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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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혹자는 성경과 삶을 대립시키면서 삶이 없는 성경의 박제화에 분노한다. 또 다른 이는 학문과 삶을 경쟁시키면서 삶이 빠진 학문의 관념적 공허함에 격한 감정을 토로한다. 우리의 이론과 담론과 공부와 사상에는 도통 ‘삶’이 없고 그것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는 식의 논조를 자주 접한다.
‘삶’과 짝을 이루며 그 못지않게 뜨거운 단어가 ‘현장’이다. 관료들이 현장감 없이 탁상공론을 일삼고 있다는 얘기가 툭하면 불거진다. 선교의 '현장'에 대한 충분한 체험적 인식이 없이 선교를 떠든다는 타박도 종종 들려온다. 일자리 창출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인데 실물경제 현장의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모른 채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고 경기도지사가 오늘 조간신문의 특별기고에서 일갈했다. 우리가 발디디고 사는 이 땅의 삶의 자리가 곧 현장인데, 뻐기며 으스대는 현장과 욕 얻어 먹는 현장이 따로 있는 듯하다.
이처럼 ‘삶’과 ‘현장’ 코드로 무장한 강고한 신념체계를 ‘삶과현장만능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 어휘에 그토록 집착하며 비판과 맹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배경을 숙고해본다. 아마 자신이 생각하는 특정한 현실이 기대치의 삶의 진정성과 질적인 밀도에 못 미칠 때 ‘삶’을 표나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 여타의 현실이 제가 경험하는 삶의 치열함과 절박함에 부응하는 관심사를 보이지 못할 때, 그 ‘여타’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을 향해 현장감이 없다는 불만을 쉬 토로하게 된다.
결국 자기 집중적인 삶의 관심사나 삶의 특정 부분에 대한 집착적 헌신이 거기에 미달되는 다른 종류와 내용의 삶에 대해 ‘삶의 부재’를 타박하는 요인이 된다. 현장감각의 결여 역시 꼭 따라붙는 보조 수사이다.
그러나 과연 삶이 그렇게 파편화된 채 자기 중심으로 일방 통행하는 품목일까. 무수한 삶의 징검다리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란 게 역사주의의 맹목을 넘어선 자리에서 보면 그렇게 막연한 배제의 이데올로기만으로 정당화되지 못하는 광활한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여전히 세속의 삶은 난장이고 만화경 아닌가. 성자의 길이 수놓는 거룩한 삶의 자리라는 것도 밑구멍까지 파헤쳐보면 총체적 욕망의 허구렁 아니던가.
가령 대한민국 서울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촛불시위를 주동하고 동참하는 주체적 개인들의 뜨거운 삶이 있다면, 그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 다소 성찰의 거리를 두고 취재하는 직업기자의 삶이 있을 터이고, 그렇게 취재한 내용이 보도된 언론의 면면들을 읽고 생각하면서 공명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외지의 다양한 독자들의 삶의 현장이 있을 터이다. 물론 수수방관하거나 이를 마뜩찮게 여기며 욕하는 이들의 삶도 그 부피와 내용에서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삶을 직간접으로 체험하고 수렴해야 하는 학문의 장에서 이론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실천적으로 삶을 경영하는 사람의 삶보다 열등하거나 열악한 것은 아니다. 지식노동을 하는 사람을 흔히 머리에 먹물 든 사람이라 부르고 온 몸으로 뜨겁게 삶의 전위를 개척하는 이들과 비교하여 쉽게 비판하는 것이 항간의 세태이지만 ‘머리’도 ‘몸’의 일부라는 사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다. (기실 머리는 온몸을 조종하는 핵심 부위 아닌가.) 거기에는 관념도 밥을 먹어야 작동된다는 그 철저한 물질성의 논리에 대한 심각한 숙고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른바 ‘삶과현장만능주의’의 이념 가운데는 하나의 삶이 또 다른 삶을 매개하고 하나의 현장이 또 다른 현장을 추동하며 굴러가는 변증법적 상상력이 경직되기 일쑤다.
뜨거운 삶은 서늘한 삶을 달구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투쟁하는 절박한 삶은 태만한 삶을 성찰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삶이 뜨거운 삶이고 절박한 삶이라면 그 절정에서 그 뜨거움을 풀어주고 절박함을 달래주는 역할은 어떤 종류의 삶이 감당해줄 수 있을 터인가. 24시간 뜨거운 태양만이 환하게 내리쬔다면 이 땅의 생명들이 어떻게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모든 종류의 삶에 오케이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가치가 있고 내가 중시하는 신념의 알짬과 까탈스런 삶의 자리가 있다. 내가 아름답게 보는 문체와 어투와 이미지가 있고 내가 경멸하고 멀리하는 그런 것들도 많다. 그러나 ‘삶’이란 미명 아래 은근히 배제의 폭력이 우리의 상상력을 죽이는 건 아닌지 가끔 반성해본다. 나도 ‘삶’이란 말을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지만, 가끔 이런 역발상의 성찰 아래 이 말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기피할 때가 있다. 나 역시 ‘현장’이란 말의 생동감을 우러러보고 이런 쪽의 전위에 서서 헌신적 삶을 보이는 분들에게 존경을 표할 수 있어도 그것이 다른 현장에 대한 사팔뜨기 시선을 은근히 강요한다면 괜스레 불편해진다.
오래 전 <체험 삶의 현장>이란 프로를 가끔 본 적이 있다. 조영남이 사회 보던 그 프로 말이다. 사회의 유명 인사들이 거친 육체노동의 현장을 찾아 하루 함께 일하면서 공감하고 얻은 돈을 기부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연출된 삶의 진정성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좀 널널하게 생각해본다. 내가 한때 즐겨 본 <6시 내 고향>에서 방송기자들이 농어촌을 찾아가 그들의 소박하고 즐거운 생활상을 연출하는 것에 식상해질 때가 있었다. 현실 왜곡의 문제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연출에 참여한 농어민들과 기자, 그것을 촬영하고 각색, 편집한 자막 뒤의 방송노동자들의 직업적 삶을 가끔 생각하며 봐준다. 그 생각이 약간 공상의 날개를 달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삶에 참여하는 연극적 자아들의 몸짓이 환영(幻影) 가운데 보이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언젠가 ‘자신은 영화보다 제 삶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가 본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삶과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삶, 나아가 그가 수많은 시간을 투여하며 영화를 보고 평론을 쓰는 영화적 삶의 이면을 생각했다. 그리고 저 말의 논리적 허방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가 영화와 별도로 살고 있는 일상 속에 수많은 삶의 지층들이 숨겨져 있다는 걸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비판하는 대상이 나를 어떻게 비판할까를 상상하며 글을 쓴다. 그것이 혹여 내게 심히 못마땅한 지적 노동의 삶일망정 내가 부인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영역을 제 나름의 ‘현장’에서 일구고 있다는 걸 알고 애써 존중하려 들기 때문이다.
삶과 현장이란 말은 우리 시대의 모종의 사회심리적 강박증 속에 가끔 우상화되는 위험을 노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