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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우리 학교에 신학생뿐 아니라 사회복지학, 인문사회학, NGO, 음악/미술, 간호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많이 있다고 미리 귀띔을 해주어도 채플 강단의 담론은 줄창 개교회 목회의 좁은 반경을 선회하기 일쑤다. 지적으로 명민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이 들면서 눈치도 뻔뻔해지는 모양이다.
많이 비좁고 얄팍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론 보도로 제출되는 우리 시대의 뜨겁고 서늘한 쟁점들이 설교 메시지를 위한 계시의 출처가 되는 경우가 참 드물다. 변화하는 사계절의 신비와 이에 대한 창조적 감흥, 그걸 매개로 떠오르는 삼라만상의 까마득한 세계와 억조창생의 내밀한 실존이 창조신학적 코드 속에 메시지로 부각되는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주 하나님 지으신 세계'를 찬양해도 꼭 성경의 문자에 기대어 복창해야 안심이 된다는 양, 진부한 동어반복의 모방적 표현이 답습된다. 시편 등에 뿌리를 둔 고답적인 번역어로 2, 3천년 전 히브리인들의 팔레스타인 자연을 모사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21세기 한국의 자연을 담아내기가 그토록 어려운 걸까.
그러다 보니 설교 메시지가 공변성과 보편성을 상실하고 점점 더 쇄말화되는 인상이다. 훌륭하다는 남들의 설교에 도미노 반응으로 복창하는 듯한 이 특수한 추세가 던지는 계시적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의 눈과 귀가 자신의 의식과 분리되어 따로따로 노는 데 원인의 일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 우리의 뇌세포에 각인된 특정한 기억의 입자들이 창의적 지성으로 갱신되지 않은 채 동종교배에 녹슬고 자기복제의 무의식에 족쇄채인 채 너무 잦은 설교메시지를 찍어내야 하니까 풍성한 오감의 체험도 고이지 않고, 치밀한 성찰을 통한 자기 전복의 상상력도 발동하지 않는 탓일 게다.
자신의 내밀한 속내와 바깥의 무한한 세계를 두루 살펴 그 모든 것들이 계시의 출처가 되려면 우리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두루 필요하다. 분석의 연장질과 해석의 풀무질이 전방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경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갔다가도 그 바깥의 '오늘'과 '여기'라는 세상으로 가장 멀리 뻗어나갈 줄 알아야 한다. 하물며, 나와 전혀 다른 낯선 타자의 세계는 얼마나 막막한 탐험의 요체이며, 동시에 얼마나 긴요한 계시의 출처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