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이 제기한 ‘한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성서는 어떤 책인가?’라는 이 물음은 다양한 대답을 불러왔다. 앞의 글들에서 언급 된 것처럼 일단의 과격한 여성신학자들은 성서가 철저히 가부장적 산물이므로 남녀평등의 근거는 없다면서 성서 너머로 나아갔다. 그러나 휘오렌자는 비록 성서가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그 문자들은 가부장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여성억압적인 문서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재건하여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에는 남녀평등한 역사가 실재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재구성하여 읽는 성서는 여성에게도 중요한 유산이 된다고 하여 성서를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구약성서신학 교수였던(지금은 은퇴하였음) 필리스 트리블은 이 물음에 대한 독특한 해답을 또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수사비평학(rhetorical criticism)적 방법으로 아름답고 탁월한 성서해석을 하는 이름난 성서 신학자이다. 트리블이 여성신학적 관점으로 성서를 다시 읽게 된 동기는 메리 데일리의 성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듣게 되면서 데일리와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음을 밝혀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라 한다. 메리 데일리가 “성서가 하와를 부정적으로 이미지화 하는 한 성서는 여성에게 해방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트리블은 “창세기 2~3장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우정, 『여성들을 위한 신학』에 게재되어 있음, 한국신학연구소)이라는 글을 써서 창세기 2~3장에 나타나는 유대-기독교의 남녀관계에 대한 문서를 전통적인 남성신학자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명으로 해석하였다.
트리블은 창세기 2~3장에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고 함으로 인해 여자는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남자보다 나중에 창조되어 열등한 존재라고 하고, 또한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기에 보조적 존재라는 등, 종교개혁자들로부터 현대 남성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그렇게 해석하여 왔음을 속속들이 들추어 낸 후 갈비뼈로 창조됨은 남녀의 동등한 연대성을 말함이며, 나중에 창조됨은 히브리 문학적 구조에서 볼 때 창조의 클라이막스 혹은 완성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돕는 배필은 하나님의 도움 같은 완전한 도움의 존재로서 절대적 존재라는 등 이전의 해석과는 완전히 전도된 해석을 전개한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의 기록을 철저히 보면 아담의 이미지가 휠씬 무능력자요 방관자요 책임 전가자와 같은 부정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하와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전통신학의 해석의 오류이지 성서자체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방식으로 인해 트리블은 류터와 같은 유형의 여성신학자로 분류되어 진다.
그런데 트리블의 성서해석은 전적으로 성서 본문을 천착하여 읽는 문학비평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언어의 수사학적이고 문체적인 특징이 어떻게 그 해석을 밝혀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모든 글들이 이 방법을 통과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글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그의 책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1978, 유연희 역, 태초, 1996)의 2장에 나오는 “은유로 떠나는 여행” 편을 꼽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솔로몬의 재판이야기로부터 출발하여 ‘연민’이라는 단어가 여성의 신체기관인 ‘자궁’에 어원을 둔 것이며 하나님의 속성인 연민은 바로 생명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여성 자궁의 특성에 은유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머니로 은유되어진다는 결론을 참으로 명쾌하고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다. 이렇듯 수사비평학적 방법에 몰두한 그는 역사비평적 방법 등 분석적인 성서해석 방법을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연애편지를 읽는 사람이 그 편지를 보고 언제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등등의 분석을 하면서 읽겠는가? 그냥 본문의 흐름을 따라 감정을 따라 끝까지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성서도 이와 같이 읽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그는 그의 특유한 표현으로 “성서를 순례한다”고 말한다. 독자가 성서의 본문을 따라 계속 읽어 나가노라면 성서 안에는 성서가 성서 자체를 해석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여성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군주적인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 만난 하나님은 자비요, 사랑이요,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인정하는 분이시며, 폭력을 미워하고 어지신 어머니로 나타나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것은 성서세계로 여정을 떠나 순례하는 순례자의 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여성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트리블은 성서는 여성해방적인 내용과 여성억압적인 내용 모두를 다 가진 책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성억압적인 내용들이 여성해방적인 내용에 의하여 새로이 해석되고 수정되어 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라는 트리블의 명제는 그가 쓴 또 하나의 걸작품인 《Texts of Terror(폭력의 문서들)》(최만자 역, 『성서에 나타난 여성의 희생』, 1989, 전망사)와 위에 언급한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의 연결에서 밝혀지고 있다. 《폭력의 문서들》에서 그는 성서 안에서 지극히 작고 힘없는 자로 등장하고 가부장제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네 여성들(하갈, 입다의 딸, 레위인의 첩, 다윗의 딸 공주 다말)의 처참한 희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이 우울한 이야기들, 어떤 해석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은 그냥 이야기로 전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렇듯 희생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반전시키고 여성 긍정적 이야기를 회복하기 위한 희생이야기 책의 짝으로서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을 펴내었다고 한다. 그는 뒤의 책에서 하나님의 모성적 이미지를 다듬어 내고 있으며 『아가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나는 이 두 책들을 연결시키면서 창세기에서 왜곡되었던 남녀의 관계는 아가서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회복되고 있으며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어머니 하나님의 발견과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에 의해 폭력은 극복되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찾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
휘오렌자에 의해 신정통주의라는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트리블의 아름답고 꼼꼼한 성서 본문 분석에 매료되어 그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와 함께 성서를 순례하고 특히 그가 만난 사랑의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성서 본문에만 천착하는 방법이 사회 역사적 맥락과 동떨어지는 해석을 결과한다는 날카로운 비판들을 트리블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 역사적 맥락의 결핍된 해석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또 다른 여성억압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음 또한 부정 할 길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트리블이 《폭력의 문서들》 책 서문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밤을 세워 영원자와 씨름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성서를 순례하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인 것 같다.
여성신학자 최만자는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여성운동에 참여해왔다.
출처: 새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