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영생 및 그 현존방식에 관하여, 문화신학회 2008-05-01]
개신교의 제례 토착화와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재해석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죽음과 죽음이후 생명의 존재방식 및 ‘성도들의 교통’(communio sanctorum)에 관한 신학적 담론을 통하여 한국 개신교 추모의식(祭禮)의 보다 성숙한 토착화를 도모하려는 문화신학적 기초작업이다. 논제에 관한 신학적 담론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할 것이다.
첫째,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신념과 헬라 고전철학적 신념사이의 해석 학적 지평융합에 대한 이해.
둘째, 사도신경의 제3의 문맥 곧 “성령을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항목의 ‘성도들의 교통을 믿으며’ 구절에 대한 바른이해.
셋째, 개신교 추모식에서 총체적 몸언어 표현방식으로서 ‘절하기’에 대한 문화신학적 조명.
2. 죽음이전과 죽음이후 생명의 불연속적 연속성에 관한 담론간의 긴장
2.1. 유교문화의 제례에서 ‘祭如在, 祭神如神在’와 개신교 추모예식의 차이와 갈등을 방치해도 될 것인가?
개신교가 한민족의 삶 속에 받아드려진 이후, 한국 근현대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적지않은 연구가 이뤄져왔다. 2003-2005년, 3년간동안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인문학 육성연구비를 받아 수행된 최근 연구결과보고서로서 다음자료를 참고함이 좋다: 가톨릭신학대학교 내 근?현대 한국 가톨릭연구단 지음(연구책임자 박일영),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상.하)』(가톨릭출판사, 2003); 한신대학교 한국신학연구소(연구책임자 김경재),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연구』 (한국신학연구소, 200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히 상제례의식이 기독교적 형태를 갖추고 보편적으로 자리잡았는가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론이 많다. 개신교 전래이전, 한민족 대부분이 그에 따랐던 유교적 제례의식(祭禮儀式)을 철폐시키고, 새로운 대체할 제례의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추모예식이라고 부르는 제례만을 중심으로하여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며, 그 해법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개신교가정에서 이미 2대-4대 째 기독교 신앙으로 자리잡은 가정에서는 이미 기독교적 제례가 ‘추모식’ 혹은 ‘추도식’이라는 형태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할 경우도 있겠지만, 논자의 생각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 기독교 가정에서 행해지는 죽은이의 기일을 당하여 갖는 종교의식에서 문제본질을 다음 세가지로 요약하려고 한다.
(i) 기독교가정에서 추모식은 가정예배 혹은 기도회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의식자체가 종교적 영성을 결여하고 단지 산자들의 신앙적 다짐, 도덕적 권면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이들과 산자들의 연대의식을 체험하면서, 4차원의 시공적 관계를 넘어선 ‘성도의 교제’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앙윤리적 차원의 시간에 머무는 추모식을 어떻게 종교영성적 차원의 시간으로 복권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추모식을 일상적 시공맥락 속에서 진행하는 ‘기념식’ 차원에서 살려내서, 죽은자와 산자가 소통되는 ‘성도의 교제’시간 속에서 ‘종교의식’으로 승화시키는 문제이다.
(ii) 위의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원인은 복음주의적 교단임을 자처하는 개신교신학 일반의 실재관이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원론적 실재관을 철저히 견지함으로써, 죽음이해와 죽음이후 생명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영혼불멸론’을 곧바로 성서적 관점으로 동일시 해버리는데서 유래한다. 다른 한편 진보적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영혼불멸론’과 ‘부활신앙’은 전혀다른 죽음관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신약성경을 읽는 신도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iii) 구체적으로 성묘나 상가댁에서 조의를 표하는 몸의 동작에서 ‘절하는 행위’를 “우상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의 위반이라고 금지시켰고 대신할 ‘의례적 형태’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 개인에게 맡겨버리게 되었다. 상가댁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기독교 신자들일지라도 그 짧은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고인에게 속말로 대화하는 사람, 아무 생각없이 그져 머리만 숙이고 침묵하는 사람등등 각양각색의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인들이 죽음을 당하여 현대인의 삶의 체험과 상황에 걸맞는 애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소외당하고, 그 결과 삶이 또한 병들어 버림같이, 개신교 기독교인들에게서 ‘제례의식’의 모호성과 혼돈은 그 신앙생활이나 인생관에 치명적 난관으로 되돌아온다.
