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혁신은 주변인으로부터 온다

최웅재 객원기자·연세대학교 신학과 3학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스틸컷 

어렸을 때 읽었던 대부분의 위인전은 지루했다. 개인이 살아온 삶보다는 개인이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항상 위인전을 읽고 나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곤 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했고, 신사임당이 훌륭한 어머니였고,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했다는 사실은 어린 나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서 접한 한 위인의 이야기는 나에게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담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4, 모튼 틸덤 감독)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물론 영화라는 시각적 매체로 각색되었고, 여기에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뛰어난 연기가 더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때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런던. 독일군의 폭격과 U보트의 해상 봉쇄로 인해 영국 국민들은 매일 불안에 떨고, 런던은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수학자와 언어학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당시 캠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수학교수였던 튜링도 그곳에 지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24시간마다 설정이 바뀌는 완벽한 암호체계, 1590억의 10억 배수에 달하는 변수, 2천만 년간 해야 할 일을 20분 만에 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독일군의 ‘에니그마’를 해독해내는 것이었다.  
튜링은 자신이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고, 이곳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따돌림을 당해온데다 동성애자이기까지 한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서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혼자 기계를 설계하느라 바쁘다. 팀원들은 괴짜처럼 구는 튜링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나중에 합류한 유일한 여성인 조안 클라크의 도움으로 튜링은 동료들과 소통하고 협력하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을 외톨이로 지내온 튜링에게 동료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결국 완성된 에니그마 해독장치 ‘크리스토퍼.’ 하지만, 이들의 임무는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으므로 크리스토퍼가 완성되었다고 아무한테도 알리지 못했다. 독일군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면 그들은 눈치를 채고 다시 에니그마를 조정할 것이고, 그럼 전쟁은 끝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 정부 비밀조직 M16가 여기에 관여한다. 그들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얻을지를 철저하게 계산했다. 독일군의 어떤 공격을 막아내야 할지, 어떻게 티가 나지 않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전쟁은 끝났고, 튜링의 크리스토퍼는 약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기밀 프로젝트였기에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았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었다. 튜링은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유죄판결을 받았고, 화학적 거세 조치를 당한다. 영화 속에서는 크리스토퍼를 더욱 발전시킨 여러 대의 ‘튜링 머신들’ 사이에서 그래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수치심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는 1954년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42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스틸컷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 못한 일을 해 낸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된 대사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혁신은 주변인으로부터 온다는 짐멜의 말이 떠올랐다. 앨런 튜링은 어려서는 친구들, 어른이 되어서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언제나 주변인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는 동성애자라는 이름으로 남성들 사이에서도 주변인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주변인이라는 그의 위치는 그로 하여금 지배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능력만으로 여성인 조안을 팀에 포함시키는 대범함을 보여주기도 하고, 모두가 인간의 한계에서 사고할 때 기계의 가능성을 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원형인 튜링 머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끝없는 불안 속에서 주변인으로서의 삶이 하나의 시대적 표준이 된 오늘날, 천재 수학자이기 이전에 외로운 개인으로서 시대를 살아간 튜링의 삶은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그의 삶에 공감하고 희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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