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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길위의신학] 공포 앞의 천연덕스러움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신약학)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오늘로 지난 열흘 간 진행되어온 1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종료된다. 헤아려보니 이번 축제기간에 도합 25편의 영화를 보았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미리 완료하고 가용 시간을 최대한 확보한 상태에서 거의 매일 치열하게 영화의 거리를 들락거렸다. 써포터스 라운지에서 안식처를 구한 것도 졸음을 버티면서 이렇게 끝까지 올해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전처럼 한 편씩 간략한 리뷰라도 써서 갈무리하는 열심은 못 살렸지만, 그때마다 해석의 영감은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스타일, 다양한 주제와 기술, 다양한 인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삶의 세계들이 다양한 국적과 언어의 영상 속에 투사되었다. 독립영화/예술영화 위주로 상영하는 전주국제영화제는 화려하지 않지만 이곳 영화의 거리만큼 오밀조밀한 디테일로 내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세계사의 지형 속에서 조망하고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내가 거대한 자본과 할리우드식의 오락 코드에서 자유로운 예술영화와 사귀며 친해진 계기는 유학시절 시카고대학 내 doc film theater에서 매주 한 차례씩 상영하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접하며 깊이 감화한 경험이었다. 매일, 매주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막막한 공부의 여정에서 그 건조한 일상을 달래주던 정서적 위안물로 레겐스타인 도서관 5층의 동양학 서고에 비치된 한국의 인문도서들(주로 문학서)의 독서 경험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것이 모국어에 대한 향수를 매개로 내 도피성이 되었다면, doc film과의 교감은 막막한 코스모폴리탄의 심연을 향한 모험의 발판이 되었다. 
 
이번에 동무들과 함께, 또 나 혼자 본 전주영화제의 작품들은 그 다양성의 회로를 거쳐 거대한 공포 앞에 선 자들의 천연덕스러움을 예술적 여유의 이름으로 현시한다. 그 공포는 자본의 체계와 역사의 구조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막막한 현실의 난해함과 관계의 실존적 모호함이 강제하는 우발성의 덫이기도 하다. 작품들은 소외된 개인 또는 집단의 고민과 갈등, 즐거움과 환상, 권태와 탈출, 도전과 투쟁, 낭만과 자폐, 자연과 문명, 생명과 인권, 착종된 욕망과 그 숙주로서의 신체, 죽음 등을 매개로 그 공포의 입자들을 역동적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캐릭터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든 그들은 한결같이 그 공포를 견디거나 달래고, 결정적인 순간 천연덕스러운 몸짓으로 그 마지막 임계점을 넘어간다. 세월호의 침수 공간에서도 위트 있는 언어들로 서로를 부추기며 공포의 순간을 견뎌나갔던 그 어린 학생들처럼 천연덕스러움은 어떤 치명적인 극단의 상황에서 위선과 위악의 경계를 돌파하는 최후의 자세가 된다. 그것이 곧 전혀 여유 없는 예술가의 현실적 삶의 자리에서 가장 고결한 예술적인 여유를 태동케 하는 하강초월의 분기점이다. 
 
이런 사연이 바로 오늘날처럼 각박하고 부박한 자본의 체계 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덤벼들지 않으면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방어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러한 벼랑 끝의 공포를 무릅쓰는 천연덕스러움이야말로 분요한 일상의 정수리를 뚫고 무한한 여유를 빚어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종교신화학자 엘리아데에 의하면 영화를 보는 경험은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신화적 체험의 공간이 된다. 컴컴한 극장 안에서 기술처리된 영상으로 들어가 몰두하다 보면 자의식은 한없이 풀어진다. 무의식의 긴장도 느슨해지고, 저절로 낯선 타인의 삶을 추체험하고 깊이 공감하는 가운데 일상의 리듬은 단절과 초월의 저편으로 월경한다. 
 
거기에 기기묘묘한 상상과 풍요한 해석이 덧대어지는 몽상의 후일담은 원초적 시간을 되살피면서 영화적 거듭남을 선사하기도 한다. 문학과 역사, 철학, 종교, 음악과 미술, 최첨단의 전자과학기술이 종합되어 빚어내는 영상예술을 인문학은 물론 신학이 더욱 친밀하게 영접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햇살 쨍쨍거리는 영화의 거리 오후, 이런 생각의 편린들을 공글리며 느리게 어슬렁거리다가 육중한 철기둥과 단단한 콘크리트 틈바구니에서 얼굴을 내민 초록 생명을 발견했다. 그 단촐한 이미지야말로 내가 이번 영화제의 한 가운데서 찾고자 한 바로 그 공포 앞의 천연덕스러움을 단 한순간의 롱 테이크 숏으로 구구절절 예언하고 있었다. 
 
이제 축제가 끝난 허전한 거리에 메마른 먼지가 날리리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헤벨'(헛됨)의 시간들이 즐비하게 종종거리며 지나갈 것이다. 그것을 이드거니 견디며 확 뒤집어 누릴 넉넉한 여유를 몸의 틈바구니에 잘 챙겼는가. 여전히 컴컴한 공포의 메두사가 출몰하는 이 죽음과 죽임의 시대에 내 삶의 표정은 얼마나 더 천연덕스러워질 수 있을까. 나는 그 바깥의 공포와 부대껴 내 속의 천연덕스러움이 싸워낸 토사물, 악취, 부패한 시신의 비루함까지 부둥켜 안고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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