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1999년 1월 월례포럼
자본주의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던 이 들에게 지난 10여 년은 절망과 혼돈 그리고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 동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장으로서의 역사는 후자의 결정적 승리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는 주장이 풍미하였다. 그와 함께 신자유주의 세력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온 세계를 장악하기 위하여 기세를 부렸다. 이제 이 시대의 징조는 더 이상 '가난한 자의 해방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승리'가 되었다.1)
이런 와중 속에서 민중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기를 원했던 이들은 '대안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하여 허탈과 싸워야만 했다. KNCC의 경제백서를 읽으면서 그런 노력의 결실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백서가 인정하는 것처럼 지난 90년대에 경제체제 문제는 KNCC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문민정부 수립에 의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정착, 한국경제의 꾸준한 총체적 성장 등이 어우러져 한국 경제 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을 차단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97년 말부터 한국에 몰아친 IMF 한파, 서구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득세 등은 대안적 경제체제를 향한 모색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성껏 준비된 KNCC백서의 논찬을 통해 이 여정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여기서 통일경제문제, 지구화의 과제와 실업문제는 지면상 생략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1. 발전적 시각
백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비판적 재검토를 통해 과거의 시각에서부터 몇 가지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첫째는 교회의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은 단순히 신앙고백적 전통에 근거한 선언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다. 갈수록 다원화 돼가고 복잡해져 가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분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영국의 사회윤리학자인 프레스톤이 지적한 것처럼 에큐메니칼 운동은 종말론적 현실주의(eschatological realism)라는 신학적 틀에 근거하여 상세한 사회과학적 성찰의 과정이 없이 직관에 근거한 실천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어왔다.2) 물론 어느 특정 사회과학적 거시담론이 경제현실에 대한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맹신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비판적 수용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직관 그리고 마르크스적 사상은 때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두크로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앙고백의 본질적 문제(a status confessionis)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3) 그러나 냉철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균형 잡힌 그러면서 보다 실천적인 시각을 갖도록 도와준다. KNCC 백서는 이러한 성찰의 결실로 보여진다.
둘째는 교회안의 사람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과 정책관련자들 까지 대화의 상대자로 삼으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다원사회라는 인식 하에 교회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 공론화 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것은 현재 상황이 과거 60년대와 70년대에 교회가 사회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던 때와는 다르다는 현실적 인식에 근거한다. 또한 이제는 우리 사회의 중간층이 소위 즉자적 민중인 대중에서 대자적 민중인 공중으로 성숙해저 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과의 연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발전이다. 경제문제와 관련해서 신학이 공중적 담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인 일반은총이나 자연법 사상에 의해서도 지지 될 수 있다.4)
셋째로 에큐메니칼 이코노미로 표현된 에큐메니칼 운동과 에반젤리칼 이코노믹스로 표현되는 복음주의 전통사이의 비판적, 생산적 연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서에서 후자의 노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방향성은 매우 바람직하다. 더구나 경제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이해나 사회과학적 인식에 있어서 연대를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한 소모전을 해서는 안 된다.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대안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사회변혁의 신학적 당위성
백서는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경제체제의 변혁을 당연한 교회의 과제로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논찬자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KNCC 소속의 일반 성도들도 이 과제를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사명으로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 경제윤리의 원칙을 말하기 전에 사회변혁의 신학적 당위성을 간략하게나마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논찬자의 바램이다. 그래서 이 점에 일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인의 생각을 개략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많은 경우 사회적 사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부정적 시각을 가지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성경해석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이원화 시켜서 전자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후자는 세속적이라고 경시하는 이원론을 낳게 된다. 여기에 함몰되면 자연히 사회적 행동을 비성경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과연 이러한 이해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5)
존 스토트는 간략하지만 사회적 관심의 성서적 근거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6) 그의 주장을 조금 더 발전시키면 기독지성인의 사회적 사명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면 사회적 행동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영역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자연세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영역(the sacred)뿐 아니라 세속적인 영역(the secular)의 하나님이시다. 밀뱅크가 잘 지적한데로 원래 '세속'이란 단어는 종교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영역의 개념이 아니고 타락과 종말 사이를 말하는 시간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독립적 영역으로서의 세속이란 개념이 새롭게 만들어 진 것이다.7)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이 점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주 세속적인 영역을 등한시하는 소위 '종교생활'을 강렬히 비판하신다. 즉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을 등한시 한 채 제사나 금식 등의 '종교행위'에만 몰두하는 것을 매우 역겨워 하신다(사 1: 10-17; 58: 3-12; 미6: 6-8, 슥 7: 1-10). 그러한 종교행위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다. 사이더가 잘 지적한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결국 이러한 우상 숭배 때문이었다(렘 7: 5-7; 22: 3-9).8) 이 점은 신약에도 이어진다.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 등 작은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약 1; 27).
