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가 페미니즘의 근거가 되고 그것을 지지하는가?’ 라는 문제는 여성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엘리자베스 S. 휘오렌자의 해석학적 방법은 앞글의 류터와 차별되면서 주목하게 되는 특별한 관점을 제시한다.
‘성서 안에 남녀의 평등을 분명히 제시하는 근거가 있는가? 성서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선뜻 분명히 그러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물론 성서는 인간의 평등한 질서와 그 인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력이나 부를 가진 자들에게 억울하게 억압을 당하거나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들고 그들의 인권을 세우는 분임을 밝히고 있으며 민중신학 혹은 해방신학은 이러한 성서의 근거에 든든히 서서 그 신학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에 관하여서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함을 정당화하거나 여자가 남자에게 예속되고 복종해야 하는 질서를 요구하는 본문들이 더 두드러지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예를 들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나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 등). 그러한 성서본문에 근거하여 기독교 2천여 년 역사는 교회 안의 여성들에게 남성에게 복종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고 교회 안에서도 잠잠히 지내고 남성지도자들의 지도를 받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성차별주의를 강화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차별 질서는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가 가지는 남성중심주의를 정당화하고 그 지속을 보장하는 신념으로 작용하여 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페미니즘 인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문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성신학자들은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해석학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페미니즘과 성서는 도저히 대화할 길이 없다고 보고 성서를 넘어서는 포스트 비벌리칼 페미니즘(post-biblical feminism)을 선언하는 이들이다. 둘째는 성서의 본질은 남녀의 평등함(비 가부장적)의 메시지이며 성서 가운데는 비가부장적 본질의 전통이 있는데 바로 예언자적-메시아적 전통(R.R.류터)과 성서의 해방전통(레티M. 러셀)이며 성서는 가부장적 요소와 비가부장적 본질의 두 가지가 함께 있다(필리스 트리블)고 하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탈 기독교적 해석과 기독교 안에 머무르면서 기독교를 개혁하려는 개혁적 해석학의 방법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대부분의 여성신학자들은 후자의 범주에 속하며 그래서 성서의 비 가부장적 본질을 밝히기 위한 성서 재해석의 방법이나 개량적 수정적 방법을 가지고 여성의 관점으로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S. 휘오렌자도 크게는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신약성서 신학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를 굳이 제 삼의 범주로 분리하고자 한다.
휘오렌자는 1984년 [Bread Not Stone]이라는 책에서 여성해방적 성서해석의 전개를 시작하였고 1987년에 나온 그의 책 [In Memory of Her]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우선, 성서 본문 자체가 가부장적이라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성서의 본질이 비 가부장적이고, 성서 안에 여성해방적 전통의 근거가 있다는 등의 개혁적 성서해석 방법론의 한계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휘오렌자의 비판은 첫째로는 가부장적 성서 안에 비 가부장적 본질이 있다는 말은 ‘정경 안의 정경’(cannon within cannon)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성서의 정경성이 거부되고 성서 안의 특정한 내용만이 정경으로 채택되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여성해방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여성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옹호와 성서 권위의 옹호에 일차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여성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해석 보다는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한 노력이 우선적 관심이 되고 있으므로 휘오렌자는 개혁주의적 여성성서 해석을 신 정통주의라고 평가한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성서는 가치중립적인 책이 될 수 없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치적 무기로 작용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휘오렌자는 성서의 문자로서의 본문은 가부장적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성서의 문자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에서는 남녀평등 공동체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초기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에 여성해방의 성서적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비록 가부장적 요소로 가득찬 문서이지만 그 문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이 비가부장적 본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부장적 성서일지라도 여성해방의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서의 계시는 그 문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 공동체의 경험 위에 있다”라고. 