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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서] 내가 모신 강원용 목사님

고(故) 강원용 목사 추모 단상- 경동회보(2006년)

박경서(대한민국 인권대사)
     
나는 지금 강 목사님 소천하신지 2주일이 넘었는데도 문득 문득 목사님의 전화가 오려니 기다리곤 하는 착각에 사로 잡혀 산다. 50년을 내가 모신 셈이다.  대학교를 서울에 오게 되면서이다. 1957년 대학 일학년 때 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원래 전라남도 순천 승주교회에서 유년시절의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일제시대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본 찬송가를 부르면서이다. 나덕환 목사님으로부터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중학교를 광주서중으로 옮기면서 백영흠 목사님에게서 신앙훈련을 받고 대학을 서울로 오는데 백 목사님께서 우리 모두를 서울의 강원용 목사님에게 집단으로 떠 맡기셨다. 지금도 그때의 친구들과 같이 경동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러니 예장의 내가 기장의 목사님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하긴 그때는 예장, 기장이 갈라지기 전이니 말이다. 이런 연유로 목사님의 초교파운동에 처음부터 길들여졌고 나의 스위스 제네바 소재 WCC 18년간의 봉직도 초교파운동을 더욱 공공하게 했음이리라. WCC도 강원용 목사님의 추천(한경직, 김관석, 박형규 목사님도 함께 추천)으로 스위스 생활을 했으니 나의 초교파 운동의 시초는 나덕환, 백영흠, 강원용 목사님들이 후원하셨다고 믿고 있다.
    
내가 강 목사님을 근거리에서 뵙기는 1960년 4. 19 혁명 직후였다. 내가 책임 맡고 있었던 한국 학생사회학회 주최의 “4. 19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강연회에서 당시의 최문환 사회학과 과장 선생님 인사말 그리고 나의 취지 설명에 이어 강 목사님이 첫 번째 연사로써 강연하시면서다. 강연은 함석헌, 이동원, 신상초 선생님으로 이어졌는데 목사님은 “나는 지금 급히 방송국으로 가야한다. 내 둘째 대영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자식 잃은 아버지의 슬픔에 대해 대담을 하러 가야한다. 하시면서 나 더러 한번 들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문리대 교정을 황급히 떠나셨다.  그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하고 4년 후에 경동교회로 찾아 뵈었 드니 신문기자 보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운동이 더욱 한국사회에 의미가 있다고 타이르시는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65년 5월부터 나는 목사님을 모시고 아카데미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고 그분에게서 세계를 배웠고 참 평화를 배웠고 신앙에 기초한 사회운동이 무엇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오늘의 내가 되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목사님의 다른 아들이라고들 한다.

1978년 8월부터 아카데미가 추진하는 프로그램에 당국의 감시와 압력이 왔다. 1978년 8월 월간 ‘대화’는 폐간을 당했다. 노동자, 농민들의 수기를 실은 게 문제가 되었다. ‘대화’ 잡지의 사회비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원장인 강원용 목사님 그리고 부원장인 내가 아무리 수습하려해도 1979년 4월부터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반공법 25조 사건은 사전에 잘 계획된 독재정권의 음모로써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나는 우리 사건을 독재에 항거한 여러 사건 중의 하나로써 크게 자부하고 있다. 
    
