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손규태 칼럼] 현대 스포츠의 윤리문제

손규태·성공회대 명예교수

 들어가는 말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젊어서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려거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라.” 이 말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어다. 20세를 전후해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또 돈방석에 올라앉을 수 있는 직업은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피겨 스케이트 선수 김연아, 수영선수 박태환, 골프선수 박세리, 요즘 리듬체조의 스타로 등장한 손연재 등은 젊은 나이에 이름을 날리고 돈도 꽤 벌어들이는 운동선수로서 모든 젊은이들이 부러워하고 꿈꾸는 스포츠계의 우상들이다. 그들은 정말 젊어서 유명해지고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젊어서 이름을 날리고 돈도 벌 수 있은 데는 고도의 성과를 올려야 하는 스포츠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 특히 신체에 대한 과도한 훈련과 함께 때로는 신체 조작과 상업화라는 스포츠계가 안고 있는 모순들도 내재한다. 이러한 스포츠의 상업화와 신체에 대한 조작은 몇몇 종목들의 경우에서는 이미 극에 달한 느낌마저 든다. 선수들이 과도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약물을 투입하는 일이나 유명선수들이 천문학적 숫자의 돈에 팔려 다니는 현상 그리고 과도한 스포츠 용구의 광고판매는 그 스포츠 자체가 지향하던 아마추어 정신의 존재와 의의를 망각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뿐이 아니다. 또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은 이미 과거서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저 유명한 로마의 네로 황제의 “독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가끔 군중들을 검투장으로 데려가라.”는 말에서 보듯이 정치적 권력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스포츠를 자기들의 독재권력 행사와 그 연장수단으로 사용했었다. 독재자들은 정치적 위기를 스포츠 경기의 장려나 특출한 운동선수의 등장을 이용해서 극복한 예는 많다. 독재자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한 스포츠 가운데 김일선수가 주도했던 프로 레슬링은 정치적 억압에 찌든 대중들을 위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었고, 당시 유행하던 세계프로 권투시합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국가에 의해서 영웅이 되어서 카퍼레이드까지 벌리면서 귀환하는 모습을 우리는 TV 중계를 통해서 방영했었다. 근래에 우리나라 도시마다 지어진 거대한 축구장이나 야구장 등은 당시 독재정권들이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대표적 예들이다.
 
오늘날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올림픽경기나 월드컵경기 등에서도 국가 간의 과도한 유치경쟁에서 정치적 압력이나 금품이 오가는 부패로 얼룩져 있다. 한국에서 거행되었던 1988년 올림픽이나 2002년 월드컵도 이러한 뒷거래와 추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위기에 처했던 군사독재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스포츠관계자들과 경제인들을 총 동원하여 올림픽을 따내는데 성공했었다. 오늘날도 이러한 거대 국제스포츠 행사를 위해서 정부는 막대한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고 이 과정에서 스포츠계는 타락한 복마전이 되었다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스포츠는 정치만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계도 스포츠를 이용한다. 그들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국민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팀들을 창단하고 운영한다. 한국에서 그 대표적 예들은 프로야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팀들은 각기 거대한 동물의 이름들을 이용하지만 그 앞뒤에는 기업들의 이름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이미지와 상품광고에 열을 올린다. 그뿐인가! 거대기업가들은 무엇보다도 국제 스포츠 경기들을 지원하면서 그 상표를 손쉽게 선전한다. 나아가서 대기업의 총수들은 올림픽 위원이나 세계축구연맹의 임원이 되어 그 명성을 과시하거나 그것을 기업운영에 이용한다. 삼성의 이건희가 올림픽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나 정몽준이 세계축구연맹에서 활동하는 것 등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렇게 한국의 현실을 바라볼 때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과 과도한 상업화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스포츠의 정치화와 상업화는 대중매체들 특히 TV와 스포츠신문들을 통해서 더욱 심각한 사회적 도덕적 문제들을 야기 시키고 있다. 필자는 스포츠가 가지는 문화적 사회적 현상들을 분석하고 윤리적 측면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역사적 회고
 
특정한 목적 없이 신체운동을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문화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투우놀이나 중세기 기사들의 투창놀이 그리고 고대 중국의 무술과 몽고인들의 씨름 등에서 우리는 그 대표적 예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체놀이는 고등문화권에서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공통의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운동은 뭐니 뭐니 해도 헬라 문화권에서 체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의 영향을 맏은 팔레스타인에서도 안티오커스 시대에 스포츠가 크게 장려되었었다. 수많은 유대청년들이 전통적 종교규범을 벗어버리고 이방문화의 산물인 운동놀이에 열중했었다. 젊은 남자들은 알몸으로 운동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할례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했고 젊은 여성들은 부모들의 말류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를 관람하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한다.
 