성서 본문을 통한 초기 공동체의 역사의 재건은 바로 여성해방(남녀평등)의 역사적 경험의 근거를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다. 평등공동체 역사의 재건을 휘오렌자는 갈라디아 3:27-28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 고백문을 실마리로 잡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표준 새번역)
휘오렌자는 그래서 성서가 속속들이 가부장적 문서라서 그것을 넘어서야겠다는 혁명적 관점들도 비판하고 성서 중의 특별한 부분이 비가부장적 본질이라는 개혁적 수정적 관점도 비판하면서 성서가 가부장적이라 남성들만의 유산이라는 주장들을 거부하고 성서를 통한 기독교 공동체 역사의 재건을 통하면 성서는 여성들의 유산이요 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성서를 이전처럼 평면적, 문자주의적으로 읽는 것을 비판하고 의심의 해석학으로, 선포의 해석학으로, 회상의 해석학으로, 그리고 상상력의 해석학으로 읽기를 권유한다. 그리하여 성서는 그 안에 얼마나 남성중심적 번역과 해석들이 있으며, 남성의 관점에서 성서가 편집되어 왔는가를 의심하면서 분석하여 낸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가 초기에 얼마나 남녀평등한 공동체 이었던가를 또한 밝혀낸다. 그가 재건해 낸 예수 공동체에서 예수의 제자직을 참으로 수행해 낸 제자들은 남성들이 아니고 여성들이었다. 예수는 참 제자직을 ‘섬기는 자’,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정의 하는데 그것을 수행한 이들은 예수의 성공 이후 자리다툼을 하던 남자 제자들이 아닌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고난 받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이해한 이는 남자 제자들이 아니었고 십자가를 향한 노정에 예수에게 향유를 바른 여인이었으며 예수는 그 여인의 행위를 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기억하는 모든 곳에서 이 여자가 행한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책 [In Memory of Her]는 바로 이 여자를 기억하라는 예수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성들이 예수의 참 제자였다는 것만 아니라 사랑과 봉사의 제자 상을 강조한 요한공동체도 여성중심의 공동체였을 것으로 보았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이르러서도 여성과 남성은 매우 평등한 역할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은사에 의하여 서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휘오렌자는 보았다. 휘오렌자는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 여성들이 많았고 상당한 수의 부유한 여성들이 교회 중심에서 활동하였으며 초기 가정교회들은 여성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음을 밝힌다. 그러나 교회가 점차 제도화 되면서 가부장적 교회로 변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는 그러한 교회의 가부장화 과정을 위에서 언급한 갈라디아 3:28이 어떻게 수정되고 교회 안에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되어 나가는가를 이 책에서 속속들이 추적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 라는 짝말들의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질서가 바울 자신에게서, 그리고 바울 이후 문서들에서 평등이 아닌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수정되는 과정들은 휘오렌자의 날카로운 성서분석에서 모두 드러나고 있다. 골로새서, 베드로 전서, 에베소서 등의 서신들에 나타나는 그 변형의 자리들은 너무나도 역력하다.
휘오렌자를 독파하면 여성신학을 대부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독교 가부장화의 역사적 과정과 핵심요인들을 그는 낱낱이 찾아내고 분석하고 있다. 휘오렌자 또한 한국을 다녀갔다. 그가 왔을 때 가톨릭 여성들이 대거 집회를 가지면서 여성들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의 방법론에 의해 “여성신학의 출발은 해방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경험에 있다”는 말이 성립되었다. 역사비평적 성서해석 방법에 대한 비판과 그 한계점에 대한 지적이 높지만 나는 아직도 역사비평적 방법을 통한 여성해방적 성서해석 방법을 지향하는 휘오렌자의 방법론을 지지하게 된다. 그의 역사적 예수연구 그룹이 과학적 근본주의로의 선회할 것에 대한 우려는 지나칠지 모르지만 그것 또한 귀담아 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페미니즘 인식을 가진 여성들이 성서에 대하여 갖게 된 고민으로 말미암아 여성신학은 다양한 상황의 다양한 그룹들이 성서해석을 새롭게 하기 위한 길을 여는 데 공헌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장에는 또 다른 여성신학자의 성서해석 방법이 이야기 될 것이고 그것은 다양함의 또 하나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성신학자 최만자는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여성운동에 참여해왔다.
출처: 새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