이 사건은 목사님에게 큰 고초를 안겨드렸다. 남산 정보부 지하실에서 큰 곤욕을 치르게 하신 걸로 지금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 후 나 역시 끌려가 보니 옆방에서 우리 직원들, 교육생들이 고문당하는 소리는 끔찍했다. 목사님께서 이 사건은 원장 부원장의 책임이었다고 항변하신 흔적을 보면서, 또 당신이 모든 책임이 있다고 증언하신 기록을 보면서, 그곳 지하실에서 목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돌아가신 날까지 이러한 고초를 훈장처럼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역사의 발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곤 해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들을 훈장처럼 내세우는 오늘의 값싼 현실을 보면서 나를 성찰하게 만들 으셨다. 나는 목사님을 통해서 이러한 고초는 담담하게 치루어 가는 역사발전을 위한 개인, 단체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후 나는 한국에서 살 수 없어서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다. 목사님이 중앙위원이시고 실행위원이라 나를 강력히 추천하여 14대 1의 경쟁을 뚫고 WCC 아시아 국장에 임명되었다. 목사님은 WCC 라는 국제기구에서 아시아를 위해서 싸우셨다.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5가지 언어가 WCC 공용어인데 이 언어들은 식민지 국가들의 언어라고 하시면서 중앙위원 누구나 WCC 회의에서 자국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고 설파하여 지금 이것은 본인이 통역을 대동하는 조건으로 WCC에서 자국어를 사용 할 수 있도록 실시되고 있음도 그분 덕 일 것이다. 그만큼 목사님은 14년간의 긴 WCC 중앙위원 그리고 실행위원 으로서 아시아를 비롯한 제 3세계의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너무 잘 하셨기에 400명의 직원들 뿐만 아니라 제 3세계 교회들에게서 늘 박수를 받으셨다.
    
1965년 11월 16일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가 이양구 최태섭 양 당시 이사님들의 기증된 수유리 땅위에 독일 정부 및 교회의 원조를 받아 준공하게 되었다. 15일 밤 갑자기 물이 나오질 않았다. 물탱크에 물이 없으니 내일 준공식에 물이 없다는 사실은 오시는 손님들에게 어찌할까 실로 아찔했다. 그때 목사님께서 경동교회의 황영시 장노님을 나에게 소개하셨다. 당시 황장군님은 수경사 참모장으로 계셔서 긴급으로 군을 동원 물 문제를 해결했던 기억이 난다.  위기에 처했을 때의 기지는 목사님에게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한다.  1970년 11월 16일 수원 사회교육원 준공식을 무사히 치루 었는데 기증된 물품, 미술품, TV, 오디오, 선풍기 몽땅 도둑을 맞았다. 목사님은 못사는 이웃들이 필요하게 쓸 테니 기증한 셈 치자고 하시면서 담담해 하시는 대범을 보이시면서 침묵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18년간의 긴 제네바 생활을 마치고 2000년 1월 1일 자로 귀국했다. 목사님은 자나 깨나 민족의 문제를 생각하셨다.  “6자회담은 꼭 성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4개의 강대국 미, 소, 중, 일이 우리 분단에 책임이 있는 나라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도움 없이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남 북 공조를 이끌어 내면서 4개국의 축복도 동시에 얻어야 되는 2중의 어려움이 있음을 늘 가르쳐주셨다. 이 가르침은 오늘의 내가 인권대사로써 업무수행 하는데 특히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데 지침이 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1994년의 일이다. 북에 하나 밖에 없는 누님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셨다. 그때 나는 북에 출장을 자주 갈 때라 그곳에 얘기하여 누님의 편지를 조카가 대필해서 주는 걸 목사님께 전달하였다. 편지를 받으시고 그렇게 서럽게 우시는 목사님을 뵈온 적이 없다. 그 사이 목사님의 누님도 돌아가셨다. 그렇게 그리든 북녘의 누님과, 8살에 죽은 둘째 그래서 가슴에 묻어 두고 사셨던 대영이 까지 목사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지금 즐겁게 해후하고 계실 것이다.
   
떠나시기 10일 전에 나 그리고 한명숙 총리,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이 저녁 식사를 모시고 같이했다. 8월 5일 프라자 호텔 중국식당에서 목사님께서 소집한 만찬이었다. 신인령 우리 아카데미 당시 노동사회부장이 이화대학 총장 4년을 무사히 마친 축하연을 당신이 직접 주선하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소천하시기 전 마지막 만찬이었다. 그날의 목사님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는 결국 90평생을 현실에 안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가는 끊임없는 도전을 위해 살다 가신 분이라 다시 확신하게 하신다. 대화의 내용은 이글의 말미에 적겠다.
    