또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듯 이방 백성들도 사랑하신다(암 9: 7).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나라들도 다스리신다(단 4: 32).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의 주권자이시다(시: 33: 13-15).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의롭게 하시는(justifying)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정의(justice)의 하나님이시다. 특히 종교 개혁이후 기독교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강조하다가 정의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성이 있어 왔다. 이것은 로마서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바울의 '하나님의 의(헬라어로 dikaiosyne=righteousness 혹은 justice)'에 대한 가르침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한데 기인한다. 의(히브리어의 sedeq 혹은 sedaqah, 헬라어로는 dikaiosyne)라는 단어는 그리스 로마 전통이나 지배적인 서구사상에서는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윤리적 규범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에 담겨진 히브리 사상에서는 관계성의 개념이다.9) 즉 관계성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요구가 충족 된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란 바로 관계성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충족 시켜 준 사람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의 관계를 맞으셨다. 하나님의 정의란 인간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충실하게 지키시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구출해내 그 언약의 공동체를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그 회복된 공동체는 구성원간의 관계 또한 정의로워야 한다. 그것은 흔히 가난한자의 권리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실제로 구원이란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11)
바울은 롬 1:17에서 바로 이러한 구약 언약의 배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12) 이는 롬 1:16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 한데서 매우 분명해 진다.13) 즉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언약의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능력이다. 이것은 곧 죄인들을 구원의 공동체로 이끄실 뿐 아니라 그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보존하시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행위와 하나님이 죄인에게 선물로 주시는 객관적 의를 포괄한다. 또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to count righteous)과 '의롭게 만드는 것'(to make righteous)를 포함한다.14)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우리의 법적 지위를 의롭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의 삶을 정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능력이다. 둘 다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인간의 업적의 개념이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믿음으로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의를 은혜 가운데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목숨을 걸만큼 매우 중요한 사명으로 인식했으며(갈 2:10; 행 20: 22-24; 21: 13; 24: 17; 롬 15: 26)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dikaiosyne, 고후 9:9)임을 밝힌대서 확연해 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를 이러한 사회적 사명으로부터 분리 시켜왔던 것이다. 이제 기독인들은 이러한 환원주의적이고 단편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과감히 하나님과 그의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적 사명에 뛰어 들어야한다.15)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창 9:6; 약 1:27). 이는 사실 개신교의 정의관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어 왔음을 임을 기억해야한다.16) 또한 인간이 창조될 때 영혼만 지닌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영과 육을 가진 존재(a body- soul-in-community)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영혼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인간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삶 그리고 사회적 삶을 등한시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적인 인간관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이 해야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새로운 육체로서의 부활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눅 4: 18, 19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사를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의 사역이 가난한 자들과 억압당하는 자들을 돌보고 세상의 억압구조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의 취임사는 구약의 희년선포를 연상케 해주고 있다. 이를 일방적으로 영해한다는 것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다.17)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 체제에 도전하여 과감히 청결한 사건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을 강도라고 불렀다(마 21: 13). 백성을 탈취하는 이스라엘 사회의 억압과 탈취 구조의 핵심을 지적하신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정의(dikaiosyne)를 추구할 것을 명하신다. 물론 여기서의 의는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에 나타난 정의(sedeq)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에 나타난 정의(sedeq 혹은 dikaiosyne)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교육시키는 데 유효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5-17). 예수님은 제자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보내신다(마 5: 13-16; 6: 33). 우리는 이 사명을 상당히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스티븐 모트는 성경에서 빛은 어둠과 대항에서 싸우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힘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이사야 9:2-7에 주목하면서 빛의 역할은 바로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는 것이요 정의를 세우는 것임을 역설하였다'.18)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경제체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개혁해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로 구원의 개념도 좀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사 52:7; 10: 24-26). 