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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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여러 겹의 위장막과 상징장치를 품고 있다. 외관상 한 10대 소녀의 성장담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의 산골마을에 외떨어진 농가. 농사짓는 아버지와 처녀티가 나는 딸이 함께 살고 있다. 딸 루시는 엄마를 그리워하여 그의 옷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지만, 아버지는 제 집 농장일꾼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아내에 대한 원한을 드러내며 옷을 다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린다.
어느날 엄마가 탕녀의 여정을 일단 접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위고와 창고 옆에서 부대낀다.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위고는 아내를 창고에 가둬버린다.
학교도 그만두고 집 안에서 독학하며 사랑 없이 무료한 생활을 하는 딸 루시는 사람이 그립다. 그녀는 아버지의 일을 거들 목적으로 들인 모르코 출신 불법체류자 청년 아킴에게 은근히 호감을 보이지만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아버지 앞에서 경원시하는 언행을 보인다.(농장주인의 머슴과 모녀가 동일한 패턴으로 연정을 품는다는 이 모티프는 <채털리부인의 사랑>에 빚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창고에 루시 엄마가 갇힌 사실을 안 아킴은 구해주려 노력하다가 아버지의 방해와 협박으로 잠정 중단되자 아버지가 잠든 틈을 노려 루시를 몰래 불러내서 그녀로 구조하도록 한다. 잠시 모녀의 회한 어린 부대낌과 숲속에서의 깊은 잠이 이어지고...
날이 밝자 그 농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는 아킴에게 루시는 지름길을 안내하며 잠시 동행하던 중 길 위에서 상큼한 사랑을 나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앞에 시치미를 뗀 루시는 계곡에서 목욕을 한 뒤 무화과나무 아래 가서 어린시절 추억을 전해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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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 드부아즈 감독의 처녀작 <파괴된 낙원>의 한 장면. |
낮잠을 자다 깬 이들 부녀는 자기 집이 불타는 광경을 보고 달려가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것. 루시는 문을 열고 집을 나가면서 얼굴에 기쁨의 미소를 띤다. 점점 힘차게 달리면서 더욱 크게 웃는다.
자세히 보면 에덴동산 모티프가 풍성하다. 루시와 엄마는 하와 캐릭터의 더블릿이다. 아버지는 야훼 하나님과 아담의 종합적 분신처럼 보인다. 아킴은 사탄의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한다. 그러나 그 역할은 타락의 유혹이 아닌 해방을 매개한다. 아버지와 딸은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않은 채 계곡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한다.
엄마는 이미 탈출과 해방의 단맛과 쓴맛을 두루 본 1세대 하와의 전형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농가를 불태워 '낙원'을 파괴함으로써 육체의 사랑과 욕망이 부재하는 그 허울뿐인 압제의 낙원에서 딸이 탈출할 수 있도록 견인한다. 아킴을 따라나서면서 루시가 벗어던진 앞치마의 상징은 가부장체제의 전복과 함께 신적 권위에 의해 왜곡된 가짜 낙원으로부터의 해방을 암시한다.
에덴동산의 타락 이야기를 타락이 아닌 인류문명의 진보나 지혜로운 인간의 기원이란 전복적인 시각에서 읽고자 하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영지주의의 한 섹트가 이 해석적 계보의 상전이다. 그들에게 사탄은 유혹자와 타락의 매개자가 아니라 정직한 말로 신의 거짓말을 폭로한 구원자이다
그 사상의 계보에 의하면 에덴은 창조주가 자신의 농경지를 경작시키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할 목적으로 만든 사육장에 불과하다. 이러한 전복적인 해석의 의미를 교리화하여 사탄을 숭배하고 욕망의 표출 행위로서 성교를 구원의 초상으로 받아들인 섹트가 있었다.
이 작품을 처녀작으로 만든 드부아즈 감독은 이러한 영지주의 전통에 가부장주의 비판의 메시지를 덧입힌 셈인데 그 비판의 시선은 고루하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카메라의 시선이 마냥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상처받은 불운한 인간이며 욕망의 존재다. 아내가 남편의 치명적인 오류와 무관하게 집을 나가버린 탓으로 분노와 원망이 쌓여 있을 뿐이다. 창고에 갇힌 아내가 유혹하자 그는 창문의 터진 공간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입 맞추며 잠시 갈등에 휩싸인다.
아버지의 답답한 문제는 현재의 구조적 변화를 위해 어느 쪽으로도 화끈하게 결단하지 못한 채 미적거리며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결국 아내를 풀어주지 못하고 다시 그 '낙원'의 집으로 들어가 딸과 함께 목욕을 하고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추억에 젖는 식의 구태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고전적 역할을 농장잡역부 아킴과 엄마 캐릭터가 골고루 나눠 갖는다. 아킴은 루시에게 사랑의 달콤한 욕망을 교감하는 욕망의 체험을 전수해주고 길을 떠난다. 어머니는 ‘낙원’처럼 포장된 감옥을 과감하게 불태워 없앰으로써 딸 루시가 행복한 실낙원을 할 수 있는 구조적인 태반을, 놀랍게도 그 폐허 위에, 남겨주고 사라진다.
물론 길을 떠난다고 루시가 마냥 행복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머니가 산전수전 겪으며 사랑의 도피행을 떠난 결과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딸이 보고파서 되돌아온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머니의 유랑의 자유가 갇힌 채 사육당하는 허울뿐인 부자유의 낙원보다 낫다고 봤기 때문에 그 낙원의 근거를 허물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옛 시절의 신화적 공간을 고리타분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가부장이라는 고전적 권위의 표상체계 아래 이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교육 현장에서 띄우는 장밋빛 청사진의 낙원 지향적 구호와 신세계의 달콤한 유혹들이 깨쳐버려야 할 족쇄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루시가 집을 뛰쳐나와 달리면서 피워 올린 얼굴의 함박웃음이 유의미하고, 실낙원은 후련한 해방사건의 희망을 담아낸다.
이 영화를 창세기의 하나님이 보는 건 위험하다. 성장한 딸을 둔 아버지가 그 딸과 함께 보는 것도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아, 물론 단서는 있다. 성서의 에덴 이야기에 깔린 이러저러한 복잡한 모티프와 해석사의 층층면면을 이 작품에 끌어들여 순진한 신앙과 삶의 일상을 복잡하게 요리할 역량만 없으면 괜찮다. 그런 경우 이 작품은 전혀 무해하며, 비록 모호한 뒷맛을 남길망정 화면만으로, 스토리만으로 꽤 즐길 만하다.(사진= 스틸컷)
* 폐막식에서 이 작품이 결국 '대상'을 거머쥐었다. 처녀작으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이라니...놀랍지만 그만큼의 질적인 성취를 보여준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