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한 보편적 탄식과 결합될 때 '선지자적 비관주의'의 파토스를 탱탱하게 키우는 것도 흔한 수순이다. 거기에 구조개혁의 바람직한 대안이 제출되고, 그것을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며 공론화하는 것은 나름 선한 결실이다.
물론 그 크고 작은 열매는 대체로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수준이라 비관과 탄식의 사이클은 간단없이 지속된다. 말꼬리를 물고 시비를 다투는 아우성도 비관주의적 침묵과 함께 나란히 이어져간다.
이렇게 힘든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건 그들이 힘들어하는 만큼의 틈새를 제공 또는 묵인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조금씩 빼면서 이 어수선한 세상을 지탱하는 자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다.
자기까지 힘들어 남의 힘까지 빨아들이면 이 세상이 무너지고 다 죽을 것 같아 조금씩 참고 조정하여 묵묵히 제 힘든 상태를 견디면서 제 가난한 힘의 자투리를 말과 글과 돈과 맘으로 보시하는 착한 생명들... 목청 큰 이들이 대접받는 세태 속에 그들이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빤한 한계와 어색한 삶의 포즈를 무릅쓰고 타자를 초청하고 대화하며 환대하는 이들... 제 서푼어치의 번뇌와 병통도 힘들어 전전긍긍하면서도 없는 힘을 맹꽁이 배에 바람 집어넣듯 부풀려 102%의 삶으로 증폭시키는 작은 시민들...그들은 오늘도 어릿광대처럼 이 세상의 침침한 뒷골목에서 희죽거리며 웃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