예수님 자신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눅 18:24-27).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을 뛰어넘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보다 적절한 번역은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이다.19)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는 사회적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내면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여 영혼의 구원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를 포함한 온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냥 수동적으로 기도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안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의 은혜는 사랑의 사명을 늘 동반하기 때문이다(갈 5:6; 약 2:17, 18; 요일 3:17; 딛 2:14). 사랑의 삶은 사회적 사명을 동반한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돌봄으로 정의로운 자(dikaios)가 되어야 진정한 구원이 가능해짐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다(마 25:31-46). 이는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구원의 은혜와 사랑의 삶이 구분될 수 없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적이(of the world) 되어서는 안되지만 세상안에(in the world) 있어야 한다(요 17:15, 16, 18).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완전히 부정하거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세상에 도전하여 변혁을 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이를 스토트는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lyness)라는 말로 적절히 표현했다.20) 교회와 세상(좀더 광범하게 말해서 '문화')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리처드 니이버는 교회사의 여정을 분석하면서 다섯 가지 이상형을 찾아내고 있다;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문화를 지키는 그리스도', '문화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21) 그렇다면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치·경제 체제와 관련해서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겠는가? 이 점에서 영국의 지도적인 기독교 사회윤리 학자인 프레스톤의 제시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다른 유형들의 유효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유형이 현대와 같이 사회변동이 급격한 시대에는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다.22) 이는 교회는 온전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사회에 대한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커크는 균형 잡힌 제안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실천은 두 가지 헌신을 포괄한다.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를 창조해 나가는 헌신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 세상의 재화의 사적 소유자가 더 이상 복음의 소유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복음과 인간의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함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실이 이 공동체에서는 일체 사라져야 한다.
두번째는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 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열려 있고, 예언자적이고, 끊임없이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서적 고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교회가 처해 있는 그 현장 속에서 자신을 갱신하도록 돕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23)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현 사회의 주도적 경제 체제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정의에 좀더 가깝게 접근하게 할 수 있는가를 끈임 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3. 공동도덕 제시를 위한 노력
백서의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신학을 공중적 담론으로 제시하겠다는 의도에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논찬자는 백서에서 제시한 기독교 경제윤리의 5가지(인간적, 민주적, 사회적, 생태학적, 지구적 평등)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백서의 대상이 단순히 기독인이 아니고 일반 시민 및 정책결정 관련자들을 포함한다면 기독교 경제윤리 원칙들을 일반 언어와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인구의 힘을 업어 단순히 기독교적 입장을 피력하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보다 강력한 연대을 형성해 가는데 미비하다는 것이 논찬자의 입장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하이에크의 사회정의 비판론과 존 롤즈의 정의론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우선 '경제정의 신기루론'을 주장한 하이엑크의 주장을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24) 왜냐하면 하이엑크는 밀톤 프리드만과 함께 요즈음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운동의 논리를 확실하게 제공해 준 경제학자요 사회철학자로서, 경제(혹은 사회)정의라는 개념은 신기루처럼 전적으로 텅비어 있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다층적인 섬세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허점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두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로, 그는 자유시장경제에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부의 분배에는 '정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시장경제에서 형성되는 질서는 자연발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로서 그 누구도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을 볼 때 '참 운이 없네'라고 생각하지 '불의를 당했구나'라고 느끼지 않는 것과 이치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 나타난 결과에 대해 '경제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개인 혹은 단체의 자기이익을 주장하기 위한 거짓된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국의 기독인 정치 철학자 플란트가 명쾌하게 지적한 것처럼 자연과 시장구조의 차이를 간과한 논리이다. 먼저 자유시장 경제의 결과는 집단적으로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즉 힘없고 가난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활동에 진입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자연의 재앙과는 달리 자유 시장 경제 체제는 사회의 집단적 의지에 의해서 유지되고 또한 원하면 바꿀 수도 있다. 이상의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발생하는 분배에 대해 경제정의란 윤리적 기준을 적용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타당한 것이다.25)