1975년부터 1979년말 까지 그토록 신명나게 탐닉 하셨던 크리스천 아카데미 중간집단교육도 당신의 깊은 고민과 깊은 철학에서 계획 하신 것이다 개혁을 추구 독재에 항거한 세력이 성공하면 이 개혁세력이 다시 독재세력이 되어 그들 나름의 아집을 갖게 되므로 이를 타파하고 부정하며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중간집단이 필요하다는 신앙고백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목사님은 50대에 주창한 호랑이와 뱀 사이에서 라는 책에서 갈파 하셨듯이 비들기 같은 순수함에 뱀처럼의 예지를 늘 주장하셨다.
   
참된 민주화를 그렸었고 또 민주화란 미명하에 다시 고착되는 또 하나의 아집을 끊이없이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변증법적 발전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목사님의 Between & Beyond의 사상은 소위 극우와 극좌를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찾게 하고 그래서 새로운 제 3의 세계를 그리는 과정으로 사회발전을 보았다. 어쩌면 헤겔의 변증법의 역사발전 원칙이라 보아질 수도 있지만 그의 사상은 대화라는 또는 자기와 틀린 남을 다시 껴안아 보면서 그 속에서 참 존재를 찾아 같이 고민하고 새로운 것을 같이 모색하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신앙고백이 있기에 훨씬 폭이 넓다 하겠다. 이 사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형이 상학과 형의하학의 사이에서,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다같이 적용되리라.
   
목사님은 일생 합리적 보수와 이성적 진보사이에서 대화를 통해 보수와 진보가 새로운 제 3을 추구한다고 믿었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양쪽에서 오해를 받곤 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나도 아카데미 사건에서 종종 “원장님 좀 더 우리 과격하게 나아갑시다.” 하는 젊은 혈기를 내세웠지만 오늘의 현실 속에서 나의 임무 수행에 목사님의 그때가 지금의 나라는 것을 고백한다.  4.19 직후 문리대  대강당에 모인 20대의 4. 19주역들인 우리들 2000명 앞에서 “학생들은 부정부패를 거부하고 독재정권을 거부한 거룩한 민주세력의 교두보임엔 틀림없지만 제군들이 다시 데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착각 즉 데모크레이지(Democrazy)에 합임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 모두는 창조주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자기를 꾸준히 성찰 할 줄 아는 성숙된 젊은이가 되라.” 라고 갈파하셔서 젊은 학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강원용 목사님을 그리면서 오늘의 한국의 현실이 그를 다시 필요로 한다고 고백한다.
 
앞서 말한 8월 5일 저녁 6시 30분부터 9시 30분의 3시간 동안의 저녁식사는 우리가 목사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고별 만찬이었다.

“명숙아 총리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국민이 않혔는지 생각해라. 그리고 평화 정의에 위배되는 일, 부정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고치기 어렵다고 느껴지면 박차고 나오는 용기를 가져라,”

“인령이는 지난 4년간 이화대학 총장 하면서 고생이 많았다. 개혁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 그래도 그만큼 성공했으니 참 큰일 했다. 몸을 늘 추수리고 건강 해야지. 일년 안식년이면가평에 와서 쉬어라...”

“경서 남북의 문제가 고착되어 가고 있다.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자유권은 무슨, 우선 북녘 사람들의 생존권 해결을 해놓고 자유권을 논 해야 되지 않나 ?. 아무런 효과 없는 미사일 발사는 이제 약효가 없는데 네가 김정일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봐라...”
    
목사님은 가셨다. 마지막을 살폈던 의사선생들이 목사님은 당신의 모든 장기를 100% 소진하고 떠나 셨읍니다 라고 말 했다.  일생을 휴가 한번 하지 않은 분, 단 30분의 간격도 못참는 분, 그리고 또 다음 일을 추진하셨던 분, 가난하게 자랐지만 금전에 초월하셨던 목사님 그는 분명 우리 곁에서 멀리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제 목사님 휴가 하십시요.
   
그런데 지금도 나는 “박경서...오늘 저녁 시간있지?” 하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으니 왜 나는 이 착각에서 헤어나질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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