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학생들 체포하러 온 경찰에 “나부터 잡아가라”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 밖에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 교구장좌 착좌식 취임 미사 강론에서)

“주교님, 양심대로 하십시오. 우리야 가진 거라곤 양심 밖에 없지 않습니까”(1974년 8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말릴 때 던진 말)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 고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러 명동성당에 온 신자와 수녀들 ⓒ베리타스

故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서도 교회의 현실참여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확고한 의지가 돋보이는 어록들이다. 교회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제시한 64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에서 사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 교회의 현실 참여란 시대적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다.

당시 독재정권이란 큰 벽 앞에서도 신앙의 양심으로 맞선 김 추기경은 3선 개헌, 유신 헌법 제정, 광주 민주 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한국사회 내 굵직 굵직한 현안에 투신해 한국사회 속 바른 신앙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불의 앞에는 굴하지 않았으며 사랑 앞에는 한 없이 약해지고 또 약해졌던 김 추기경. 그래서 독재정권 시절 경찰이 성당으로 피신을 온 학생들을 잡으러 왔을 땐 “나부터 잡아가시오”라고 했고, 피난처를 찾고 있는 힘없고, 나약한 학생들에겐 성당의 가장 안전한 장소를 제공,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17일 그런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전해 들은 각계 인사들은 조문 행렬을 이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인사들 그리고 불교, 개신교의 대표들도 김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명동성당을 찾았다.

불교계를 대표해 조문한 지관 스님은 “한국 종교계의 큰 스승이었다”며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고통 받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해 왔다”고 했다.

지관 스님은 또 “우리 종단은 큰 스승을 잃은 천주교인들의 슬픔을 함께 하며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고인이 보여준 평생의 지표가 실현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17일 오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포함 스님들이 김 추기경을 조문하러 명동성당을 찾았다 ⓒ베리타스

개신교에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조문단이 각각 방문했다. 조문을 마친 NCCK 김삼환 대표회장은 “한국교회 개신교와 카톨릭 사이 에큐메니컬 정신 함양과 또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 추기경님께서 적극적으로 노력해 오셨다”며 “우리 역사 현실 속에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려 했던 추기경님의 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와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기총 엄신형 대표회장도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최고령으로 선종하기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종교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였다”며 “지난 세기 요동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균형자로서 큰 스승이자 민주주의 발전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천주교는 물론이고, 개신교·불교에서 조차도 덕망 있는 종교지도자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활발한 에큐메니컬 활동 때문이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교회의 사회 참여 못지 않게 에큐메니컬 운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NCCK 권오성 총무는 그의 에큐메니컬 활동과 관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 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셨던 분”이라며 “개신교와의 대화 모임 등 종교간 대화 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권 총무는 “(김수환 추기경은)개신교를 넘어 타 종교와의 대화에도 큰 관심을 갖고 타 종교를 이해하려는 많은 노력들을 전개했다”며 “특히 종교인평화회의(KCRP)에선 어떤 직책을 맡으시진 않았어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며 종교간 대화의 물꼬를 트셨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 고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는 신자들 ⓒ베리타스

김 추기경의 이런 에큐메니컬 운동은 민주화 투쟁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가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던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는 “독재시절 유신체제에 반대했던 김 추기경은 당시 주교회의에서 유신체제 반대 결의가 나오지 않았던 것에 끝끝내 섭섭하게 생각하셨다”며 “그러나 그는 얼마 후 뜻있는 주교들과 힘을 모아 정의 평화 구현 사제단을 발족, 개신교와 힘을 합쳐 민주화 운동 전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고 전했다.

박형규 목사는 특히 김 추기경의 소탈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리기도 했다. 박 목사는 “당시 민주화 항쟁 때문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겼던 많은 학생들을 보호해 주셨죠”라고 김 추기경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다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찾아오신 분이 김 추기경이었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한평생 정의와 평화의 사도로서 불의 앞에 굴복하지 않고, 힘 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며 신앙의 양심을 불태운 김 추기경. 그런 추기경을 조문하러 밤 늦은 시각에도 조문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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