둘째로, 자본주의적 자유시장 경제는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임을 강조한다. 경제정의는 이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역시 자유를 '부당하고 자의적인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상태'라는 소극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는 그 체제가 유지되려면 가난한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을 항상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몇몇 노동자들이 사회상승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집단적 부자유'(collective unfreedom)속에 갇혀있게 된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26) 결국 그가 경제정의를 신기루라고 이해한 것은 경제정의 논리의 실제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자의적인 가치선택에 준거해서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순환 논리에 빠진 결과이다.27)
한편 존 롤즈는 그의 『정의론』, 그리고 좀더 최근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정의에 대해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철학적 논지를 폄으로써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28)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롤즈의 정의론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킨 페퍼의 논의는 흥미롭다.29) 롤즈와 페퍼에 대한 종합적 논의는 지면상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는 롤즈와 페퍼와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얻어진 논찬자의 경제정의론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우선 페퍼가 명명한 '혼합된 의무론'(mixed- deontology)의 개념은 롤즈의 정의론의 성격을 잘 규정하는 것으로서 논찬자의의 입장으로 받아들인다.30) 즉, 칸트의 '엄격한 의무론'(strict- deontology)과는 달리 정의의 개념을 그 자체로는 도덕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 좋은 조건들 - 예를 들면 롤즈가 제시한 사회적 기본 요건에 속하는 기본권, 자유, 기회, 권력, 소득, 부, 자기 존경의 사회적 기반 등31) - 과 연결시켜서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론' (consequen- tialism)과는 달리 이상의 조건들을 극대화하는 데 정의의 기준을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정의의 기준을 찾는다. 한편 '목적론'(teleology)과는 달리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들, 즉 인간과 사회의 모든 면을 포괄하고 통제하는 공동선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정의란 각자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사회 속에서 협력하며 살아가는 구성원들에게 위에서 말한 기본적 요건들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는 과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론은 모든 구성원이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합의하는 것을 전제하는 급진적 공동체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의론을 채택하는 이유는 궁극적 목표에 대한 합의가 소공동체에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미 오늘과 같이 돌이킬 수 없이 다원화되어 있는 자유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32)
둘째로, 이러한 '혼합된 의무론'적 입장에서 롤즈와 같이 정의론의 근본 바탕을 형이상학적 원리에 두지 않고 민주적 사회 전통의 해석에 둔다. 즉 이 전통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거기에 걸맞는 정의론을 구성해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접근은 오늘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롤즈의 해석에는 일관성이 결여된 부분이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적 존재'로, 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협력하는 공평한 제도'로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적 불평등이 정의를 해치지 않기 위해 만족시켜야 할 조건을 다루는 소위 '차이원리'(difference principle)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우애정신에 이 원리가 잘 맞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 사회가 철저히 독립된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닌 어느 정도 서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성을 지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순을 해결키 위해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동체성을 띤' 존재로, 사회를 이러한 구성원들이 '서로 공동체적 협력을 하는 공평한 제도'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해석이 오늘날 편만해져 가는 민주적 사회전통을 보다 더 정확히 제시할 뿐 아니라 특히 한국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본다.33)
셋째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동체성을 지닌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적 협력을 공평하게 관리하는데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진 정의는 무엇인가를 추론해 간다. 이런 과정에서 롤즈는 '계약론'적 접근을 한다. 즉 정의란 모든 편견을 배제한 가상적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의 대표들이 합의하에 계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롤즈는 '대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34) 정의의 원칙을 합의해 내는 가상적인 상황에는 사실상 롤즈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는데 마치 사회구성원의 모든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35) 우리에게 있어 가상적인 상황은 계약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정의의 원칙을 세우기 위한 기본적 관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이 설득력이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추론된 정의의 원칙들을 함께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롤즈가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하는 최종적인 조건으로 제시한 '중복된 합의'의 이상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서로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제시된 정의의 원칙을 자신들의 종교나 세계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지나치게 이상적일 뿐 아니라, 사회 변동의 원동력을 도덕적 합의에서만 찾는 도덕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모든 계층의 중복된 합의가 성립될 때까지 기다리려면, 어떠한 '정의의 원칙'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원칙을 제시할 때, 최대한의 설득력을 갖추어 사회변혁의 정치적 힘을 쟁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36)
