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6월 16일(월) 개최된 한국민중신학회의 월례세미나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관한 민중신학적 담론이 개진되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은 “애도, 기억, 저항: 세월호 ‘안의’ 민중신학”을 발표하면서 “사회적 고통에 무감하고 무관심한 전통신학은 ... 이미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지만]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책임 있게 참여하는 [민중]신학은 오히려 부상한다”고 전제한 뒤 “고통의 바다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에 메아리로 공명하며 참여하는 민중신학[적]” 성찰을 ‘애도,’ ‘기억,’ ‘저항’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제시했다. 본지는 정경일 원장의 발제문을 각 주제별로 3회에 걸쳐 전재한다.
“재난의 때에 말을 가진 자가 침묵하는 것은 내 백성을 다시 십자가 형틀에 매다는 것과 같다.” - 고정희
![]() |
|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정경일 원장 ⓒ베리타스 DB |
4·16 세월호 참사는 “한국전쟁과 맞먹는 상흔”을 남길 거라는 정혜신의 주장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희망의 한 조각처럼 수면 위로 떠 있던 파란 뱃머리를 무력하게 지켜보며 ‘희망고문’을 당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권력, 자본, 언론, 종교의 악을 목격하며 울화병이 다 생겼다. 불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고해(苦海)’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들리는 때가 또 있을까? 2014년 봄, 한국사회는 세월호와 함께 고통의 바다에 빠졌다.
고통의 바다에서 신학자는 비통한 심정으로 묻는다. “세월호 이후에 신학은 가능한가?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인간의 예의가 아닐까?” 사회적 고통에 무감하고 무관심한 전통신학은 불가능하다. 그런 신학은 이미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하지만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책임 있게 참여하는 신학은 오히려 부상한다. 한국 현대사 속의 민중신학이 그런 신학이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라고 했다. 고통받는 민중의 부르짖음은 시대를 달리하며 언제나 있어 왔다. 1970년대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광주시민’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 참혹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어 왔고, 민중신학은 그 절규에 침묵하지 않고 메아리로 응답해 왔다.
2014년 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부르짖음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크고 비통하게 들려오고 있다. 고통의 부르짖음은 세월호 안에서 아이들이 남긴 동영상과 ‘카톡’ 메시지로, 세월호 밖에서 유가족, 실종자 가족, 생존자 가족의 울부짖음으로, 가만히 있지 않고 분노하며 행동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계속 증폭되고 있다. 고통의 소리가 있는 한 메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호 이후의 시대, 민중신학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절실하게 필요하다. “재난의 때에 말을 가진” 민중신학은 침몰하지도 침묵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고통의 바다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에 메아리로 공명하며 참여하는 민중신학을 ‘애도,’ ‘기억,’ ‘저항’의 세 주제로 성찰해 본다.
애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세월호 이후 사회적 이슈가 된 것 중 하나가 ‘대통령의 눈물’이다. 참사가 있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울지도 않고 사과도 않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임계점을 넘겼을 때인 5월 19일,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며 비로소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가 흘린 눈물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는 부자연스러움이나 카메라 줌인으로 눈물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에 대한 일반적 지적도 있었지만, 그의 눈 깜박임까지 세밀하게 분석해 ‘눈물 연출’을 주장하는 동영상도 있었다. 그런 의혹과 불신에 합리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리 생산적인 논쟁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전에는 안 운다고 지탄하더니 이제는 운다고 비난한다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묻고 분석해야 할 것은 대통령의 눈물이 아니라 그의 삶이었다.