중세기는 기독교문명이 지배하던 시기였으므로 자유분방한 헬레니즘권의 운동놀이는 크게 후퇴했었다. 그래도 궁중의 기사계급의 등장과 더불어 이들에 의한 놀이문화가 다양하게 발전되었었다. 로마제국 내에서 실시되던 검투사들의 칼싸움이나 혹은 동물과 사람 사이의 싸움도 교회에 의해서 금지되었다. 르네상스와 그리스 정신이 유럽 문명권을 새롭게 형성했으나 계몽주의 등을 거치면서도 놀이로서의 운동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었다. 계몽주의는 신체적 운동보다는 정신적 운동에 더 역점을 두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신체운동은 다시금 교육학적 의도와 결합되면서 학교교육에서 하나의 중요한 학과목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체조 등과 함께, 김나스틱 스포츠, 올림픽운동과 같은 신체운동들이 본격적으로 틀을 잡아갔었다. 19세기 초에는 힘든 체조종목들이 맨손체조와 같은 비교적 힘 안들이고 하는 운동들을 위축시켰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의 산업화와 더불어 노동에 대한 보상과 기분전환의 가능성들을 추구하는 방양에서 스포츠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강한 경쟁보다는 스포츠가 위안과 재미, 사교와 기쁨을 주는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특히 축구, 배구, 야구, 테니스 등 공놀이가 크게 발전한다.
 
스포츠는 또한 학교교육 프로그램과 관련되어 교육적 목표들을 수행하는 한편 연맹이나 클럽으로 조직되어 수많은 형태의 모습들을 취하게 된다. 1896년 아테네에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구베르텡은 이것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이상들을 제시해 주려고 했었다. 스포츠의 목표로서 제시된 것들을 보면 건강증진, 개인적. 사회적 덕성의 함양, 신체와 정신 사이의 조화, 미학적 훈련 및 자연스러움을 위한 교육 등이었다. 스포츠가 갖는 교육적 효과가 점차 분명히 밝혀짐으로써 스포츠과목들이 교육과정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럽의 경우 19세기 말부터는 그밖에도 클럽을 중심으로 한 스포츠도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스포츠에 있어서 목표설정들이 늘 변해갔다는 사실이다. 주로 교육적이거나 의료적 입장에서 제시되던 스포츠에 대한 논거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에 의해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있었던 민족주의의 강화의 수단으로 스포츠가 이용되었다든지 또는 독일의 경우 나치정권하에서 스포츠가 군사적 목적에 따라 장려된 것들이 그 대표적 예라 할 것이다. 나치 당시 스포츠가 청소년들의 신체연마를 통해서 침략전쟁을 용이하게 하는 수단으로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원족(遠足=Wanderung)이 군인들의 행군준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국민 스포츠란 이름으로 스포츠가 정치적, 군사적 목표에 오용된 것은 흔히 있어온 일이다.
 
스포츠의 사회적 구조들
 
스포츠를 정의하는 일은 그것이 갖는 의미의 다양성과 복합적 개념영역으로 인해서 용이하지 않다. 그러므로 정의를 내리는 대신 스포츠가 갖는 목적들과 과제들을 서술하거나 또는 그것들의 종류들이 자라나온 조직형식들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또 전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꾸어져 온 기능들을 살피며 그것들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연관성들을 밝히는 일을 흔히 해 오고 있다. 따라서 스포츠는 우리가 한마디로 그 본질을 정의내릴 수 없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체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스포츠의 개별적 동기들, 사회적 기능들, 그리고 문화적 의미들은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스포츠는 긴장을 푸는 기능도 갖고 있으나 고도의 성과를 요청하는 분야도 갖는다. 스포츠는 개인의 능력과 함께 사회적 책임성의 영역도 갖는다. 그것이 갖는 효과들과 매력 때문에 다양한 연령층과 계층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적 현상으로서 또 문화적 삶의 일부로서 기능하고 있다.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상징적 가치들을 위해서 헌신한다. 운동을 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일’(노동)과 무관하게 하는 하나의 행위로서 에너지를 방출하지만 어떤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법과 규칙을 지킨다. 따라서 공정한 태도야말로 파트너십, 상대방에 대한 존중, 기회균등, 팀 정신 등과 함께 스포츠의 기본가치들을 형성한다. 규칙위반은 스포츠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틸리케(Helmut Thielicke)에 따르면 스포츠는 인간 실존 전체에서의 기능을 묻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뭔가 저항할 수 없는 힘 때문에 스포츠를 하게 된다. 스포츠는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것의 일부다.”라고 했다.
 
