독이 먼져 망했습니다. 동독이 망했다고 해서 서독이 곧바로 삼킨 것은 아닙니다. 동독에서 정권과 국가체제 붕괴 후에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 의회를 구성하고 소집했고, 이 의회에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 때 동독사람들이 의회구성 투표권을 행사했고 또 선임된 의회에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는 만장일치로 서독과 합하자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법률상 ㅇㅡ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통일입니다. 제가 한 가지 예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북통일을 원해도 막판 법률적으로는 북한이 거부한다고 하면 우리는 북한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 할 수 없습니다. 일본 아베 수상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북한 자위대의 한반도 지입 시에는 한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당신들 남한의 실효지배의 땅은 3.8선 이남이라고 퉁명스레 대답했습니다. 이런 불길한 이야기 하는 거 보세요. 북쪽 땅에서 소위 그쪽 인민들이 국가붕괴 후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들 끼리 모여서 의회나 정권을 구성하고 정정적 투표를 할 때, 자기들의 국가운명을 남쪽과 함께 하자고 결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로 가는 법룰적 상황이 참 어렵습니다. 국제법상 북한도 엄연히 독립국이니까요. 유넨에 회원국으로 가입한 독립국이구요.

제가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은 마지막 심판 이야기를 읽으면서 꾸는 꿈입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이렇게 투표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 정말 배고플 때, 우리를 억압한 김씨 왕조는 핵무기를 만들었지만 얼굴도 모르는 우리 남조선 국민들이 우리 얼굴도 모르면서 우리가 배고플 때 쌀을 나눠주었다. 우리는 이제 남 조선쪽과 통일하자고투표하겠다. 김씨 왕조에게는 투표 하지 않겠다, 중국에게도 하지 않겠다. 우리에게 배고플 때 쌀을 나누어 준 남조선 국민들에게 투표하겠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움직였으니까요. 여러분 혹시 이런 일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마지막 심판 때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 한 숟가락 준 것이 구원의 조건이랍니다. 배고픈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배부른 사람에겐 먹을 것을 가져다 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이렇게 굴절되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 북한의 가난한 사람,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 많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어도 내 눈 속에 이념, 종족의 다름, 피부색의 다름이라는 차별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선선히 못 줍니다. 그러나 인간세계 속에서 가난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떤 생각과 어떤 체제,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살던지 간에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념과 생각에 꽈 메여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다릅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을 넘으시어 사랑을 베프십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셔야 하니까요. 사람이 담을 많이 쌓으면 하나님은 담을 뚫고 들어가서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의 방식과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해법을 찾아 연구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마다 나라마다 체제마다 갖고 있는 장애물, 장벽을 뛰어넘는 공통의 이념을 찾아낼 수 있을까하고. 그것이 도덕이라고 합니다. 어느 한 나라 만에 국한된 도덕이 아니라 세계 모두에게 통용되는 도덕 말입니다. 그것을 혹자는 세계의 윤리라고 합니다. 아니면 생명윤리라고도 합니다. 별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벽에 부딪힙니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세계의 한계이고, 우리 이성세계의 한계 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세계에는 다른 무엇이 있나요.

아무리 북한의 지배체제가 싫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체제속에서 배고파하는 사람들은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모든 분노를 자극하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 그곳의 사람들속에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우리의 똑같은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답은 간단합니다. 항상 어디서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찾아라고. 그 말은 사람이 만든 모든 장벽을 넘어서 온 인류를 회개시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찾으면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가난한 자 속에 계신 하나님이 혼자 먹을 것을 먹고 싶으셔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프는 자의 어려운 것도 안다. 힘든 것도 안다. 괴로움도 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찾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배고파 하는 자가 도움을 받고, 목 마른 사람이 물을 얻어 마시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허공에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가장 작고,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에게 계신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의 음성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참 어렵지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러하십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가난한 이웃이 있고, 목마른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목마르지 않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났다고 하는 우리가 가장 작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가치가 없는 인간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잘났다고 우쭐대죠, 무엇을 가지고요? 우리들 사이에 막힌 담도 넘지 못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잘 안다고요. 세상만사의 진실도 모르면서 우리가 좀 힘이 있다고 우쭐대며 말입니다. 자기 생명도 구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자의 하나입니다. 작은 자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데 작지 않은 것처럼 거짓 행세하면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더 작은 자를 업신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은 낮은 곳만 편애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높다고 하는 사람에게 계신 하나님과 인간 세상 가장 낮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한분 이십니다,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사이를 하나님은 종횡무진 오고가며 양쪽 다 구원을 베플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난한 자 만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요. 사람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길 수 있으나.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작품, 가장 낮게 밟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 높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람, 그 사이를 종횡무진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작은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면 그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참 작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기엔 그분이 내려오셔서 가장 작은 자 속에 들어가셨고, 말구유 속에서 탄생하셨고, 우리 인간의 가장 밑바닥 가슴 속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작은 자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죽음도 함께 하시고, 고난도 함께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우리를 부활시키셔서 세상에 떠돌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자를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려고 예수님의 승천의 대열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승천이 없는 부활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부활하면 반드시 승천을 해야지요. 부활하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살아야지요. 승천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땅이라는 공간을 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의 삶과 위치에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 가슴 속에 앉힘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그래서 축복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일일이 관여하셔서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것을 듣고 아는 사람은 진실로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자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자까지도 포함해서 하나님은 전체 인간을 좋아하십니다. 성경말씀 전체를 보면 그 분은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되 먼저 마난한 자를 사랑하셔서 똑같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 배고픈 자, 별 이야기 다 있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배타적 언어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까지도 아니 가난한 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이시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 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포용적입니다. 어느 하나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배타적으로 고집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잘못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가장 작은 하나님은 "먼저" 가장 작은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적으로 제도로 얽히고 섥힌 무슨 일 때문에 결단하기 어려우면 여러분의 온갖 장벽을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이 땅에도, 교회에도, 사회에도 장벽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 서야 합니다. 신앙은 넘어섬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먹을 것을 얻고, 하나님은 기쁨을 얻고,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행복의 봉사를 더하라고 풍성한 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만드는 아름다운 합력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하시는 인자의 말 씀, "나는 가난한 사람 속에 함께 있었다.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가난한 자가 오늘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등극하는 것도 보았다. 그 약속을 받았지 않았느냐. 함께 살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우리의 최종적인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이성을 넘어섭니다. 인간의 욕망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자기의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기적같이 이루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함께 교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그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막힌 담을 뚫어 주시길 바랍니다. 등 뒤에 계신 하나님이 밀어주십니다. 담을 헐고 뚤리게 하십니다. 성령의 은혜로 마음이 서러서로 뚫니는 변화를 받아, 이 참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모시고 살며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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