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제의 목적과 범위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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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베리타스 DB |
함석헌 선생(1901-1989) 탄신 112주년 기념강연회 주제는 ‘한국종교, 함석헌의 종교’라고 강연자에게 통보되었다. 본래 주어진 큰 주제의 정신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구체적으로 ‘함석헌의 저항, 우상과의 싸움’으로 제한하였다. 내건 주제는 3가지 의도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특징을 ‘저항정신’으로 보았고 종교와의 관련에서는 결국 그의 생존당시 시대를 풍미하는 ‘종교적 우상에 대한 비판적 저항’으로 읽었다.
둘째, 한국의 제도적 기독교계는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를 ‘정통에서의 이탈’로 규정하고 그를 기독교 울타리 밖의 광야로 내쳤지만, 함석헌은 초지일관 ‘그리스도인’으로 본다는 확신을 강연자는 갖는다. 그는 정통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이단자’소릴 듣는 것등엔 게의치 아니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몸을 담았던 신앙공동체 ‘퀘이커, 종교친우회’는 그것이 아무리 ‘탈기독교적’ 래디칼한 신앙신념과 종교 행태를 보일지라도, 세계 그리스도교 물줄기 중의 ‘한 지류’임을 그 누구도 부정못한다.
셋째, ‘함석헌의 저항정신, 우상과의 싸움’은 한국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 특히 한국 개신교의 신앙행태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한국개신교가 앓고있는 질병 진단이 이웃종교에도 일부 타당한다면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무방하지만, 이 강연에서는 한국 개신교에 집중한다. 한국 개신교는 함석헌의 종교생활의 모태이었고, 그의 신앙구도자로서 여정은 개신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적 인격체로서 영글어가는 ‘종교껍질 벗기’ 과정이요, 참을 찾아 치열한 구도자의 영혼을 옥죄이고 가로막는 ‘종교우상’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문 초고를 써가는 도중에, 바로 며칠전 출판된 김삼웅 선생님의 역저 「저항인 함석헌」(2013년,3월15일 초판 1쇄 발행, 현암사)을 접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제목에 ‘저항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그의 생애가 온통 저항인 이었는데, 마치 종교인, 재야사학자, 문필가, 시인등로 ‘왜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옳은 지적이라고 동의한다.
저항아 함석헌의 야인정신은 결국 우상을 우상이라고 폭로하면서, 씨알이 우상의 노예가 되지않고 자유인이 되고 참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위하여, 우상과의 싸움을 살았다. 그는 본래 심성이 평화주의자였는데 때론 지독한 독설가요 싸움꾼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오직 ‘참(진리)를 그리워함’ 때문이고 ‘씨알이 자유인 되게함’ 때문이었다. 이 글은 우상중에도 특히 가장 자기정체를 절묘하게 위장하고 은폐하는 ‘종교우상’과의 싸움을 함석헌은 왜 했던가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우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상숭배가 종교계에서 빈발하는가?
우리의 주제 ‘함석헌의 저항정신, 우상과의 싸움’을 이야기하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그그리고 우상숭배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를 먼저 이야기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상의 정체’와 ‘우상의 현상적 매력과 그 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종교에 대한 정의와 ‘종교와 문화간 상호관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두가지 명제를 말한바 있는데 ‘우상’과 ‘우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1명제 :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신앙인이란 자신이 관여하는 궁극적 관심이 내포한 그 힘과 의미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제2명제 : “종교는 문화의 실체(얼,substance)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몸, form) 이다”.
위의 제1명제에서 중요한 단어는 ‘궁극적’(ultimate)이라는 형용사 단어이다. 틸리히는 그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를 구약성경 신명기서의 본질 핵이라고 구약성서학자들이 말하는 구절(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오직 유일한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계명이 말하는 심정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궁극적’이라는 형용사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는 전인적 관여(commitment)” 상태를 일컫는다. 그래서 모든 진지한 종교인에게는 자기 종교에 대한 진지성, 성실성, 전적 헌신성, 무조건성을 발견한다.
