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만우 장공 신학의 두 유형적 특징을 신학교육에서 통전해 내는 과제
만우와 장공은 한신이 살아있는 한, 한신신학의 뿌리요 지반이며 원샘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강 물이 아무리 수량이 많고 크고 넓어져도 보기에는 좋지만, 직접 마실 수 없을 만큼 오염되었을 때, 사람들은 한강의 발원지인 어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한강물의 발원지 옹달샘을 찾는다. 한신은 개교 66년을 지나면서 교육시설도 50여년 전에 비하여 풍성해졌고, 교수진도 많아졌고 박사들로 가득차 있다. 일제말 장공선생이 몇 사람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신학교의 명맥을 이어가던 때와 비교할 때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있고, 만우선생이 납북당하기 전 동자동 교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기와 비교하면 우수한 대학졸업의 인재들이 신학을 하겠다고 입학시험 경쟁을 치룬다. 신학교재는 풍성해졌고, 신학 각분과의 학문적 내용도 세계수준에 도달하여 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만우?장공 신학정신이 아예 살아졌거나, 약해져서 거의 “한신신학공동체는 죽었는가?”라는 위기의식이 우리교단만이 아니라 한국 신학계와 대학가의 염려스러운 소문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강물의 발원지로 되돌아가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셔 소생하여야 한다. 만우?장공신학 혹은 신학정신, 혹은 그들의 영성을 신학교육 현장에서 통전하는 과제는 양자를 두루 고루 섞어서 조화를 이루자는 말이 아니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체는 쉽게 섞이지 않는 법이다. 도리어 각각의 특징을 살려내고, 양자의 공통점을 더욱 확실하게 재학인하고, 양자의 ‘차이’를 귀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알고 교수와 학생들이 자신들의 그리스도인됨과 목회자됨의 형성과정에서 영적 인격체로 재육화 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우선 세 가지 과제와 방법을 제시해본다.
(1) 전문신학지식인 훈련교육형태에서 그리스도 품격형성의 영성훈련 교육체계로 전환
첫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만우?장공의 신학교육 정신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신학지식?성서신학?실천윤리 등의 각종 전문적 지식전수가 일차적 목적이 아니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심장에 접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데 있었다.
대학원 이름도 ‘신학전문대학원’이라고 변경되었으니, 그에 걸맞는 고도의 학문적 교육훈련, 지식전수?목회현장에 적응하는 이론실습이 갖춰져야 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신학교수와 신학도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사람으로서 자기부정, 겸허, 새로운 존재에로의 재탄생의 환희, 성령에 의한 내적 생명의 충만과 권면체험,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각, 이곳 임마누엘 시공간이 신발을 벗어야하는 ‘거룩한 땅’이요 ‘얍복 나루터’라는 철저한 자각이 없다면, 종교로서 밥을 먹는 전문 직업인 양성소로 전락하고, 성령 없는 죽은 신학 장사놀음이 되고 만다.
한신교육 현장에서 최대의 문제는, 장공관을 새롭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앞서서 보이지 않는 만우와 장공의 정신을 세우는 일과, 교수와 학생과 직원들 맘에 그리스도의 품격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다. 교수와 학생과 직원들 맘에 그리스도 품격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다. 만우와 장공은 신학교육의 목적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 완전히 일치하였다. 교정에 세워져 있는 돌비에 ‘학문과 경건’이라는 모토는 학문을 하되 경건훈련도 하자는 말 뜻이 아니다. 그 둘을 병행하자거나 조화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그 참 뜻은 신학이라는 학문은 영적 경건의 토대 위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한신의 신학교육은 너무나 지식편중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스도 품격형성을 위하여 채플 횟수를 늘리고, 영성과목을 늘리고, 학년 초의 신앙수련회와 생활관 경건회 집회를 강화하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신학교육의 지향성이며, 맘의 자세이며, 영의 깨어 있음이 중요하다. 고도의 역사비평 강의가 이뤄지는 강의실은 동시에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감격과 말씀에 대한 사랑과 애모가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교수가 목사를 만들어 낸다는 교만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학교수는 성령이 신학도의 심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수태시키고 탄생시켜가는 신비한 제2, 제3 성육신 사건의 과정에서 ‘조산원 역활’로서 겸허한 봉사라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영광이고 최선의 성공인 것이다.