박 대통령의 눈물이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은 그가 희생자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어버이날’ 밤을 거리에서 지새우고 난 후에도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던 유가족들의 심정을 유경근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과연 우리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저는 공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어떠한 상황이고 마음인지 내 것으로 알고 공감할 때 진정한 처방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공감한다고 말하고 눈물도 흘려줬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눈물이 아니라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나누는 삶이 중요하다. 눈물의 진정성은 삶의 진정성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대통령의 눈물에서 그런 삶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눈물은 그의 변함없는 지지자들에게는 통했다. 지방선거 막바지에 위기를 느낀 새누리당 선거운동원들은 눈물 흘리는 박 대통령의 사진을 안고 “대통령을 구하자,”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며 호소했다. 그 ‘눈물의 정치’와 선동은 6·4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과 정부를 정치적 침몰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선동의 대열 중심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한국교회의 오래된 문제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 중 하나가 애도기능의 심각한 결손이다. 교회는 사회적 고통을 예방하기는커녕 희쟁자들을 위한 애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참사가 있은 나흘 뒤 부활주일 아침, 많은 교회의 목사들은 4·16 이전에—‘이후’가 아니었기를!—미리 준비한 부활의 메시지를 수정 없이 그대로 선포했고, 평신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물론 목사들과 평신도들 모두 부활 사건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해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호 이후 한국교회가 일으킨 종교적 스캔들은 한국교회가 애초부터 애도와 성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선포해 온 교회의 ‘적폐’에서 나온 애도의 무능이었다.
애도의 무능을 적폐라고 표현하는 것은 능력은 타고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훈련의 핵심은 ‘반복’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평소 사회적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면, 그들은 부활의 아침에도 지속되고 있었던 고통에 조금은 덜 당황하며 응답하고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위기관리/재난대응 매뉴얼도 잃어버리고 제대로 훈련도 하지 않았던 정부가 참사 앞에 우왕좌왕했던 것처럼,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채 안전한 방주로 존재해 왔던 교회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나마 수면 위로 떠 있던 뱃머리마저 물 밑으로 잠겨 버린 부활의 아침, 교회도 침몰해 버렸다.
그것이 교회 침몰 사태의 끝이 아니었다. 교회는 무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지막지했다. 처음에는 참사의 충격에 압도 되어 차마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교회 권력자들이 시간이 흐르자 하나 둘 입을 열어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부회장 조광작 목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의 아들이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을 “미개하다”고 비난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거들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하나님이 침몰하려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을 희생시키며 세월호를 침몰시켰다고 설교했다. 그 외에도 여러 대형교회 목사들이 앞다퉈 막말을 이어갔다. 자칭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그런 발언은 예외적이고 돌발적인 설화(舌禍)일까, 아니면 한국교회 주류의 실제 생각과 믿음을 대변한 것일까?
한국교회의 무지막지함은 근본적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희생자의 고통에 대한 무지가 그것이다. 교회 권력자들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지 않는다. 조광작 목사가 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백정”이라는 발언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울고자 하는 이가 희생자가 아니라 권력자임을 드러낸다. 김삼환 목사가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고 한 것이나 오정현 목사가 유가족을 되레 비난한 것도 모두 권력의 눈으로 사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직전인 2014년 6월 1일, 명성교회에서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 연합기도회〉에 초대받아 인사말을 한 이는 유가족 대표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성구를 인용하며 교회에 감사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대통령의 위로와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한국교회의 이런 행태는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발전과 성공주의의 탐욕을 종교적으로 지원하며 정당화해왔다. 김진호는 한국사회에서 발전지상주의가 제도화되는데 있어 교회의 책임이 있으며, “교회는 성공에 미친 사회를 추동하는 역사적 세력”이라고 비판한다. 조광작 목사가 문제의 발언을 한 한기총 ‘긴급’ 임원회의 안건도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경제활성화 대책에 부응하기 위한 전통시장 방문행사를 안산에서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탐욕의 경제가 세월호를 침몰시켰는데, 교회가 경제활성화의 지원자 역할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탐욕을 축복해주는 ‘탐욕의 사제’였다. 탐욕의 사제들이 탐욕이 죽인 희생자들을 애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권력과 자본과 동맹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들의 신정론theodicy과 관련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그리스도인들은 묻는다.