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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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아마 이 시에서 영혼불멸설이라는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읽어내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시인조차 그걸 명징하게 의식했으랴 마는 아마도 그의 무의식 속엔 목련의 그 눈부신 흰빛은 불멸하는 생명의 엑기스로 반드시 하늘로 올라 영생해주어야 할 무엇으로 갈망되었으리라. 물론 그 꽃의 시든 육체는 땅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해진 운명의 코스였을 테지만 말이다.
이제 막 피어나는 목련의 저 화사한 빛깔을 잠시 감상하면서 내 상상의 한 가닥 촉수는 뜬금없이 이틀 전 본 영화 <노아>에 '감시자들'(Watchers)로 등장한 네피림의 이미지에 꽂힌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돌거족으로 변신한 네피림에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옷을 입혔다. 그래서 그 돌덩이에 갇힌 이 슬픈 족속의 영혼은 선한 투쟁이 마감되는 순간, 그 딱딱한 육체를 벗고 환한 빛으로 승천하여 영생불멸하는 구원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런데 정작 네피림의 기원을 설명하는 창세기 6:1-4의 이야기는 미완성의 토로소 같다. 홍수 이야기의 서장을 장식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을 취하여 아내 삼아 태어난 족속으로 등장한다. 그러면 이 지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인간 수명 단축 시책에 저항하고 영생불멸에 근접하기 위한 전략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유혹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머릿결과 그 미모에 반하여 그들을 신적인 권위로 강탈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아무런 답변도 없이 저자는 다만 그 네피림이 고대의 유명한 ‘용사’였다는 한 마디로 성급하게 이야기를 닫는다.
태생적 배경이 수상한 이 네피림 족속의 운명은 두 갈래의 해석적 진화를 보이며 역사 속에 전승되어갔다.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그들은 거인족으로 알려진 아낙 자손의 조상으로 자리매김되었다(민 13:33). 이후에도 그들은 이제 무기를 내려놓고 스올로 내려가 이집트 용사들과 무덤에 누운 과거의 전사로 회상된다(겔 32:27). 이러한 거인족 전승 가운데 네피림은 희랍어 gigantes로 번역되어 구약성서 칠십인역과 불가타 성서 속에 정착되었고, 사마리아 오경과 타굼(Targum) 문헌에도 이런 계통의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구약외경 에녹1서 6-19장에서 네피림들은 지상의 존재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늘로 그 존재의 기원을 확장해나간다. 아마도 이 말의 어근(npl)이 ‘떨어지다’ ‘추락하다’라는 의미를 내장한 것이 그 어원론적 빌미로 작용했을 것이다. 천사론과 마귀론의 풍성한 확장을 가능케 해준 이 문헌에서 네피림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천사들의 한 원형으로 변신한다. 일부 타굼 문헌(Targum Pseudo-Jonathan)에서도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언급된다.
사해문서에서도 이러한 전승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약간 후대에 신약성서 일부 저자들의 구어전승 또는 독서 경험에도 반영되어 그들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6; 벧후 2:4)의 계보 속에 꾸준히 회상되곤 했다. 여기에 추락한 ‘계명성’의 모티프와 루시퍼의 전설들이 후대에 침투하여 이른바 ‘마귀론’의 고전적 버전이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바울 역시 이러한 네피림의 대중적 전승에 연유한 듯한 영적인 후유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하늘의 천사들에게 다시 타락할 유혹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여성의 아름다움의 심볼인 머리카락을 덮어 가리는 베일을 ‘천사들로 인하여’ 쓰라고 강력하게 지시하기도 하였다(고전 11:10).
이러한 전승과 해석적 진화의 궤적과 달리 헬라신화의 세계에서 신적 존재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demi-gods)에 대한 대접은 관대하였다. 물론 그들의 세력이 막강하여 신들의 영역을 침해하는 게 성가셨던 까닭에, 주전 7세기 헤시오도스의 <여인열전> 등에 의하면, 헬라버전의 네피림들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않기 위한 조치로 제우스 신은 화급하게 이 땅의 인간들을 멸절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케네 왕의 딸이자 남편을 둔 유부녀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헤라클레스라는 반신반인을 낳은 당사자 아니었던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고,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네피림은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나 영웅적인 투쟁과 모험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그 운명이 다하는 날 하늘의 영롱한 별처럼 다시 신성의 자리에 등극하여 영생불멸하는 것처럼 항간에 믿어졌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처럼 헬라적 신화전통을 활용하여 성서 네피림의 비극적 운명을 돌이켜 패자부활전을 허락한다. 오르페우스 종교제의에 기원을 두고 피타고라스를 거쳐 플라톤의 단계에 틀을 잡게 된 ‘영혼불멸설’의 사상적 내용은 이와 같이 네피림의 희랍적 전통 속에서 자양분을 흡입한 증거가 상당하다. 물론 그것이 후대에 기독교 내세신앙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히브리서(11:13-16)에 나오는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모티프가 그 일례이다. 영혼이 선재하여 신성한 아버지의 땅에 살던 시절이 있었기에 다시 고통스런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그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불멸설'과 함께 플라톤적 영혼의 형이상학에 양대 기둥을 이루는 '영혼선재설'은 환생과 윤회라는 당대의 교리적인 시스템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상인간의 패자부활전을 넉넉하게 용인해왔다. 그 환생의 고비에서 영혼이 지상의 상처와 묵은 기억을 갱신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정화소의 전통은 가톨릭의 연옥 교리로 정착하여, 다소 느슨하게나마 패자부활전을 허락하고 있다. 물론 개신교는 여전히 강고하게 이 틈새를 꽁꽁 봉인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기준으로 영생과 영벌을 판가름한다고 믿고 여전히 꼬장꼬장한 구원론을 견지하고 있다.
목련의 흰빛을 보면서 네피림의 비극에 한 가닥 연민의 심정이 솟구친다. 애꿎은 해석사적 전승의 궤적 속에서 거인족 용사도 되었다가 타락한 천사의 자손으로 변신했다가 마귀의 원조세력처럼 굳게 믿어지게 된 그들의 운명을 비틀어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금세 지저분해지는 그 목련의 꽃잎이 아니라 흰빛의 불멸하는 기운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딱딱한 돌덩이 육신에서 그 환한 빛의 부활을 고대하며 이전에 므두셀라를 도운 착한 마음을 되살린다. 그리하여 다시 노아와 함께 방주를 만들고 생태선교적 구원의 사명을 거들게 된다. 그렇게 온 몸을 다해 죄악의 세력과 분투하다가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하는 그들은 혼종적 네피림의 재구성 그 자체다.
그런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에녹1서를 비롯하여 성서 안팎의 다양한 참고자료를 섭렵하고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작품을 폭넓게 읽으면서 이러한 종교사적 접속과 사상적 교통을 진지하게 분석했는지, 또 그의 예술가적 고뇌에 플라톤의 이분법적 인간 이해라는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구원의 비전을 충분히 용해시켰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작품 <노아>에는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비관적 염세주의와 희망어린 낙관주의,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 등의 익숙한 대립구도가 여전히 고전적 이분법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가적 고뇌를 충분히 공감하면서 언제 한 번 물어볼 기회가 생기면 물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