둘째 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는 아무리 초감각적 실재계 혹은 진여계(眞如界))와 관계되는 인간경험의 사건일지라도, 인간이 시공적 존재요 몸을 가지고 땅위에서 살아가는 한 문화와 관련을 갖는다는 점이다. 사람의 의미와 가치창조 행위과정과 그 결과가 문화인데, ‘문화’는 형태, 형체, 제도, 조직, 이론, 상징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문화라고 총칭하는 ‘살과 피로 된 몸’ 을 입지 않는 종교는 공허한 관념이요 죽은 종교이며 추상이고 허공일 뿐이다.
위에서 말한 ‘종교의 본질적 특성’과 ‘종교와 문화’관계성 때문에 ‘우상’이 생기고 ‘우상숭배’현상이 종교계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하면, 종교란 본질적으로 우상과의 싸움이면서, 역설적으로 종교는 바로 우상발생의 텃밭이 된다. 참 종교가 조금만 본래자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우상숭배가 된다. 그러므로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한 잠정적 정의를 다음같이 명제화 할 수 있다.
‘우상’이란 ‘궁극적 관심’의 자격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인간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관심갖도록 유혹하는 그 것’이 우상이다. 그리고 ‘그 것’에 충성과 마음과 뜻을 다 바치는 행위와 마음의 태도가 곧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고대 원시시대의 종교의례에서 신상(神像)으로서 만든 목제물, 석조물, 철조물등 가시적 대상물만이 아니다. ‘우상’은 철저한 비판적 성찰력을 결여한 보통 인간들에게 잠정적으로는 자기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매혹과 힘’이 있다. 그런 ‘매혹과 힘’이 결여된 것은 ‘우상’이 될 자격도 없다. 문명사 속에서 ‘우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 해가며 인간개인과 집단을 사로잡았다. 절대적 신관념, 제국의 힘, 황금의 위력, 지성적 학문체계, 위대한 예술작품, 과학문명, 에로스적 사랑의 열정, 무소불위적 절대 정치권력, 정치경제적 이념, 거룩한 종교제의, 보물함 같은 종교경전 등등이 모두 ‘우상’의 반열에 서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농락했다.
‘우상’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문명을 병들게 하는 이유는, 우상은 사실인즉 ‘궁극적 관심이 될 자격없는 것’인데, 잠정적인 그 매혹적 힘과 능률성과 욕구를 체워주는 만족감 때문에, 결국 인간을 사로잡아 ‘자유인’이 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상이 약속하는 그럴듯한 유토피아는 결국 환상으로서 막내리면서 인간을 허무감에 몰아넣는다. ‘우상’이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요청하는 맹목적 충성과 열정의 열기로 인해 뭇생명을 상해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사이비종교 신흥종교집단 교주와 그 신도들의 집단자살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동아전쟁의 일본군국주의와 독일 힛틀러 제3제국의 희생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간 사실을 생각하면 우상숭배 폐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수 있다. 한마디로 우상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며, 문명사회에서 창조적 힘과 숭고한 삶체험을 말살시키면서, 인간 생명의 자기실현을 저해하는 파괴적 힘으로 은밀하게 작동한다.
‘우상’이란게 알고보면 진짜인척 하는 가짜요, 진리인척하는 비진리요, 생명을 풍요롭게하는척 하면서 반생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데, 왜 사람은 개인이나 집단이 ‘우상숭배’ 행태(行態)에 쉽게 떨어지고 마는가? 그 원인을 고전적 사례로서 설명하는 비유가 하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이며, 또다른 하나는 사도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눈멀어진 후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진후 시력을 회복했다는 (행9:18) 상징이 말하는 해석학적 진리에 눈뜸문제가 그것이다. 전자 ‘동굴의 비유’는 주로 왜 인간은 문화적-사회적 집단으로서 ‘집단적 우상숭배’에 희생이 되는가를 잘 말해준다. 후자 ‘눈에 덮힌 비늘’은 개인의 열정적 신념과 닫혀진 지성이 왜 도리혀 진실의 실재에 대하여 맹인이 되고 귀먹어리가 되는가를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맹목성의 비극’을 일깨워준다.
