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영성순례기] 가락국수 없는 툴루즈 역 플랫폼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10)

 
▲툴루즈의 아침 골목 거리, 갓 구운 빵을 팔고 있다.
▲번개시장이 선 툴루즈의 아침, 신선한 야채와 과일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번개시장이 선 툴루즈의 아침, 신선한 야채와 과일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옛날 대전역[나의 고향은 대전] 플랫폼에는 가락국수를 판매하는 간이식당이 있었다. 강릉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당시 서울을 가려거나 부산을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릴 때, 대전역 플랫폼에서 꼭 가락국수 한 그릇을 먹는 것이 습관과 같았다. 추운 바람이 있고 구름이라도 잔뜩 있는 날이면 가락국수의 뜨거운 국물이 더욱 간절해진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기차들의 대전역[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 정차시간이 좀 여유로워, 승객들은 플랫폼에 내려, 국수 한 그릇 입으로 불며, 입천장 데이는 줄도 모르고 정겨운 시간을 즐긴다. 그렇게 가락국수로 나그네의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고, 시간이 되면 뿔뿔이 기차의 옆구리로 빨려 들어간다.
 
툴루즈Toulouse의 아침은 신선했다. 우리는 툴루즈 마타비유역에서 기차를 타고 드디어 ‘까미노-프랑스길’의 출발지로 목적한 생장피드포르로 향한다. 툴루즈 역 플랫폼에 가락국수 파는 곳은 없다.
 
전날 바르셀로나에서 툴루즈까지의 버스여행과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긴장, 점점 가까워오는 ‘까미노 걷기’에 대한 기대[설레임] 등이 복합되어 고단함이 많았다. 아들 세빈이는 기차 안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존다. 여행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였지만, 직접 현지에 도착하면 부딪히는 일들이 많다. 어제 버스를 타고 툴루즈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하룻밤 신세져야 할 툴루즈의 숙소를 찾는 일이 만만치 않다. 숙소의 주소를 택시 기사에게 내밀고 타면 제일 빠른 길이지만, 어지간한 거리는 걷기로 마음먹었으니 물어물어 가야 한다.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 말기에 오를레앙을 지켜낸 영웅이 되었지만, 후에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성녀 잔다르크 상이 툴루즈의 거리에 있다.
▲툴루즈 마타비유 역 전경, 중세의 성처럼 보인다.

툴루즈 버스터미널에서 나오니 방향 감각이 금세 사라진다.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하다.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의 노천 테이블에 짙은 화장과 과감한 악세사리로 멋을 낸, 두 명의 아가씨가 앉아 있다. 숙소의 주소를 불쑥 내밀었다. 곰곰 살피던 아가씨들이 설명을 시작한다. 불어다. 여긴 프랑스. 어제까지만 해도 스페인어였는데 귀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알아듣는 척, 못 알아듣는 척, 그들의 손짓에 대강 짐작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들의 얼굴을 보니 불콰하고, 과장스러운 몸짓과 흔들리는 눈빛이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오후 시간인데, 노천 탁자에서 제법 상당한 알코올을 즐긴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말을 신뢰해야할 지 망설여진다.
 
숙소를 찾기까지 길거리에서 열 차례 정도는 주소를 보여 주며 위치를 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숙소를 찾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되었다. 처음의 술 취한 아가씨들의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피레네 산맥에서 흘러와 툴루즈를 가로지르는 가론 강의 ‘다리를 건너고, 서너블럭 직진하면 잔다르크 동상이 있고, 좀 더 가면 Mc로 시작하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있는데 그 근처가 바로 숙소’라는 설명이었다. 그녀들의 안내가 없었다면 아마도 늦게까지 뜨거운 오후 태양빛 아래서 헤매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툴루즈역 구내에 있는 자동발권기, 예약한 번호와 예약시에 결제했던 IC칩 내장카드로만 발권이 가능하며, 승차권은 개찰구 앞에 있는 자동 개찰기에 넣어 확인을 해야 한다.
▲툴루즈역 개찰구 앞에서 나그네들이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살펴보고 있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다행인 것은 기차역이 터미널 맞은편이었기 때문에 다시 길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가는 길Camino 곳곳에 안내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계획을 세워 떠난 우리의 여정도 이렇게 어려운데,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난 아브라함의 ‘길’은 쉬웠을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 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히11:8) 
 
아브라함이 걸었던 ‘까미노’에도 수없이 많은 은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집을 떠나 이렇게 먼 곳에 이르러야만 ‘믿음’이 생기는 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끔 용돈 외의 특별 은총[돈]을 베풀면 입이 함지박만해지며 감사를 연발한다. 그것보다 더 큰 은총은, ‘너희들과 같이 있어 내가 함께 살아 주는 것이다. 요 녀석들아!’ 드디어 생장피드포르로 들어가기 전 역인, 바욘Bayon역으로 기차가 철커덩 소리를 내며 서서히 들어간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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