(2) 예배공동체가 살아나야 하고, 예배를 연출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신학교의 예배시간에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 경험’을 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만우와 장공은 신학교육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면서도, 교회를 사랑하고 섬긴 목회 지향적 신학자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인식해야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도 아니고 평안도 사람도 아닌 만우는 당시 조선장로교 상징교회인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했고, 김천 황금정교회, 서울 성남교회를 섬겼다. 장공은 그 바쁜 조선신학교육의 혁신과업 중에서도 경동교회 당회장을 10여년 감당하면서 강단을 지켰고, 지금 성북교회의 기틀 마련에 큰 몫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교회주의자’를 가장 싫어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였다. 교회를 건물이나 종교적 인간의 집합체로 착각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살아있는 영적 세포들로서 신자 그리스도인의 영성 함양에 주력하였다.
신앙생활과 훈련에서 ‘예배’는 그 중심이다. 신학교육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고, 감동을 잃고, 형식과 의무 시간으로 변질될 때, 신학교육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한신이라는 신학교육의 장에서 여러 곳이 문제이지만, 가장 시급히 ‘응급치료’를 해야 할 부문이 채플시간이다. 채플참여를 의무화하였다는 것 자체가 신학교육의 ‘사망신고서’를 하나님 앞에 교수단과 학생들이 함께 연서명하여 제출한 셈이다. 채플시간 하나하나의 순서가 만우의 예배론에서 강조하듯이 “지극한 동경과 경건과 신비와 열정과 엄숙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진 복음성가, 제3류의 딱딱한 신학강의조 설교, 학교를 방문한 외래인사들에 대한 예우적 차원의 강당 제공, 그리고 학사업무와 학생회 광고시간으로 오염되어 있다.
(3) 만우의 ‘복음주의적 경건신학’과 장공의 ‘개혁주의적 역사참여신학’은 신학교육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동시에 살아있도록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보이는 ‘빛의 원무(圓舞)’를 출 수 있다.
만우와 장공의 신학을 한신신학 교육과정에서 살려내는 방법론적 메타포를 나는 물체의 원운동에 있어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팽팽한 균형’으로써 은유하려고 한다. 아는바 대로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중심으로 쏠리는 힘을 구심력이라 하고, 원운동을 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관성의 힘 때문에 원의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보름달 어린이들이 숯이나 나무 조각을 깡통에 넣어 불을 붙여 돌릴 때,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과 균형을 이룰 때라야만, ‘빛의 원무’가 지속될 수 있다. 만우는 신학교육에 있어서, 신학도들이 구심력을 증진시키도록 노력한 분이다.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감격적 신앙?중생체험?신률적 성화노력?하나님 말씀만의 강조?교회 본연의 일과 세속적 일의 엄정한 구별요청 등은 모두 신앙의 구심력 증진을 위한 것이리라.
한편 장공은 성육신의 영성을 강조하되 그리스도인의 사회와 역사를 그리스도 형상을 덧입도록 변화시켜야 한다는 역사참여와 문화변혁이론?우주적 공동체 형성의 비젼?교회의 정치적 책임 강조 등은 신앙의 원심력 증진을 위한 것이리라.
장공의 원심력을 잊어버리고 만우의 구심력만 강조하는 신학이나 목회는 결국 교회주의와 개인영혼구원이라는 내면적 외딴섬 신학으로 전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만우의 구심력을 잊어버리고 장공의 원심력만 강조하는 신학은 기독교 정체성의 약화와 구체적 교회성장의 둔화를 초래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을 평면적으로 보면 몰트만이 말하는 복음의 ‘정체성-의미 관련성의 딜레마’(dilemma of identity-relevance)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면, 만우?장공의 신학적 ‘차이’는 딜레마(dilemma)가 아니라 복음적 진리가 항상 드러나는 형태인 역설(paradox)인 것이다. 양자를 딜레마라고 생각할 때는 항상 진퇴양난의 궁지를 생각나게 하지만, 역설이라고 이해 할 때는 보기에는 모순 또는 불합리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올바른 것을 나타내는 ‘대극일치’의 언설이다. 성서적 진리는 변증법적인 것도 아니고, 딜레마가 아니라 언제나 역설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우?장공신학은 그 공통점 못지 않게 엄존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위대한 선생의 신학은 후학들인 우리에게 딜레마로써 항상 긴장갈등 상태 안에서 힘겹게 견디어 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 일치로써 ‘생활신앙’과 ‘신학교육 과정’ 안에서 체현되어야 할 것이다. 두 분의 신학과 영성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하는 ‘딜레마’로써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숙한 제자직의 영성 안에서 ‘역설적 일치’로 파악되고, 그러한 ‘역설적 일치’를 체현하는 한신신학이 될 때, 만우?장공의 신학과 영성은 한신신학교육현장과 기장목회현장에서 올바르게 통전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