“공자께서 제사를 지내심에 조상이 앞에 계시는 듯이 하셨고 신을 제사함에 신이 앞에 있는 듯 하셨다”(祭如在,祭神如神在) 『논어』, (三) 팔일(八佾) 는 말의 진의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전통적으로 위 구절을 제례나 신령한 실재에 임하는 사람들의 맘가짐의 태도를 말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령한 실재들의 현존을 합리적 이성으로써 인신론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까, 맘가짐 태도를 경건하게 가지라는 충고정도로 이해한다면 너무나 가볍게 해석하는 것이다. 공자가 예(禮)를 중시한 합리적 인문주의자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자의 합리성은 신령한 실재의 ‘noetic quality’ (윌리엄 제임스)를 인지한 ‘이성의 깊이’(depth of reason, Tillich)가 동반된 인문주의자의 맘가짐이다. 지성이 동의하지 않는데, 어떻게 감성이 진지할 수 있으며, 지성과 감성이 동반되지 않는데 어떻게 성실한 덕성이 실천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인가? 공자의 ‘祭如在, 祭神如神在’ 태도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적 신관과 생명의 영이신 성령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라는 신앙고백의 조명등을 받아서 그 말의 모호성과 불완전성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2.2. “하나님은 산자들의 하나님이요, 그 앞에서는 모든 이가 살아있느니라”(눅 20:38))를 어떻게 이해 할까?
좁게말하면 서양기독교문화사 속에서, 조금 더 넓게 세계문화사를 일별하더라도, 죽음이해에 따르는 죽음이후 생명의 지속에 대한 신념체계는 결국 세가지 캠프로 대별된다.
(i) 제1캠프는 자연주의적 태도이다.
인간의 죽음도 다른 여타 생명체의 죽음과 똑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요, 생명의 순환이며, 마땅이 그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죽음을 신비하게 보거나, 죽음이후 어떤 형태로던지 개체생명의 지속에 대한 상념은 인간정신의 환상이라는 신념을 지닌다. 오늘날의 과학적 생물학을 이끌고 가는 분자생물학 학자들로부터 환원주의적 물질주의자들, 성실한 휴매니스트들, 실존주의자들, 사회주의적 혁명가들, 과정철학 형이상학체계 안에서 ‘객관적 불멸성’을 말하는 화이트헤드 제자들에 이르기 까지 모두 제1캠프에 속한다.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철저한 자연주의적 태도는, 영생과 불사란 생물학적 번식을 통하거나 사회적 가치의 전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서 철저하게 완전히 죽는다. 제1캠프의 자연주의자들을 마음, 이성, 영성을 부정하는 천박한 물질주의자로서 오해해서는 않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념은 마음, 이성, 미의식, 도덕의식, 영성등이 물질적 신체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뿐이다. 신체성이 괴멸되면 그것들도 그 자체 안에서는 살아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ii) 제2캠프는 영혼불멸을 믿는 태도이다.
영혼불멸론은 두가지로 구별되어야하는 나는 잠정적으로 그중 한가지를 ‘본래적 영혼불멸론’( the authentic theory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이라 부르고, 다른 한가지를 ‘소박한 영혼불멸론’( the naive theory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이라고 부르겠다. 첫째 유형은 플라톤이 『파이돈』(Phaidon)에서 피력한 신념이다. 둘째유형은 한국 무교나 통속적 이원론자들이 갖는 견해로서 현세에 살던 경험적 자아가, 사후에 영혼이라 부르는 자기정체성의 실체를 지니고 장소를 옮겨가서 저 세상에서 영생한다는 신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본래적인(authentic) 철저한(radical) 영혼 불멸론은 그 이론의 본질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출생과 죽음 저편에 있는 인간의 신적 동일성에 관한 이론이다”. 율겐 몰트만( 김균진 옮김), 『오시는 하나님』, 117쪽.(기독교서회, 1997)
인도 우파니샤트의 경전, 브라만 종교의 실체론적 아트만을 인연생기설로써 비판하고 나온 불교에서마져도 불성 및 유식사상의 형태로 이어진다. 영혼은 태어나지 아니하고, 연장적 실재도 아니며,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이며, 브라만의 분화형태로서의 작은 신적 불사체로서 초월적 주체성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바로 사멸한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이고 안식이다. 통속적 기독교의 영혼불멸론은 철저한 영혼불멸론과 소박한 영혼불멸론의 혼잡종이다.
