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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윤응진·한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

대학교회 설교
2003.4.20.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누가 24:1-12)


1. 죽음의 세력이 승리하다.
종려주일의 환희는 사라지고, 제자들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기필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폭력과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섬김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처참하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만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환호하던 민중들은 사라지고,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증오심과 분노로 예수님을 희롱하는 군중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체포된 예수님은 결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여느 사형수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마저 달아나고 없는 그 골고다 언덕에 그는 홀로 십자가에 달린 채 죽어갔습니다. 그의 발 아래에 있던 무리들은 조롱하는 구경꾼들과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누어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어 갔습니다.
제자들은 멀찍이 떨어져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메시아가 그냥 맥없이 죽지는 않으리라는 마지막 기대를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 15:34, 마태 27:46) - 이 탄식과 함께 그는 숨졌습니다. 그는 군중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제자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죽어 갔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승리하고 만 것입니다. 힘이 승리하였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정치논리가 정당화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규정되었고, 따라서 인간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 마땅한 인간, 하나님도 외면한 인간으로 확인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범죄적 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이 받은 충격과 혼란, 그리고 불안감과 공포를 어떻게 표현하여야 할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의 가르침,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가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새로운 삶의 실천들도 모두 정죄받고 무효화되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현실성이 없는 이상주의적 실험으로 판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무덤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의 육신은 시체가 되어 썩어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이제 그가 무덤에서 썩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놀라워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거기가 그의 자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부활- 우리의 상식을 깨는 사건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에 따르면, 안식일이 끝나고 먼동이 틀 무렵,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도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 증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관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땅을 파고 사체를 매장하지 않았고, 동굴에 넣어두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 바로 앞쪽에는, 아리마대 출신으로 의회의원이던 요셉이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기대조차 지니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다만 그들의 좌절된 과거와 해후하기 위하여 거기에 갔을 뿐입니다.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생명력 없는 사체였습니다. 그 사체와의 작별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들고 간 것이 향료였다. 아마도 여인들은 그 향료를 예수님의 주검에 발라드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는 없었습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에서 볼 때, 무덤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이 사실을 여인들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볼 때, 거기에는 분명 예수님의 사체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깨뜨리는 이 사건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하였고, 당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마지막 안정과 위안마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혼란에 사로잡힌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24:5)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천사들이 말하는 '살아 계신 분'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요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여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진리 안에 있는 삶, 사랑 안에 있는 삶, 즉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삶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니, 거기에는 하나님 자신의 삶이 현존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암흑이 지배하는 세계 한복판에 하나님에 의해 불붙여진 빛이 있었으며, 어떤 악의 세력도 극복할 힘이 있었으며, 결코 절망하지 않을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식했던 그 분이 그들의 눈앞에서 상처투성이의 시체로 변하여 무덤에 묻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인들은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의 질문이 바로 그 모순 안으로 파고듭니다: 그는 살아계신 분임을 너희도 인식하였느냐?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돌아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과 천사들의 부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24:1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있어야만 한다는 상식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패배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마저도 빈무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첫 번 부활절 아침은 부활에 대한 확신도 믿음도 없이, 기쁨도 환희도 없이 동이 텄습니다. 오직 천사들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으며, 제자들은 그 증언 앞에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부활의 기쁨을 나누려 합니다. 우리가 사도들보다 더 큰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부활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에, 사도들이 경험한 충격조차 느끼지 못한 채, 단지 관습적으로 부활절을 축하고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내용은 '하나의' 기적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식을 깨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이 세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 곧 로마 제국주의와 종교적 교권주의 앞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혁명 운동은 실패로 판명나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패배와 지배자들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일 그 사건은 결국 철저히 뒤집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배자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패배로 인한 충격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세계의 주님"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위의 하늘에서만 진정한 주님이며, 지상에서는 여전히 로마 황제가 살아있는 주님이다. 예수님도 결국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처형되고 말았지 않은가? 현실은 황제와 그의 하수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힘이 곧 정의이다." 이 땅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확고한 '신앙' 때문에, 그들이 지녔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란 다만 순수한 이념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겪은 충격적인 체험으로 인하여, 로마 황제와 대제사장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예수께서 걸어간 그 길을 뒤따른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 여겨졌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들은 급속히 현실타협적인 존재들로 변모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세속적인 형태의 '신앙'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세상에 대해 위험한 존재들이 아니었고, 따라서 진정 도움이 되는 존재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사들의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의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철저히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혁명을 동반합니다. 이 혁명은 제자들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즉 삶 전체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그들을 바로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대하여 위험천만한 존재들로 변화시킵니다.
