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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준관 강연문] 세상에 희망을 여는 공동체

은준관·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자

- 한국교회 희망의 process-

 
서 론
 
1960년대 초 미국에서 폭발한 ‘학생파워’(student power),' 우먼파워‘(women power), '블랙파워’(black power)그리고 ‘히피’(hippie)운동은 200여 년을 쌓아온 이른바 미국 ‘백인 중산층 문화‘(white middle class culture)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거대한 문화혁명 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의 틈새를 타고 미국신학은 ‘세속신학’(Secular theology), '세속도시‘(Secular city) 그리고 ’신 죽음의 신학‘(The Death of God Theology)으로 swing 하면서 마치 새로운 ‘신학혁명’을 이루어내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분열, 저항 그리고 미국사회의 붕괴뿐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남은 자 하나를 두셨습니다. 그는 독일의 젊은 신학자, Jürgen Moltmann 박사였습니다. ‘희망의 신학’은 이 거대한 세속화의 흐름을 잠재우는 momentum으로 등장 했습니다(필자는 1968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 Chicago 외곽에 있는 Garrett 신학교에서 행한 Moltmann 박사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Moltmann박사께서 더욱 심화된 희망의 신학을 이 땅에서 선포하는 이 순간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지금도 오고 계시는 하나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십자가는 끝이 아닌 부활의 시작‘, 부활을 축하하며 동시에 ‘악을 선으로 이기는’ 희망의 호소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두렵고 떨림으로 영광스런 강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논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I. Twilight zone에 놓인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저는 지금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시편 137:1) 포로들의 마음으로 강연을 시작합니다.
 
A) Walbert Buhlmann이 한때 예찬했던 ‘제3교회’도, ‘태양이 지평에 떠오르기’도 전에 한국교회는 새벽과 햇살사이에 드리운 여명, twilight zone에 머믈면서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한 거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광야교회’(행7:38)와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성전‘(행 7:47-48)사이의 twilight zone에서 머뭇거리던 예루살렘교회를 향해 절규하던 스데반의 외침과 같습니다.
 
일정의 가혹한 핍박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내며 마지막 신앙을 지켜낸 초기 한국교회! 작고 가난 했지만 그것은 ‘광야교회’였습니다. 그 안에는 감사와 희망의 그루터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80년대 ‘세기의 기적’이라 불리운 한국교회 성장은 ‘성전화’로 기울면서 우리는 찬란한 기독교왕국(Christendom)을 예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20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는 ‘광야교회’와 ‘기독교왕국’ 사이에 드리운 twilight zone에 서서 길을 잃은 채 머뭇거리는 ‘폭풍전야의 배’(한 목회자의 고백)가 되어 버렸습니다.
 
B) 이때 동시대를 걸어온 한국사회는 그사이 GNP 2만 불을 훌쩍 넘기고, 세계경제 10위권 안에 진입하였으며, smart phone 판매율 세계 제 1위를 자랑하는 솔로몬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자살 세계 제2위, 5명중 2명은 우울증환자, 학교와 선생이 싫어서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이 여 75,000명을 넘나드는 우리 아이들의 말없는 ‘눈물’은 이 사회를 밑으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한국은 지금 경제왕국과 사회 붕괴 사이에 드리운 twilight zone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C)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크고 작은 사회의 아픔들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가 얼마 전 야심작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를 내놓았습니다. 이 연구지는 예상을 뒤엎고 기독교가 21.6% (l998)에서 22.5%로 (2012)오히려 성장 했다고 보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출석률’은 89.9% 까지 치솟았으며 ‘교회충성도’는 동반상승한 것으로 보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남아있는 마지막 그루터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목적’에서 빗나가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1998년 신앙의 이유를 ‘구원’에로 두었던 47%가 2012년 31.6%로 추락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재물, 건강, 축복, 마음의 평안’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신앙의 세속화’를 넘어 신앙의 이유를 ‘주술종교’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은 노래하지만 속으로는 값싼 희망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8시간마다 한명씩 자살이라는 마지막을 선택하고 있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의 생명조차 담아내지 못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 허상에 있습니다.
 