(iii) 제3캠프는 인격적 하나님신앙에 철저하게 기초하는 ‘죽은자들의 부활론’이다.
부활론은 제1캠프와 제2캠프견해와 완전히 다른 입장이면서도 두 입장의 어떤 면을 동시에 포함한다. 다시말하면, 성경적 부활신앙에 의하면, 유한한 인간은 철저하게 유한한 존재요 철저하게 무화되어 죽지만(자연주의적 견해와 동일한 면), 없는데서 있는 것을 불러내시고,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변용 변화시키시는 은총의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져’ 영원한 생명이 된다(제2캠프와 결과적 형태상 동일한 면).
기독교의 영생에 관한 신앙체계는 히브리적 생명관 곧 고대 이스라엘의 생명과 죽음이해, 그리고 스올사상을 뿌리로 하고 있다. 구약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히브리적 사유 곧 이스라엘신앙에서 영혼(네페쉬)는 플라톤적인 불멸성을 지닌 신적실재가 아니라 철저히 피조물이며, 먼지(흙)로부터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유한자라는 자각이다(시90:3-4). 김이곤,『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프리칭 아카데미, 2007),15 쪽-35쪽.
스올사상은 본래 기원이 이교적인 것이라고 구약학자들은 상정하지만 위와 같은 책, 26쪽.
, 이스라엘 신앙의 맥락안으로 용해하여 들어오게 되었다. 전능하신 창조주가 생명의 기적같은 탄생,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삶의 시간, 그리고 죽음과 죽음이후에도 여전히 주권자임을 고백하는 신앙맥락에서 발전되어간 것으로 본다. 스올은 산자들과 교류관계가 단절된 곳 혹은 상태이며(삼하 12:23, 욥10:21, 전9:10)),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상태이다(시30:9-10,시115:17).
살아있다는 사실자체를 놀랍게 감동적으로 느끼고 정열적으로 바르게 사랑하면서 살고자했던 이스라엘 신앙인들은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성서의 하나님은 “죽은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들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다. 그러나, 산자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땅위에서 숨쉬고있는 신자들만의 하나님이란 말인가? 스올사상을 가지고 살아온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그럴수 없다. 헬레니즘문화권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상황에서, ‘먼지에서 먼지에로’의 피조물적 인간관, 절대무 상태도 아니고 생동하는 유의 존재상태도 아닌 스올사상, 그리고 헬라문화의 영혼불멸론 그 삼자(三者)가, 살아계신 주권자 하나님 신앙 안에서 분해 해체되고, 창조적으로 재융합되어 누가복음의 말씀으로 나타났다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느니라”(눅20:38). 이 말씀은 산자와 산자 사이 관계만이 아니라, 산자들과 죽은자들과의 관계를 성령안에서 ‘성도의 교통’이라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가능케하는 주춧돌이 된다.
2.3. 바울의 ‘변화된 부활체 신앙’(빌 3:21,고전15:35-53)과 ‘영적 수면론’(요 11:11-27,고전 15:18-20) 사이의 불협화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논 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순수 헤브라이즘의 계승자로서 이스라엘신앙의 단선적 연장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무리이며, 단지 후기 유대교의 신앙이 헬레니즘과 영지주의와 묵시적 종말론과의 혼합형태 이거나, 히브리사상의 헬라화라고 규정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그 창조적 융합의 대표적 인물이 바울임에 틀림없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과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우주적 종교의 영적폭발 사건’으로서 발생하였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기도 하였다.