이 부활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성서는 침묵을 지킵니다. 부활을 바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나 바울에게도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의 밤'(헬무트 골비처)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두 번의 밤들이 있습니다. 그 밤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축제를 즐기는 시간이었지만, 사도들에게는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지닌 죽음의 권세 앞에서 굴종할 수밖에 없던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외관상 하나님의 침묵이 지배하는 시간이었으나, 실제로는 죽음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릴 하나님의 나라 혁명이 성취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패배를 통한 승리, 실패를 통한 성취! - 이 놀라운 역전이 그 절망과 침묵의 시간에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극복한 죽음은 죽음 이전의 죽음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모두 누린 사람이 맞게 되는 자연적인 죽음 이전에 강요된 정치적 살해를 극복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주의자들과 유대의 정치 및 종교 지배자들은 반체제 운동가의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 혁명의 불씨를 꺼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채찍 맞고 속옷마저 빼앗긴 채, 로마 평화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죄인으로 처형된 사형수를 되살림으로써, 하나님은 빌라도와 대제사장, 그리고 헤롯왕의 정치적, 종교적 논리를 뒤엎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사건을 통해, 처형당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고, 처형한 자들의 죄악과 그들이 섬기던 제국주의 체제가 이루어 놓은 구조악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철저히 뒤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사건입니다! 이처럼 부활사건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난 기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기준과 가치관, 그리고 이른 바 '정상적' 사고 방식을 철저히 뒤엎는 혁명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미 로마 제국주의와 유대 종교집단에 대한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처럼 철저한 반전(反轉, Umkehrung)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즉 확실한 것(das Gewisse)이 매우 불확실하게(zweifelhaft) 되었으며 불확실한 것이 매우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셨던 약속과 희망이 세계에 아직도 유효한가라는 불확실성은 부활에서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무효화되고만 것처럼 보이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과연 진리인가라는 불확실성이 부활에서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과연 구원의 길, 즉 참된 삶의 길인가라는 불확실성이 부활에서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확실한 것으로 간주된 것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불확실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즐거운 의심'(헬무트 골비처)을 지니게 합니다: 즉 부활은 죽음의 세력이 이 땅을 지배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하여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희망이 없다는 고정관념에 대하여 의심하게 합니다; 세상만사는 변화될 수 없는 죽음의 법칙에 따라 굴러간다는 관념에 대해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우리의 고난은 무의미하다는 관념에 대해 의심하게 합니다; 정의보다는 힘이 우월하다는 관념에 대하여 의심하게 합니다; 진리가 거짓에 패하고 만다는 생각에 대하여 의심하게 합니다. 이러한 '즐거운 의심은' 곧 흔들리고 말 낙관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즉 부활절의 현실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이 부활의 메시지에 의해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 곧 부활로 인한 '즐거운 의심'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투쟁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부활의 메시지가 없었다면, 초대교회는 탄생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3. 살아계신 분을 죽은자들 가운데서 찾지 말라!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들은 늘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아니, 그를 무덤에 가두어 두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국주의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교회들은 거의 늘 힘과 물질에 굴복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에 우리가 듣는 메시지는 교회들이 걸어간 길과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전세계적인 반전 평화 시위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이라크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올해의 사순절 기간에는 숱한 민간인들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격을 받았고, 상처입었으며, 또한 살해당했습니다. 부시가 승리한 채, 이라크 침략전은 끝나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미국의 승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가 미국이 저지른 침략전의 만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은 슈퍼맨처럼 만능의 승리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국주의자들의 제물이 된 패배자로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이 슈퍼맨처럼 승리자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패배자 예수'를 통해, 그의 약함과 고난을 통해, 새 역사를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섭리를 축하하는 날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고린도전서 1:25)라고 했습니다. 부활신앙이 기억하는 것은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이 살인자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정당화하는 계절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살인자 부시와 미 제국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죄 없이 죽어간 이라크인들의 희생과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시기를 소망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시는 대량학살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차단하겠다고 이라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숱한 대량학살무기를 사용한 자들은 이라크 군인들이 아니라 미군들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은 침략전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명분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CNN 방송은 후세인의 독재와 사치생활을 폭로하면서 이라크 국민들을 해방시켰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러나 후세인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운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었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있습니다.
미군의 포격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고 두 팔마저 잃은 채 화상에 시달리고 있는 이라크 소년 알리(12세)가 묻습니다: "당신들은 자유를 이런 방식으로 주는가요?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요?" 후세인을 살해하겠다던 미국과 영국은 후세인 대신에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만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미군과 영국군은 해방군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인간들의 생명만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아랍 지역에 4000억 달러에 해당되는 재산상의 피해를 초래하였고, 7천년 문명의 유산들을 파괴하였고, 약탈을 방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꽃피우기 위하여 죽임의 정치에 저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킨 것은 죽임의 정치, 죽임의 종교, 죽임의 문화에 저항하여 생명이 꽃피는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완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절의 주인공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던 사형수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철저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에 직면하여, 파병을 결정한 노무현 정부의 결단은 국익을 위한 지혜로운 결단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막강한 폭력을 지닌 세력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전략적으로 이로울 것처럼 생각됩니다. 모든 생명운동은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침묵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나 찾아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이라크 침략전의 희생자들을 통해 미 제국주의의 폭력을 종식시킬 새로운 생명운동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반전 평화를 외치는 아우성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투쟁 방식은 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피해자가 됨으로써 폭력 자체를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으로 살해당한 김주열을 통해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역시 고문으로 살해당한 박종철을 통해서 전두환 군사독재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가 한국현대사를 통해 경험한 부활사건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해당한 이라크 국민을 통해서 미 제국주의를 몰락시키고 새로운 생명 문화를 꽃피우려는 하나님의 부활사건을 기다리는 믿음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승리를 의심하는 저 '즐거운 의심'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결국 패배로 끝나고야 말 것을 내다보는 믿음의 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폭력을 가진 자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희생자들의 아픔에 연대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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