II. 한국기독교 신앙의 세속화! 그 원인은 ‘영적문맹’(Spiritual lliteracy)이었다 “

Protestant, Catholic, Jew"(1955)라는 고전은 1950년대 미국종교계의 충격이었습니다. 저자는 Will Herberg, 그는 유대인이면서 Drew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Turn to religion'(종교로의 회귀)에서 Herberg은 통계 하나를 소개 합니다. “1950년 당시 미국인의 95%가 종교인이었다. 그중에 개신교인이 68%,Catholic이 23%, Jew가 4%였다”(p.46) 전인구대비 68%를 차지한 당시 미국 개신교는 이 지상에 영원한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2043년, 지금으로부터 30년 뒤 미국개신교는 18%로 추락 할 것이라고 미국종교사회학계는 예고합니다. 전 인구 대비 50%의 신자를 잃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spiritual but not religious'의 부류들이 이미 교회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동시대 신학자, Hendrik Kraemer는 “A Theology of the Laity"(l958)를 내놓았습니다. Page 2를 몇 줄 인용 합니다. “지금 미국은 전례 없는 교회부흥시대에 돌입 하였다....나는 Will Herberg의 “Protestant, Catholic, Jew"를 인용한다. 1949년에서 1953년 사이 미국의 성경 보급률은 140% 증가하였다...연 평균 1.000만 권의 성경이 팔렸다. 그리고 미국 성인 4/5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믿었다.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러나 기독교인의 53%가 신약 복음서의 이름 하나도 답하지 못하였다.“
 
이 대목을 들어 Kraemer는 화려한 미국기독교는 지금 깊은 ‘영적문맹’(spiritual illiteracy)에 빠졌다고 꼬집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서서히 위기로 몰아가는 ‘신앙의 세속화’의 원인이 안티들의 악풀인가? 교회신뢰도 추락인가?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인가? 이것들은 현상에 불과 합니다. 오히려 그 원인은 그가 늙은이든 젊은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한국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세우지 못한 교회의 system과 목회 패러다임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오심과 인간 하나 하나의 응답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신앙의 통로를 누군가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신자 하나 하나를 ‘영적문맹’으로 묶어 두어 왔습니다. 신앙의 세속화는 영적 문맹으로부터 오고 있었습니다.
 
III. Being in becoming에서 풀어보는 -하나님 백성’(Laos tou Theou) 세움의 미학-
 
한국교회 미래를 두고 우리는 지금 피나는 몸부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도덕성 회복’에서, ‘구도자 예배’(일명 열린 예배)에서, ‘문화선교’에서, ‘영성운동’에서,‘ Cell, G12, 같은 ’소그룹 운동’에서 미래를 찾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시도들은 소중한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소 생소한, 그러나 중요한 기독교교육 방법론 하나를 해석의 틀로 삼고저 합니다. 그것은 20세기 3대 기독교 교육자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Lewis Sherrill의 being in becoming입니다.
 
한 자아(self)는 하나님의 오심(계시)과의 만남(being confronted by)에서 하나의 ‘존재’(being)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계시적 차원입니다. 그러나 being이 된 존재는 하나님 앞에 응답(response)하면서부터 한 자아는 becoming-존재화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응답적 차원입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being)이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becoming) being in becoming의 과정으로 정의됩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being in becoming의 해석학에서 풀이될 수 있을 것입니다.
 
A) 출애굽기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는 출애굽 이스라엘(exodus people)이 ‘하나님의 백성’(Laos touTheou)으로 태어나는 being의 순간 이었다면, 출애굽기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kingdom of priests)가 되며, '거룩한 백성'(holy nation)이 되리니...“는 하나님의 백성화-becoming로의 요청이었습니다.
 
여기서 Exodus people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Being in becoming의 종말론적 관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변증법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being이었으며,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한 becoming 될 수 있었기에 그것은 ‘종말론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being in becoming의 testing ground였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되는 이스라엘 여정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제사공동체’였으나, 그중에서도 ‘유월절’(passover; 민수기 9장, 28장)은 모든 제사의 climax였습니다.
 
저는 광야 한복판에서의 성막과 유월절의 의미에 또한 주목합니다. 성막과 유월절은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 기억’(historical remembrance)이라 합니다. 역사적 기억에서 그들은 광야 한복판에서 출애굽 사건을 ‘현재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감사와 소망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being)이 하나님 백성 되고(becoming)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유월절을 망각헸으며, 이스라엘의 being in becoming은 그때부터 단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은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being in becoming의 긴긴 종말론적 여정이며 또한 증언이었습니다. 
 