이상의 관점에서 부터 추론된 정의의 원칙은 아래와 같다. 각 항은 우선권의 순서에 의해 배열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위의 우선권을 가진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상위의 우선권을 가진 원칙을 희생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1. 시민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모든 구성원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2.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평등한 기본권과 자유의 충분한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3. 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와 아울러 본인이 속해 있는 기관 내의 경제적 결정과정에 참여 할 수 있는 균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4. 사회의 모든 조직체의 구조가 공공협력을 유도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5. 사회적, 경제적 불균등은 다음의 조건하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첫째, 그 불균등이 가장 불리 한 입장에 있는 계층에게 최대의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정당한 저축의 원칙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가장 불리한 입장에 있는 계층의 자기 존중을 심각히 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37)
이상의 정의론은 백서에서 말하는 윤리적 원칙들을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인간적 원칙은 위의 원칙 1과 5에, 민주적 원칙은 위의 원칙 2, 3, 4에, 사회적 원칙은 위의 원칙 3과 5에, 생태학적 원칙은 사실상 위의 원칙 3과 4에 내포되어 있다. 다만 지구적 평등 원칙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위의 원칙들을 세계화해 나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의론을 어떻게 세계적인 보편 담론으로 제시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중대한 과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문화가 갈수록 보편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는 점과 갈수록 국민국가의 국경(borders)의 개념이 약화되고 변경(frontiers)의 개념으로 대체되어 가는 현실을 감안 해 볼 때 전혀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 논찬자의 입장이다.38)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윤리적 원칙들 사이의 모순과 대립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해결 방안이다. 백서는 원칙 사이의 조화와 우선 순위 결정을 국민적 합의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한국 현실에서 좀 막연하고 자칫하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민주주의는 현재 인류가 발견한 정치제도 중에는 가장 우월한 것임은 일반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그러나 쉐보르스키가 잘 지적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특징 중에 하나는 미래에 대하여 일반적인 예측은 가능하지만 특정한 결과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39) 이렇게 볼 때 원칙들의 조화를 단순히 다수의 의견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위임하는 것은 때로는 무책임 할 수 있다. 물론 사사건건이 교회 백서가 우선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노릇은 아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의 문제 자체가 윤리적 함의를 갖고 있는 경우에 결과는 민주적 합의 절차에 맡기더라도 사회를 향하여 제시할 수 있는 교회의 통일된 입장을 모색해서 여론에 영향을 미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롤즈에게서 응용한 원칙들은 우선 순위에 의해 나열되었다는 점에서 그 유용성이 있다 하겠다.
4. 시장경제의 민주적 규율
백서는 시장경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가 총체적인 면에서 역사상 가정 효율적인 경제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예리하게 그의 문제점들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케인즈식 국가개입이 어떤 부작용을 낳게 되는 가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제시한 원칙들에 입각해서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식 국가개입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국민경제 질서를 모색하는 노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대략적으로 효율성 확보를 위하여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되 사회경제적 정의와 생태학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장의 민주적 규율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이는 최근 토니 블레어와 앤소니 기든스가 다시금 민주사회주의의 갱신을 위하여 제창하여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제3의 길'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다. 문제는 이 입장을 해방신학의 예리한 비판가로 잘 알려진 마이클 노박이 제시한 소위 '민주적 자본주의'와 어떻게 차별화 하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시장경제와,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정치, 그리고 다원적인 문화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40)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국가개입에 대한 이해와 평등에 대한 시각의 차이이다. 백서의 입장은 국가개입의 부작용을 인정하면서도 다각적인 정의 구현을 위해 될 수 있는 데로 국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노박의 입장은 시민의 최소한의 기본 생존권 보장 및 사회질서 유지 등을 제외하고는 될 수 있는 데로 국가를 경제에서 분리시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또한 노박은 평등의 개념을 기회 균등에서 찾고 상대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평등주의를 시기의 산물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거부로 이해한다. 그러나 백서의 입장은 물론 절대적 평등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상대적 빈곤 해결을 경제정의의 과제로 받아드리고 있다. 이 점에 논찬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든스도 시장경제에서 발새하는 결과적 불평등은 형평성 있게 개인의 공적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회 결속을 위협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논찬자는 민주적 규율과 관련해서 백서의 자본과 노동사이의 권력의 분배에 대한 입장에 주목한다. 백서는 초과 생산물이 자본과 노동사이에 분배되는 과정을 권력의 상응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점은 자본주의 주류경제학의 경제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르크스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서 논찬자도 적극 수용한다.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최근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착취론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유익하다고 본다.41) 물론 아직도 냉전시대의 폐쇄적 정서를 갖고 있는 일반 교인이나 시민들을 감안할 때는 전략적인 지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있어서 논찬자는 좀더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백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첫째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초과 생산물의 분배를 국민적 합의에 맡긴다. 