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전능한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그것은 고통과 악의 현실에서 하느님theos의 의dike를 찾는 신정론의 오래 된 질문이다. 그런데 전통적 신정론의 목적은 ‘하느님을 변호하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전능함과 의로움이 부정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통적 신정론은 결국 고통과 악을 신적 의지와 계획의 일부로 설명한다. 문창극 총리 내정자가 일제강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김삼환 목사가 세월호 참사를 하느님이 주신 기회라고 한 것도 그런 전통적 신정론의 영향 때문이다. 전통적 신정론의 ‘악’은 희생자의 고통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세월호의 선장도 한국호의 선장도 일본 천황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필요한 역할을 한 것이 된다. 결국 희생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변호하느라 가해자인 악인을 변호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를 변호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대통령의 의’를 변호하는 것도 그런 신정론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하느님이 아니라 민중을 변호하고 편든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통에 침묵하는 하느님을 향한 항의도 피하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하느님의 전능보다 하느님의 전적인 선을 중시한다. 홀로코스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한국전쟁, 킬링필드, 5·18 광주학살, 르완다 대학살, 9·11 테러, 4·16 참사로 이어지는 극단적 폭력의 시대에 ‘전능한 하느님’은 ‘악한 하느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통과 악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선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이해는 ‘약한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위르겐 몰트만이 강조한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고, 민중신학이 발견한 ‘민중과 함께 고통받는 하느님’이다. 초기 민중신학자들에게 영감을 준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는 그런 약한 하느님을 약한 메시아 이해를 통해 보여준다. 예수는 민중과 함께, 민중의 하나로 고통을 겪는다. 예수가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예수를 구원한다. 민중이 스스로를, 그리고 하느님을 구원한다. 이런 민중신학적 신정론은 인정론anthropodicy이다.
악이 선을 드러낸다. 한국교회의 애도불능은 참된 애도가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참된 애도는 신학적 언어 이전의 인간적 울음이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생들이 지난 5월 8일 기습시위를 할 때 읽은 성명서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성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우는 자들을 ‘위해’ 울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함께’는 장소성이 아닌 관계성이다. 고통의 장소에서 희생자와 맺는 관계에 따라 우리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방관자가 될 수도 있고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 누가복음서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는 가해자였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방관자였고, 사마리아인은 구원자였다. 이 비유에서 예수가 묻는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누가 고통받는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이다. 세월호는 묻는다. 오늘 누가 희생자들의 이웃이 되어 함께 울고 있는가?
진정한 애도는 또한 고통받는 이의 마음으로 우는 것이다. 바울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권면에 이어서 그 ‘함께’를 ‘옆’이 아닌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가라고 한다.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로마서 12:16).” 우는 자와 같은 마음이 되라는 것이다. 우는 자의 마음으로 울라는 것이다. 우는 자의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은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를 따라 울게 하는 것은 ‘대통령의 눈물’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물’이다. 유가족의 눈물, 희생자들과 같은 또래 청소년들의 눈물, 멀리 있어 더 안타까워서 「뉴욕타임즈」 광고 운동을 하며 우는 해외동포의 눈물, 그렇게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우는 이들의 눈물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들의 눈물과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끼며 함께 우는 이들의 눈물이 같을 리 없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의 화학적 염도는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보이는 삶의 인간적 염도에는 비교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교회의 애도불능과 비교해보면 직접적 피해자인 유가족과 간접적 피해자인 시민사회가 보인 애도는 교회의 애도보다 더 종교적이었다. 그나마 있었던 종교적 애도의 메시지도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원초적 애도의 메시지에 비교하면 ‘각주’에 불과했다. 그들은 타자를 ‘위해’ 애도하는 것을 넘어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신체적 공감’의 애도를 나타낸다. 세월호 이후 시민들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웃다가도 울고, 기뻐하다가도 슬퍼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한없이 미안해했다. 그들은 유가족과 “한마음이” 되었다. 팽목항 자원봉사자들의 수칙에는 “우리는 가족”이라고 적혀 있었다. 불이(不二)의 애도였다. 한마음으로 함께 우는 시민들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감각한 정부의 행태에 분노하여 물었다. “이것이 국가인가?” 그들은 같은 이유로 실망하며 한국교회에 묻는다. “이것이 교회인가?”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에만 ‘세월호 이후’의 신학이 가능할 것이다.
2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