B) 요한복음 21:15 “네가...나를 사랑 하느냐?...주님 그러하나이다.”는 베드로가 주님의 제자로 다시 거듭나는 being의 순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15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제자화-becoming으로의 요청이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이 바울의 being의 고백이었다면,“...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고전15:10)는 becoming으로서의 응답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사도는 공히 being in becoming의 종말론적 여정을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벧전 2:10)이 된 교회 공동체 (being)는 ‘거룩한 나라’와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듭나야하는(becoming) 종말론적 요청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Being in becoming의 종말론적 process를 거치지 않는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 ‘팔레스타인교회’, ‘안디옥교회’ 그리고 ‘이방교회’는 지역과 표현은 달랐어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being)이었으며, 이 being은 하나님의 세우심과 보내심(becoming)에 응답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이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being in becoming의 testing ground 였습니다. 그들이 드린 ‘예배’(Leitourgia), 그들이 나눈 '주의 만찬‘(eucharist), 그들이 행한 '선포와 가르침‘(kerygma, didache), 그리고 '교제’(koinonia), '필요에 따라 재산을 나눔‘(diakonia)으로 표현된 교회의 사역은 한 가지, 성령 안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현재화’하는 역사적 기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억은 무한한 감사와 소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본질상 백성이 아니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metanoia) 새 존재(being)로의 인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과 역사 앞에 응답하는 becoming의 종말론적인 ‘장’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Moltmann박사와 Buhlmann신부가 호소하는 ‘부활을 축하하고,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희망의 공동체였습니다.
 
IV. 세상에 희망을 여는 공동체

-한국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꿈꾸며-
 
한국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논하기 앞서 저는 중요한 한 가지를 대전제로 삼고저 합니다. ‘예배’와 ‘가르침’ 그리고, ‘교제’와 ‘선교’라는 교회의 신앙체계는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될 수 없는 소중한 성서적 유산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4중 구조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종말론적 통로이며,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온전케 하는 교회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문화선교’, ‘소그룹 운동’, ‘영성 운동’, ‘열린 예배’의 이름으로 ‘예배-교육-교제-선교’로 이어지는 성서적 신앙 체계를 훼손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 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는 ‘예배’와 ‘교육’ 사이의 신앙의 끈을 오래전에 끊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교육과 교제 그리고 선교와의 내적 고리도 연쇄적으로 단절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 한국교회에는 ‘파편화’된 프로그램들만 즐비합니다. 한국 기독교신앙은 많은 상품 중에 하나만 선택하는 분열된 신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영적 문맹’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것, 저것 기웃거림 없이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예배, 가르침, 교제, 선교라는 성서적 신앙체계를 다시 들어 하나님의 오심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고 응답하는 종말론적 통로로 다시 신학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교육, 교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being in becoming으로 변화하는 ‘장’으로 회복 되어야 합니다.
 
A) 패러다임 전환 I:
 
한국교회의 ‘예배’는 ‘주일신학’에 근거한 ‘주일 공동예배’로 집약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은 일요일(Sunday)이 아니라 ‘주님의 날’(The Day of the Lord)임을 선언하는데서 주일신학은 시작 합니다. 죽음을 삼키시고 다시 사신 부활하심을 선포합니다. 그러기에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현재화하는 종말론적 시간입니다. 주일신학에 근거한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종말론적 사건이고 경험입니다(Alexander Schmemann, DonSaliers).
 
주일 공동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만나고 또 응답하는 종말론적 축제에 주체로서 초청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일 공동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대변하고 세상의 아픔까지 품는 제사장으로 결단합니다. 주일공동예배는 모든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being in becoming의 종말론적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B) 패러다임 전환 II: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갈 두 번째 단서는 ‘주일 공동예배’와 함께 신앙의 ‘축’인 ‘성서연구’의 회복입니다. 한국교회를 안으로부터 위협하는 악성 바이러스는 kerygma와 didache의 오랜 단절입니다. 신앙의 파편화는 여기서 시작되고, 하나님백성의 being in becoming은 끊어지고, ‘영적 문맹’은 그 속에 깊게 자리 잡아왔습니다.
 
주일 공동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또 응답이라면(confrontation /response) 성서연구는 성서를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순례하는 역사적-선교적 동행입니다. 주일공동예배와 성서연구를 한국교회신앙의 양대 ‘축’으로 과감히 신학화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두 ‘축’에 목회자의 생명을 걸 수만 있다면, 한국교회의 희망은 여기서 움틀 것입니다. 이 두‘축’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거룩한 두 channel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백성의 being in becoming은 여기서 이어 집니다.
 
C) 패러다임 전환 III:
 
한국교회 미래를 열어갈 세 번째 단서는 ‘교제’-koinonia를 ‘성례전적 koinonia'로 구조화 하는 데 있습니다. 성례전적 코이노니아(미국 동방교회)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지향합니다. 그 곳은 ‘하나님나라 교제를 나누며 동시에 세상의 아픔과 교차하는 space between으로 정의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서 ‘세움’과 ‘보냄’ 사이의 접속점에 놓입니다.
 