특히 히브리적 사유 곧 인간을 철저히 흙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파악함으로써, ‘땅의 존재로서의 육체적 존재’가 그대로 신령한 존재에로 전이(轉移)한다는 불멸사상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 신비체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체험을 하고서, 그는 질적으로 다른 두 유형의 죽음이후 생명의 존재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을 생명체의 근본적 형태변형(metamorphosis)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화해시켰다. 구체적으로 지상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 그리스도 안에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transformation)되고 ‘변용’(transfiguration) 되다는 신념을 피력하게 되었다.(고전 15:54, 빌 3:21)
동아시아적 사유체계에서 인간생명이 자연의 가장 영묘한 결과물임을 인지하지만, 하늘기운과 땅 기운의 가장 수려한 기운으로 형성된 ‘혼백’(魂魄)은 결국 우주의 원기(元氣)에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중국사상에서 귀신과 제사에 관하여는 다음자료를 참고. 溝口雄三?丸山松幸?池田知久 편저, 김석근?김용천?박규태 옮김, 『중국사상문화사전』, (민족문화문고, 2003),513-550쪽.
혼백은 그 자체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적인 초월성을 결여한다. 영(靈)이라는 초월적 실재와 관계를 맺는 한에서 ‘혼백’은 비로소 ‘영혼’(靈魂)으로서 한시적으로 약동한다. 기독교에서 ‘창조의 영’, ‘생명의 영’은 혼백(영혼)과 생동하는 육체적 몸의 근거가 된다.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II/2, Zurich 1948, 414-419, 율겐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139-140쪽.
기독교신앙에서 영혼의 불멸성은 동양사상의 ‘혼백’이 잠정적으로나마 한시적으로 영존하는 것과 다르다. 죽음과 부활사이, 땅의 몸과 하늘의 몸, 육의 몸과 신령한 몸 사이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럼으로 그것이 어떤 형태로던지 연속성을 가지려면 새창조(nova creatio)라고 할만한 질적 변화와 변용이 요청된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묵시적 종말과 만물의 궁극적 새로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만인의 보편적 부활과 새하늘과 새땅의 비젼)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를 지평융합 시켰다. 언제 그러한 죽은자의 변화, 변용이 일어나는가? 그 종말의 날까지 기다려야하는 ‘중간시기’는 잠들어 있는가?
마틴 루터의 ‘영혼 수면설’은 죽은자에겐 시간이 동시에 무화되고 정지되기 때문에, ‘중간시기’라는 말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김균진, 『죽음의신학』(대한 기독교신학, 2002), 제V장 6절 참조, 355-367족. 김균진의 이 책은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 논의되는 ‘죽음과 영생’에 관한 모든 신학적 담론의 권위있는 결정판이라고 볼수 있다.
그것은 산자들의 회상과 기대가 빚어내는 환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러한 죽은자들의 변화와 변용은 죽음 직후에 곧바로 발생한다. 그것이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K. Rahner, G. Greshake, G. Lohfink, H. Vorgrimler등). “삶은 변화되지 폐기 되지 않는다”(Vita mutatur, non tollitur). 율겐 몰트만, 위의 책, 148쪽.
3.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미에 대한 신학적 해석지평의 확대심화
3.1.‘성도의 교제’는 산자들간의 에큐메니칼 코이노니아를 넘어서는 신앙고백
사도신경 제3항목 “성령을 믿습니다” 로서 시작되는 신앙고백은, ‘거룩한 공회’에 대한 믿음 다음에 ‘성도의 서로 교통함’(communio sanctorum)을 고백한다. 그 고백 구절은 일차적으로 보편적 교회에 속한 성도들간의 친교와 영적 연대와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에 국한 할 수 없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들과 죽은자들사이의 시공의 제약을 넘어선 교통의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려고 하신 것입니다”(롬 14:9).
“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 나는 확신 합니다. 죽음도 삶도....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율겐 몰트만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직후에 ‘변화’를 입어 그리스도안에 있는 초월적 빛과 사랑의 영계 곧 초월적 은혜의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지만, 그 ‘영화된 생명’은 아직 ‘부활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실 것이다”(빌3:21) . 그 변화가 언제 일어나는가?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은 “죽은 사람들의 개인적 부활은 죽음과 함께, 그리고 죽음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율겐 몰트만, 위와 같은책, 191쪽.