둘째,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식 노사관계를 추구한다. 이는 노동자의 경영참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대안적 경제체제는 우선 생산관계의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자본을 시장 이자율에 따라 생산 업체에 대여하는 지주회사들의 창설을 유도한다.42) 자본을 빌려 노동자들은 스스로 경영진을 선출하여 생산업체를 운영한다. 생산업체의 노동자는 더 이상 임금노동자가 아니다. 시장을 통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통해 얻어진 이윤은 -지주회사에게 이자를 지불한 후 - 노동자들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주회사는 생산업체가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해서 혹은 상황의 변화로 회복 불능의 경우에 폐업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을 무작정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비해, 훨씬 노동자의 유익을 보장해 주는 제도임에 틀림없다. 자본가는 사실상 더 이상 자본가로 불리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인력에 대해 협상력이 축소되고, 노동자는 직장 내 민주주의를 통해 노동의 소외 현상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자들에게 좀더 공평한 기회를 가져다주며, 빈부의 격차를 상당히 축소시켜 현존의 복지 자본주의 국가보다 우리의 정의의 원칙 제 5 항을 보다 충실히 실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대안 경제체제는 헨리 조지와 조지스트들이 강조한데로 토지 투기로 말미암은 폐혜를 막기 위해 강력한 토지세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주의의 갈등 구조를 지주 대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관계로만 보려는 경향은 환원주의적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대안적 경제체제는 둘째로 생산의 조정 형태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는 복잡하고 산업화된 경제에서의 효율성을 감안하여, 자유시장을 가장 주요한 자원의 배분제도로 삼되, 우리의 정의의 원칙을 최대한 담아 낼 수 있도록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개혁안은 첫째 '암시적 계획'을 포함한다.43) 이는 구 소련에서 실험된 계획경제와는 구별된다. 그 목적이 시장의 배분 기능을 대체하는 데 있지 않고 시장의 약점들을 보완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지방분산적이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대표들, 노조대표, 소비자 대표, 지역대표, 각종전문가, 특별이익집단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시장을 통해 자원을 배분함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들을 지적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다. 이는 시장의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사회성. 공공성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로 '암시적 계획'이 시장 활동의 보완적인 역할을 잘 할 수 있으려면, 위에서 언급한 토의과정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44) 이는 우리의 정의의 원칙 제 4항에 해당하는 '공공협력'체제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① 공공협의에 관련된 각 기관의 담당요원의 지속성이 유지되도록 해야한다. ② 공공협력에 참여하는 각종기관의 수가 지나치게 크거나, 너무 작아서는 안 된다. ③ 각 기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경제활동단체에 대한 사회적 감시를 강화한다. ④ 각 급의 토론회를 장려하여 각 기관들이 사회적으로 근접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대안적 체제의 민주적이고, 지방 분산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정의의 원칙 2 항이 요구하는 입헌 민주정치와 잘 조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우리의 대안적 체제는 시민들의 내적 혁명이나 물질적 자원의 절대적 풍성함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한 제도'임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실현 가능여부는 순전히 이론적 상상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이상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안적 체제를 제시함에 있어, 이 체제야말로 모든 형태의 착취와 소외를 제거할 수 있는 완전한 제도로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백서가 제시하는 대안 체제 보다 그리고 롤즈가 제시하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체제보다 우리의 정의의 원칙들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체제를 민주 공동체라고 부른다. 민주 공동체는 소규모 집단에서만 가능한 급진적 공동체와는 구별된다. 주요 생산 수단의 국유화와 중앙계획경제로 대변되는 과거의 공산주의나 급진적 사회주의와도 다르다. 자유시장경제를 지나치게 신봉하며 사회전체의 공동체성을 외면하는 신자유주의와도 구별된다. 그런가 하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골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최소화시키려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시장경제와도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그 동안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하던 이 들은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백서는 이런 오랜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시원한 생수와도 같다고 볼 수 있겠다. 그 동안 민중 진영에는 갈등이 있어 왔다. 이는 시민운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한편으로는 시민 운동이 추구하는 국민경제 질서는 민중을 현재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온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하면 보다 급진적인 해결은 도무지 지평선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계급주의적 사고와도 연결이 된다. 과연 지금도 해방이 필요하며 역사의 주체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할 계급으로서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논찬자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위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민중을 다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인정한다. 계급이 많이 다원화되어 있고 서로 중복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서가 잘 지적하고 있는 데로 노동과 자본의 근본적인 권력적 대립 관계는 여전히 상존 하고 있다. 다만 중산층화 되어 있는(실제로든 허위의식에 의하든) 사람들에게 첨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뿐이다. 이렇게 볼 때 백서는 그 동안 민중적 관점을 갖고 있던 이 들에게 하나의 이론적 무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민중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시민운동의 관점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논찬자는 백서의 논리를 좀 더 강화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좀 더 급진적인 개혁을 제안함으로써 대안적 경제체제를 찾아가는 데 일조하고자 하였다. 이 백서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일어나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