따라서 스포츠는 특정한 목적과 결부되어서는 안 되지만 전혀 성과를 무시하는 자기발현만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물론 훈징거(Hunzinger) 식의 발상에 따라서 오락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차원에서 스포츠의 기능을 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하게 대두되는 것도 사실이다. 1950년대의 유명한 스포츠 이론가로서 칼 디엠(Karl Diem) 같은 이는 강력하게 스포츠의 비목적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스포츠는 놀이라는 커다란 삶의 영역에서 나온 현상이다. 놀이는 그 자체로서 노동과 다른 특정 목적을 갖지 않은 행동이다.” 이러한 딤의 입장은 스포츠의 직업화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에 의하면 직업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며 그와는 반대로 상행위라고 했다. 순수한 스포츠만이 일상생활에서의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1960년대에 네오 마르크시스트 이론가들은 직업적 스포츠를 ‘소외된 노동’(entfremdete Arbeit)으로 규정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나 리가우 등 비판이론가들은 스포츠가 지배체제에의 적응 및 일치를 강요하며 운동선수들이 강요된 규율에 적응함으로써 그들은 관중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의 실패들과 불만들을 대리적인 군중경험과 영웅숭배를 통해서 얼버무려 나가려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특히 국민스포츠나 사회스포츠분야에서 보다는 높은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직업운동선수들에게 향한 비판이다.
 
스포츠는 그 본질상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또는 직업적이건 아마추어적이건 일정한 성과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스포츠에 있어서 성과원리는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원리지 꼭 스포츠에만 유래한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를 꼭 성공과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성과가 성공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성과를 꼭 성공과 결부시킨다고 할 때 그 본래의 정신은 퇴색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스포츠가 갖는 자체로서의 기쁨이나 신체적 건강의 영역이 전혀 무시되고 보상 특히 금전적 보상만을 궁극적 목표로 할 때 그것은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스포츠가 음악, 미술, 시작(詩作), 철학과 같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놀이의 영역, 목적 지향적이 아닌 바로 그래서 의미가 있는 행동영역에 넣어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고도의 업적을 올려야 하는 스포츠는 뭔가 노동세계에 포함시킬 수 없는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경쟁이 극심한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나 또는 그것을 위한 피나는 노력들은 사실 스포츠 자체가 갖는 기쁨을 주는 것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가 많다. 따라서 스포츠에 있어서 성과의 의미는 개개인의 자기 노력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업적을 향한 노력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스포츠에 있어서 성과원리가 갖는 교육적 의미는 성과가 가능성에로의 길과 그 가능성 의식의 두 배가 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개인이나 집단으로서 개개인의 가지 실현의 기회며, 기쁨과 행복, 긴장해소와 자기강화의 길이다. 스포츠 교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과에 대한 강제 없이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음악과 함께 고도의 성과가 요청되고 이것은 곧 물질적 보상에 예속되는 현상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성과주의는 최고의 성과만을 인정해 줌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깊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모순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스포츠 특히 성과를 요구하는 스포츠에 대한 정치적 이용을 목적으로 하고 왜곡되게 배정되는 공공예산과도 관련된다. 여기에서 오늘날 스포츠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스포츠의 사회 윤리적 측면
 
스포츠는 매우 다양한 얼굴들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한 가지 이론에 따라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무시간적 놀이인가 아니면 근대적 산물인가, 또는 목적 지향적인가 아니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어떤 강제인가 등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스포츠가 사회적 소외의 표현인가 아니면 해방적 진보인가도 묻게 된다. 스포츠는 산업혁명이 빚어낸 결과인가 아니면 그것과는 대립되는 어떤 것인가? 
 