2-1.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대화록중 「국가」(政體, Politeia) 라는 명저 제7권의 주제는 아테네청년들을 ‘올바름(정의론)에 관하여 바른 교육(paideia)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가, 그리고 교육부족과 잘못된 폐쇠된 교육이 얼마나 진리실재 파악과 접촉을 저해하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가 해명하는 비유이다. ‘동굴의 비유’의 중요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①어릴 때부터 깊은 동굴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일단의 사람들은, 동굴의 희미한 빛의 조명도에 시력은 알맞게 적응되어 조절되어 있고, 동굴 밖의 세계(실재계)를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동굴안에 유폐된 생활세계를 자신들의 유일한 생활세계로 알고 자족하며 산다.
②노예들중, 어느 한사람 혹은 일부가 동굴밖 빛의 세계를 보거나 경험했을 땐, 밝은 빛에 눈의 감각작용이 익숙해지기 전엔 시각신경은 고통을 경험할 것이며, 동료들은 그의 ‘동굴밖 세계 정보제공’을 감사하기는 커녕 안정된 질서를 교란하는 반동자로 몰고 죽이려고 까지 할 것이다.
③그러나, 참된 삶을 살려는 자유인은 지성의 힘을 의지하여 빛의 세계를 향해 등정해야하며, 태양으로 빛나는 진리의 세계(이데아계)를 보아야(idein) 한다. 참 교육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동굴 밖에 참된 빛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그리고 오르도록 돕는 것이 참교육이다.
플라톤의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 내용을 위와 같이 그 일부만 소개하는 것은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소개하지 않은 잘못을 범하지만, 왜 인간집단이 쉽게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가 이유를 해명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오늘날 지식사회학이나 ‘인문학의 꽃’이라고 말하는 ‘해석학’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 문화, 사회는 단순이 삶의 조건이거나 여건만이 아니라, 물고기가 동해바다 물속에 녹아있는 공기를 흡수하고, 플랑크톤을 먹고 자라며, 물에 의한 부력에 의해 헤엄치고 다니듯이 사람은 ‘세계-내-존재’(하이데거)라는 말이다.
닫힌 사회, 사상통제사회, 김일성 유일주체사상만 허락되는 사회, 하나의 종교와 하나의 교리체계만 진리라고 강요받고 제공받는 종교집단 사회,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만 읽는 종교인은 한마디로 플라톤이 비유하는 ‘거대한 정신적 동굴사회’에 갇히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 동굴사회의 빛의 조명도가 낮은 동굴 분위기가 편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동료 노예들과 기존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동굴밖 다른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자는 불순분자요, 동굴의 안정과 질서를 헤치는 자이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해야하고 ‘왕따’시키거나 심할 땐 죽여버려야 한다.
인류의 지성사, 특히 종교사는 그래서 이단파문, 마녀사냥, 화형에 처하는 극형, 동족간의 종교전쟁도 불사한다. 우상숭배는 인간집단을 특정한 정신적 ‘동굴’에 갇우어 놀 때, 동굴에 갇힌 정신적 노예들의 자발적인 충성심과 결속력으로 ‘우상종교’는 호황을 누린다. 그러한 댓가는 영원한 노예상태요, 빛과 자유세계를 모르는 비인간화가 가속화 된다.
