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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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내가 서울 관악구 봉천7동 언덕배기의 반지하방에서 자취하던 시절, 등하굣길에 꼭 시장골목을 통과해야 했다.
무심하게 지나칠 때가 많았겠지만 비가 오는 날 저녁이나 푸르딩딩한 새벽녘, 또는 소금기에 심장이 절어 청춘의 번뇌가 깊어질 때면 그 시장바닥 사람들의 바지런한 몸놀림과 은근한 끈기는 내 깡다구 지수를 높이면서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소량의 채소나 생선을 좌판에 벌려놓고 그들은 식사도 그 땅바닥에서 우직하게 해결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포즈로 생계를 챙기던 그 몸짓들에는 이따금 달관의 표정이 어룽거리기도 했다.
시장골목 한 구석에 내가 단골로 찾던 미장원집,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던 주인아줌마의 펑퍼짐한 중년기 몸매와 다소곳한 매너의 매혹적인 불균형은 희미한 추억으로 묻혀버린 지 오래다.
오늘 김장 부속물을 사기 위해 부모님과 오랜만에 남문시장을 찾았다. 실내의 점포를 가지지 못한 영세상인들이 전주천변에 길게 좌판을 벌려놓고 이른 아침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새벽기도 마치고 콩나물국밥 먹으러 몇 번 들른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 이렇게 광활하게 그 외연이 확장된 줄 몰랐다.
생선장수는 새벽부터 목포에서 올라와 진을 치고 있었고 농사꾼들은 무주 진안 장수 김제 등지로부터 제 밭에서 키운 농작물을 싸들고 와서 씩씩한 소리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생새우, 새우젖, 먹갈치, 미나리 등 김장에 넣을 것 외에도 아버지 몸보신용으로 대구 두 마리와 아내가 좋아하는 서리태 한 봉지를 샀다.
오늘 아침 모처럼 내 청춘의 활력을 돋구어주는 싱싱한 노천시장의 풍경에 다시금 은근한 감동의 소름이 돋았다. 세상살이의 좌절에 때로 죽고 싶을 때도 있지만, 시장바닥에 몸을 굴리며 '바닥'의 정서를 운명처럼 수락한 채 하루하루 꾸역꾸역 넘어가는 시장사람들의 살/삶 냄새 풍기는 아침,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살고 싶어지기도 한다.
죽지 못해 사는 삶도 있고 먹기 위해 사는 삶도 있지만, 아무런 형이상학적 대책이나 정치적 전략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사는 삶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은 권력기관에 빌붙어 높은 감투를 노리거나 세 치 혀의 뻔질난 농간으로 기만적 술수를 밥먹듯이 일삼는 허장성세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
이런 뜬금없는 배움의 현장에 '노천시장의 계시'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