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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듣자 하니 그는 이북에 고향을 둔 부모 아래 청주에서 태어나 자란 모양이다. 이북 출신이거나 이북에 고향을 둔 부모 아래 자란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모종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나는 한때 이런 역사적 상흔을 비꼬면서 '삼팔따라지 콤플렉스'라고 명명하며 한없이 갑갑하게 생각했지만, 이후 많이 반성하여 그 가족사적 아픔을 공감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개중에 목사나 장로라고 하는 기독교 지도층 인사들이 평상시 멀쩡하다가도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뿜는 모습은 순순히 용납하기가 참 어려웠다. 내가 만난 좋은 목사들 중 미국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하신 이승만 목사님이나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박창환 목사님 등 몇 분은 자신의 선친이나 가족이 6.25 당시 인민군에게 죽창에 찔려 순교를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북한을 품고자 내내 노력하며 가족사적 상처를 민족 화해와 통합의 대승적 기치로 승화시키는 언행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극히 소수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라고 서글펐는지 모른다. 또 나머지 다수들 중 성자처럼 항간에 알려진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 주일설교에서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을 북한의 공산당이라고 알레고리적 해석의 직격탄을 날리는 걸 보고 아무리 신앙의 힘이 위대하고 그 힘으로 위대한 지도자인 양 추앙을 받아도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지독히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꾸준히 역사공부를 하여 근현대사의 지식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일제식민주의사관'과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망언을 일삼고 '삼팔따라지 콤플렉스'가 극대화된 개인사 내지 가족사적 트라우마의 망령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주변의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덩달아 이런 부류의 태생적 한계를 지닌 사람들은 혈통가족에 대한 경이스러운 애착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한데 자주 사돈에 팔촌의 인맥을 꿰뚫으며 '집안 사람'의 유대에 끈끈한 온정을 과시하곤 한다.
태생적 한계라는 것이 어디 이뿐이랴. 출신지역의 특수성, 사회경제적 계급과 각종 연고적 장벽, 자신의 전공자폐주의, 특히 가족주의적 인습의 지독한 끈끈함... 이 모든 구성분자들을 쥐어짜면 결국 DNA의 유전적 특수성으로 환원되겠지만, 이런 것을 극복해보자고 인간은 역사와 문화를 꾸준히 발전시켜온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태생적 한계에 안주하면서 그것을 유아기의 인큐베이터처럼 고마워할 줄만 알지 그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아니, 그 바깥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상상력조차 너무 빈곤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 멀리 탈주하기 위해, 숱한 번뇌와 방황을 무릅쓰고 마침내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도저한 모험과 순례의 궤도에 오른다.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부터, 아니 어쩌면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 태생적 한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나 아닌 타자, 고향 아닌 타향을 향해 떠나고 또다시 떠나는 자기 전복의 동력으로 여기까지 전승돼왔다.
성경 전체를 입체적으로 읽으면 그 기본 구도와 궤적이 꽤 명료하게 포착된다. 그런데 그 전승이 왜곡된 한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신앙의 사생아들이 요즘 너무 많다. 우리 역사의 불행한 경험 속에 강퍅해진 심성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너무' 많은 태생적 한계의 예속자들이 너무 자주 판 치는 꼴은 정말 봐주기 힘들다.
문창극 씨의 해프닝은 그런 모퉁잇길로 자가발전해온 인습의 연장선상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꾸게 된 흉몽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