이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종말론적 통로’이며, 선교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전략적 frontier가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구역회’나 ‘속회’가 ecclesiola in ecclesia로서 다시 신학화되고, 재구성되는 때, 이 모임은 세상에 희망을 여는 공동체의 모형이 될 것입니다.
 
D) 패러다임 전환 IV:
 
선교(missio)와 섬김(diakonia)은 하나님의 백성이 역사와 사회속에서 being in becoming 되는 마지막 testing ground입니다. ‘주일 공동예배’가 하나의 행사가 아니듯이, ‘성서연구’가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듯이, ‘성례전적 코이노니아’가 하나의 친교모임이 아니듯이 ‘선교’와 ‘섬김’은 하나의 ‘행사’나 ‘봉사’가 아니어야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 표현되든 선교와 섬김은 하나님의 백성이 주체가 되어 역사 안에 구원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구원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선교’와 ‘섬김’은 주일공동예배, 성서연구, 성례전적 코이노니아의 집약된 ‘존재양식’으로 표현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또 하나의 testing ground에서 being in becoming으로 태어나며, 세상은 이들로 인해 희망의 sign을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E) 패러다임 전환 V:
 
미래목회는 목회자와 하나님의 백성이 공히 주체가 되여 하나님 앞에서 함께 순례하는 ‘주일 공동예배’, ‘성서연구’, ‘성례전적 교제’ 그리고 ‘선교’와 ‘섬김’의 공동사역을 디자인하는 예술입니다. 목회자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매개하는 거룩한 소명 앞에 부름 받은 것으로 족한 ‘구별된 종’입니다. 여기에 생명을 걸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걷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저는 오늘의 강연을 극히 소박한 예식순서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고저 합니다. 미국 Virginia주 서쪽 아파렛치안 산맥 한 기슭, 약 2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의 한 교회에서 행한 담임목사 취임예배였습니다. 부임하는 목사의 설교가 있기 전, 신임목사의 소개가 있었고 이어 회중과 목사 사이에 ‘언약의 순서’가 진행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Presentation of Signs", "징표의 presentation"이라는 순서였습니다. 
 
Anita Jackson: accept this Bible, and be among us as one who proclaims the Word, for the edification of believers and to conversion of the world. Amen(목사님, 이 성경을 받으십시오. 믿는 이들의 세움을 위하여, 세상의 회심을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우리와 함께 하십시오. 아멘)
 
Ed Pickett: take this water, be renewed in your baptism and renew us in ours. Amen(목사님 이 물을 받으십시오. 이 물로 목사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십시오. 아멘)
 
Carolina Jones: take this bread and wine, and keep us in communion with Christ and His Church. Amen(목사님, 이 빵과 포도주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안에 우리를 보존하십시오. 아멘)
 
Sherry von Oeyen: take this hymnal and book of worship to guide us in our prayer and praise. Amen(목사님, 이 예배서와 찬송가를 받으십시요. 그리고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도록 안내자가 되어 주십시요. 아멘)
 
Ed Smith: take this towel and basin, and to humbly serve others as Christ served. Amen(목사님, 이 물그릇과 수건을 받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섬기신 것처럼 우리로 타자를 겸손히 섬기게 하십시오. 아멘)
 
Luz de Tablan: this this stole and staff, and shepherd us as a pastor. Amen(목사님, 이 스톨과 지팡이를 받으십시오. 목자로서 우리를 목양 하십시오. 아멘)
 
Carolina Jones: take this map of Staunton and this globe, and lead us in our mission to our community and all the world. Amen(목사님, 이 도시 Staunton의 지도와 ‘지구체’를 받으십시오. 이 지역과 전 세계를 향한 선교에로 우리를 인도 하십시오. 아멘)
 
2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 한 때는 1000명에 근접했던 교회, 그리고 지금도 Food Pantry(무료식품제공) 사업과 가난한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열심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인은 7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안에는 희망도 생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being in becoming을 고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불과 2개월 반이 지난 지금 예배자는 111명으로 늘었고 20여 명이 성서연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9월 28일에는 Stauton의 노숙자, 소외된 자 300여 명을 초청하고 하늘의 교제를 나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에 출석하지않는 고등학생 수십 명이 봉사자로 참여한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잠재력은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 한 남은 자들, 긴긴 눈물과 고난의 여정을 지나온 그리스도인의 뜨거운 헌신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들을 ‘영적 문맹’에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한 사 람, 한 사람을 교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길고도 섬세한 being in becoming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희망, 그리고 미래’를 노래하고 또 꿈꾸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열어 갈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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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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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