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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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로마서 12:1의 유명한 이 요절에서 '영적 예배'로 번역된 희랍어 원문은 logikē latreia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해석의 관건은 'logikē'로 이 단어는 logos의 형용사형이다.
요한복음 1:1의 번역어에 익숙한 우리는 이 logos의 뜻이 '말씀'이라고 알고 있지만 당대에 더 보편적인 함의는 '이성'이었다. 플라톤 철학에서 스토아 철학으로 이어지는 로고스 개념의 진화 과정에서 그 공통분모는 우주만물의 구성 원리로서 '로고스=이성'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logikē란 형용사의 사전적 의미가 일차적으로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라고 적시된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를 좀더 세밀하게 풀어 '언어적 이성으로 소통 가능한, 그리하여 합리적으로 지각 가능한'이라고 해석하곤 했다.
그런데 사전에는 그 파생적인 의미로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번역어가 부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말 개역개정본 성경에 '영적인 예배'라고 번역한 근거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영적인'에 해당되는 희랍어는 pneuma의 형용사형인 pneumatikos로 알고 있다. 이 단어는 개역개정본 성경에서 경우에 따라 '신령한'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내 질문은 간단히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되었다: 1) 왜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란 뜻의 logikē라는 형용사에 그 개념 범주에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영적인'이라는 부가적인 함의가 포함된 것일까 2) 우리 말의 '영적인'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이성적인'이라는 개념과 대립되거나 이를 초월하는 것일 텐데, 왜 '영적인'이라고 번역하여 오해를 자초한 것일까.
1)에 대한 의문은 몇 년 전 Biblica라는 성서학술지에 발표된 베쯔(H. D. Betz)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풀렸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헬레니즘의 틀에서 유대교를 해석한 필론(Philo of Alexandria) 등의 문헌을 분석하면서 '영적'(pneumatikos)이라는 개념과 '합리적인'(logikos)이라는 개념이 대립적이기보다 호환 가능한 유사한 개념으로 통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에 앞서 쓰인 또 다른 논문에서 그는 로마서의 상기 문구를 '영적인 예배'가 아닌 '합리적인 종교'(reasonable religion)라고 번역함으로써 바울이 이 본문에서 기독교를 유대교나 이방종교와 구별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종교로 정의하고자 시도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바울 사도에게도 전이되어 이 두 어휘를 대척적인 문맥이 아닌 접속 가능한 문맥에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듀크 대학에서 샌더스(E. P. Sanders) 교수 밑에서 학위 논문을 쓴 유승원 박사(Seung Won Yu)는 이러한 주제를 '영감적 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라는 관점에서 자세하게 연구한 바 있다.
요컨대, 고대 1세기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살아간 이들의 인식론적 틀에 의하면 '합리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었고 '영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 특히 한국기독교 보수주의 전통의 자장 안에서 영적인 것은 초합리적이고 더러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합리적인 것은 반-영적인(anti-spiritual) 것인 양 선전된다. 특히 근대 합리주의 사조가 서구기독교 전통의 중세적인 체질에 철퇴를 가한 충격의 후유증에 여전히 경기 들린 반응을 하는 현실 가운데 '합리적인 종교'(여기서 '종교'[latreia]는 단순히 도그마의 체계나 예전의 틀에 맞춘 공적 예배가 아니라 경건의 요체로서 '섬김'의 총괄적인 범위를 아우른다)라고 번역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의 상기 문구는 우리에게 편리한 식의 '영적인 예배'로 둔갑하여 등장한 것이다. 그 개념의 밑바닥에 바울이 의도한 신학적 함의와 사상의 저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러나 정작 바울이 설파하고자 한 메시지의 요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적인 예배'의 감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그것은 동물의 희생제의로 죽은 제물을 드리는 그런 유의 제사와 구별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 곧 우리 몸의 생동하는 동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상의 삶 자체가 경건이 되고 섬김이 되며 헌신과 예배가 되는 그런 세계이다.
나아가 그러한 종교성이 합리적인 이성으로 소통 가능한 세계, 막무가내 식 억지나 권위주의적 억압이 아닌, 언어적 변론이 통하고 개방적 대화가 지속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이 이 짧은 두 단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