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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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갈라디아서를 마무리지으면서 사도 바울은 뜬금없이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했다. '더이상 나를 괴롭게 말라'고 단호한 명령도 덧붙였다.
여기서 바울은 '흔적'에 해당되는 희랍어로 'stigma'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오늘날도 영어로 음역되어 통용되는데 희랍어 '스티그마'는 대강 다음 몇가지 함의를 내포한다.
첫째는 '문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사연은 다양한데 거기에는 상징적 이미지가 주종을 이룬다.
둘째는 '낙인'이란 뜻이 있다. 소나 말에 불인두로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려 찍는 그런 낙인 말이다.
이런 어휘 분석에 근거하여 일각에서는 바울이 당시 그리스도인들과 신앙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무슨 암호 같은 표식을 몸에 문신처럼 새기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론한다. 실제 로마의 카타콤 등에 남아 있는 물고기 문양은 그 희랍어 ichthus의 알파벳 암호로써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표상했다. 이런 종류의 암호가 당시 신자들 몸의 은밀한 부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을까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흔적'을 '낙인'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예수의 노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에게 온전히 속한 사실에 두고 이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혹자는 중세기 성 프란시스코의 전설에 기대어 바울에게도 예수의 십자가 못자국 혈흔이 그의 해당 신체 부위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타났을지 모른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상상과 전설과 막연한 추정을 넘어 좀더 개연성 있는 '예수의 흔적'의 내포적 함의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 가운데 바울의 몸이 겪어낸 일종의 상처, 그 상처가 아물어 생긴 상흔 곧 흉터였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또다른 편지 고린도후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를 언급하고 다른 관련 자료들은 그의 몸이 가혹한 매질과 돌팔매질 등의 신체폭력을 견뎌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대개 그 둘은 병존하지만) 사람이 상처를 다스리거나 견뎌내는 방식은 다음 몇 가지다.
삶의 동물성에 의존할 때 많은 이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 가해자 또는 제3의 피해자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보복적인 방식으로 그 후유증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 본능이 파괴적인 것이라면 제 상처의 경험을 과장하여 반복적으로 떠벌이는 소극적인 방식도 있다. 타인의 동정에 호소하는 자기 연민의 해법인 셈이다.
이런 것들보다 한수 위의 상책으로는 상처의 아픔을 승화하여 제 존재 기반을 튼실하게 다지고 그 폭발적 에너지를 예술적 또는 신앙적 창조의 동력으로 변환시키는 선택이 가능하다.
이 셋째의 경로를 개척하여 상흔이 제 삶의 진정성과 충실성을 시위하는 지표가 될 때 특정한 상처자국은 권위의 표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것은 가령 '할례'라는 거의 생래적인 신체조건과 달리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진정성을 담보로 후천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에서 공짜 은혜, 싸구려 은혜를 견제하는 특이한 믿음의 발화지점이다.
사도 바울이 감히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명령한 것이 허세가 아니었다면, 또 '나를 더이상 괴롭게 말라'고 간곡한 당부조로 명령한 것이 맹랑한 결기나 자기 연민의 발로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예수의 흔적'이라는 상처의 권위에 근거한 필연적인 귀결 아니었을까.
오늘날 우리사회는 흉터를 감추고 상처를 피하는 세태가 강하다. 제 상처가 영광의 흔적이기는커녕 반대로 수치의 증표일 뿐이다. 그래서 자꾸 쉬쉬하며 숨기고 타인의 흉터에서 삶의 올곧은 자취를 살펴주는 일에도 둔감하거나 인색하다.
이런 세태속에서 사람들은 상처의 방어벽이 검증된 소수자나 취향과 생각의 코드가 통하는 제한된 부류와 배타적으로 어울릴 뿐 다양한 사람들을 허심탄회하게 만나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자들조차 그러다보니 이 시대의 만남들은 좀처럼 선교로 심화되지 못한다.
얼굴에 난 한두 개의 뾰루지 없애러 피부과에 간다고 아직 미성년의 딸내미가 백만원의 용돈을 요구하더라며 한 친구가 탄식했다. 인생을 절반도 넘게 살고도 아직 제 삶의 이런저런 깊은 상처를 적절히 다스릴 줄 몰라 전전긍긍하는 유치한 어른들이 많다.
믿음 충만한 신자들 중에는 의외로 상처의 경험을 복의 결핍이자 화의 기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학은 물론 이 시대의 인문학은 아직 '상처'의 문제를 진중한 연구과제로 간주하지 않는다. 상처라는 주제가 인문학의 담론 속에 본격적으로 심화될 때 그것이 자기 연민의 기제나 파괴적 에너지를 흩뿌리는 중뿔난 훈장이나 완장 권력의 끄나풀이 아니라 아픈 만큼 성숙해가는 삶의 자연스런 권위로 존중받게 될 것이다.
상처와 권위의 상호관계 속에 당신은 과연 상처를 무릅쓴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