플레스너(Plessner)에 따르면 스포츠는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보다 더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스포츠와 사회는 사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고 또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스포츠의 발전에 있어서 특성들과 경향은 사회적 형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스포츠는 그것이 속해 있는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제도와 연관되어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정치적 불안기에 새마을 스포츠란 것이 지향한 정치통합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이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자 이 운동은 사회 스포츠란 이름으로 동일한 기능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다고 보이는 것은 정치적 권력과 재벌 및 매스미디어 3자에 의해서 조정되고 있는 프로야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매스미디어는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과다한 연예프로그램과 함께 스포츠 중계는 세계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편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한 스포츠부의 신설과 막대한 예산의 투입이 있은 2000년대부터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선수들이 엄청난 물질적 보상에 스포츠가 갖는 본래적 정신은 망각되고 금메달과 우승을 향한 엄청난 무리수가 스포츠에 대한 부도덕성과 환멸을 가져오게 되었다.
 
최근 스포츠가 역사에서 어떻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는가를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는 동서냉전 체제가 스포츠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를 잘 보여주었었다. 스포츠의 정치화는 운동경기를 스포츠와는 전혀 무관한 정치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수단들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는 스포츠에서 성과를 올린 인간은 점차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성과만이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간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개개 선수들의 금욕적 자세와 자기 극복의 정신은 성과를 올리겠다는 자세들을 통해서 신체적 경계선들을 넘어보겠다는 노력들도 인해서 상업적 이해관계에 그 본래의 정신이 매몰되어버렸다.
 
특히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는 제3세계 국가들이 스포츠에 퍼붓는 막대한 예산은 대체로는 민족적 동일성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안정의 수단으로서 이해되고 추구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주택, 서민복지 등 위생시설이 대단히 낙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운동경기장들이 건설되었고 지금도 인천이나 광주 등 부채가 산더미 같은데도 국제경기의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직도 스포츠가 정치적 수단으로서 유용한 도구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스포츠정책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자체에서도 인간다움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지향하는 스포츠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다 같이 체력을 향상시켜서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에서 도모되어야 한다. 특정 기업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특정한 계층만이 참여할 수 있는 값비싼 운동시설이나 운동종목을 장려하는 것은 국가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 한국에서 특수계층의 스포츠인 골프장의 과도한 난립은 자연파괴와 공해발생과 더불어 일반 서민들과 농촌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 놀이가 국민들 사이의 거리를 오히려 이완시켜서 현 집권세력들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한 여론조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경제적 세력들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시민들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스포츠는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이것은 국민들의 건강증진이나 민족적 통일성을 찾는 데도 꼭 필요하다. 따라서 과도한 정치적 목적을 배제한 지방 자치적 차원에서의 클럽 단위의 스포츠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정치에서 지방자치화와 더불어 지역중심으로 자발적 참여정신이 그 주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관제 스포츠나 특정한 경제적 목표추구가 선두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산업사회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고 또 인구이동이 극심한 도시생활에서 스포츠를 통해서 사람들은 소속감을 형성해 가는 일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될 때 스포츠는 현대사회에서 생물학적, 교육적,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 말
 
스포츠는 사회 정책적 해방적 구성요소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사람들을 억압과 의존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특히 클럽 등을 통한 스포츠는 운영과 관련해서 민주적 훈련을 쌓고 다른 사람들과 팀 정신을 쌓아 연대적 인간상을 육성ㄷ해 나가는 엄청난 교육적 효과도 거두게 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1. 스포츠의 과도한 정치화가 극복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주민 중심의 클럽을 통한 스포츠가 장려되어야 한다.
 
2. 스포츠의 과도한 상업화가 지양되어야 한다. 스포츠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때 여기서는 팀 정신 등 연대적 인간상은 사라지고 경쟁과 대결의식만 남게 된다.
 
3. 스포츠에서 과도한 신체적 조작이 극복되어야 한다. 스포츠의 상업화와 함께 업적주의에 사로잡힌 선수들의 약물투여 등 신체에 대한 과도한 조작은 스포츠맨의 신체를 의학적으로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다.
 
4. 스포츠의 사회화가 요청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포츠의 사회화는 어떤 정치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민간운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정부나 공동단체는 재원들을 골프장과 같은 특정 계층만을 위해 투여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공공 스포츠 시설의 건설이 요청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와 병행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는 스포츠의 민주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화는 국민들 모두의 삶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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