2-2. 바울로 전환하기전 유대 젊은 지성청년 사울의 ‘눈에 덮힌 비늘’의 상징성
초대 그리스도교 발생당시 문화적-사회적 여건을 감안할 때, 유대청년 사울은 흔하지 않는 지성인이요 유대교의 진수에 통달한 율법학자였다. 그는 당대 최고 지혜자라 일컫는 가마리엘문하의 제자요, 바리새파 출신의 앨리트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하에서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특별히 선택받은 유대인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의 ‘예수도당’을 타도하려는 열정은 흔히 기성세대가 갖는 출세욕망이나 권력지향성 때문도 아니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보상을 받거나 유대교권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받고자하는 치기어린 충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 자신은 당시, 오로지 일념 그가 진리라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종교, 그가 신성하다고 확신하는 산해드린의 권위와 성전체계, 거룩한 전통, 야훼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절대성을 전념을 다해 지키자는 것이었다. 로마제국 식민통치아래서 선민 이스라엘이 수모를 당하는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그 이름 들어보지도 못한 시골출신 예수와 그 도당들이 혹세무민하는 ‘십자가과 부활의 도’를 전하면서 유대교 사회집단의 기저를 위태롭게 하는 ‘새 종교’를 전파하고 다닌다하니, 젊은 청년 엘리트 사울은 분노가 충천했다. 예루살렘 저자거리에서, 스데반이라는 청년을 돌더져 즉살시키는 인민재판에도 참여해지만 분이 안풀려, 대제사장으로부터 죄인압송 영장집행권을 받아가지고, 다마스커스로 향해가던 중 사건이 터진 것이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둘러싸임 받고, 말안장에서 굴러떨어져 시력을 잃게되고, 며칠간 은거하다가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력을 회복하고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을 갖게된다. 그가 박멸하려는 예수를 전하는 ‘사도’에로 극적 전환이 그것이다. 우리의 오늘의 관심은 사울청년의 신비체험의 실상이 무엇인지, 그가 회심하고 전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밝히자는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가 ‘바울의 눈에 덮혔던 비늘같은 것’의 상징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점이다.
①최고 수준의 지성과 학벌과 사회적 신분을 갖는자도 ‘유대교’라는 종교를 절대화하는 것처럼, 인간 개인은 비판적 자기성찰능력에도 부룩하고 ‘특정신념의 절대화, 우상화’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②더욱이 그의 전향전 가졌던 ‘예수당’에 대한 ‘광기’와 ‘광신적 열정’이 자기자신의 출세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대가성 행동이 아니고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상숭배’의 열정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지키려는 ‘궁극적 관심과 열정’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③사울로부터 바울에로의 전회(轉廻)는 교육, 설득, 자기수양, 독서등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고, ‘진리로부터의 조명’을 받을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빛의 조명’이 밖으로부터 오는가, 인간의 본래성 안에 선험적으로 있는 ‘진리의 빛, 말씀의 빛’에서 오는가에 관한 학자들의 의견 차이는 둘째 문제다. 사실은 ‘밖으로 부터이냐, 안으로 부터이냐’의 논쟁자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어서 다툼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2-3. 그러나, 인간의 우상만들기의 현실적 충동은 인간의 탐욕 때문.
인간의 우상만들기와 우상숭배의 원인이 인간집단이 처하는 사회문화적 경험의 제약성으로서의 ‘동굴상황’과 개인의 왜곡된 ‘사이비 궁극적 신념의 열정’에서만 온다면 너무 원론적 원인 분석에 그칠 위험이 있다.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와서 그 속을 파헤치고 보면 결국은 인간의 ‘무제약적 탐욕’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계고등 종교들은 탐욕이 인간성의 근본적 질병원인이자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탐욕은 단순히 소유욕망보다 더 깊은 인간성의 불안의식과 자기초월의식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역설한다. 가령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간성의 세가지 치명적 삼독(三毒)을 ‘탐 진 치’(貪瞋痴)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교에서 3가지 대죄를 ‘교만(pride), 불신앙(unbelief), 탐욕(concupiscence)’으로 보는 것이 그 예이다. 신약성경 목회서신 속에서도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고 잘라 말한다. 탐심은 탐욕이요, 탐욕의 대상은 물론 금권욕, 권력욕, 명예욕 등 다양한 종류로서 뒤엉키고 혼합되기도 한다. 계속.
이 글은 씨알의소리 2013년 3,4월호[227호]에 실린 본지 자문위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의 글임을 밝혀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