이렇게 이해할 때, 영혼불멸설과 몸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차이는 극소화된다.
율겐 몰트만은 개인이 죽음과 동시에 겪는 영적 변화 곧 ‘죽음 속에 있는 부활’을 인정하면서도 어디까지나 만물이 새로워지는 궁극적 종말과 죽은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역사적 ‘선취’로서 이해 할 것을 제안한다.
3.2. ‘성도의 교제’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안에서 가능
산자와 죽은자간의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근거는 어디까지나 살아계시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안에서, 성령의 현존안에서 가능하다. 그 영적 현존이 없을 땐, ‘이곳’과 ‘저곳’은 질적차이가 있어서 연대와 소통은 불가능하다. 산자들은 4차원의 시공간 안에 갇혀있고, 죽었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성도들은 그 제약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마치 주파수가 다른 전파나 음파가 서로 소통이 불가능하듯이 ‘성도의 교통’은 심리적 그리움이나 회상과 추억행위로 그친다.
설혹 같은 시공간 안에 함께 있을 지라도 ‘존재방식과 생명의 영적 차원’이 다르면 서로 통 할 수 없다. 예들어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영장류 동물중에서 고릴라나 침판치는 호모사피엔스와 해부학적으로는 유사하다. 그러나, 호모사피엔스의 생명현상에서 발현한 ‘영적 감득력’ 차원을 하급차원의 진화생물이 지니지 못하며, 인간의 영적 정신적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땅의 몸”이 갖추고 있는 생명의 영적 주파수와 “하늘의 몸”이 갖춘 영적 주파수 차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은 모든 시공간의 존재론적 토대가 되는 창조주의 영이시다.
3.3. ‘성도의 교제’는 심리적 추억회상이나 주술적 초혼행위(招魂行爲)가 아닌 초시공간적 공재성 체험
‘성도의 교통’이 일어나는 시공간은 일상적 생활 속에서 시공간 체험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가 말하는 ‘영원’은 단순한 ‘시간의 무한한 연속’도 아니고 시간이 소멸된 ‘무시간성’도 아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것은 시간의 충만이고, 과거?현재?미래라고 부르는 시간체험의 삼중적 분렬상이 극복되어 통체로의 시간체험이며 통전된 시간체험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시간성은 곧 영원성인데, 하나님은 무시간적도 아니고 유한 한 피조시간의 무한한 연장도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근원적이고, 본래적이고, 창조적인 시간이다. K. Barth, CD. III/2, p.545. As He was, is and will be simultaneously without limit or seperation, His eternity is original, authentic and creative time.
인간이 ‘계시의 시간’을 경험 할 때, ‘거룩하신 이의 현존’을 체험 할 때, 불완전하나마 일시적으로 그런 성격의 시간에 동참하면서, 시간은 ‘영원한 현재’로 체험된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고전물리학과 칸트철학의 인식론에서 전제하는 ‘객관적인 절대공간’이 새롭게 해석된다. 시공간은 오성의 선험적 ‘직관형식’ 이 아니다. 사건과 발생으로 채워지지 않은 빈시간, 빈공간은 없다는 말이다. 또 일상의 체험처럼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실재도 아니다. 우주는 그 어떤 생성과 형성중에 있는 사건발생적 실재들로서 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텅빈 절대공간 안에서 이런 저런 사건이 발생하거나 사물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간 개념은 제한된 실존의 거리와 분리체험에서 유래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서 생기(生起)하는 것이지, 자기 혼자 독존적으로 실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불교적 실재관의 핵심인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이 말하려는 바가 그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실재들은 다른 것과 관계안에서, 다른 것을 통하여, 다른 것 안에서 존재한다. 몰트만은 이러한 공간개념을 ‘페리코레시스 공간개념’(perichoretischen Raumbegriff)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존재들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 처럼, 우리는 언제나 다른존재들을 위하여, 그들 안에서 존재한다. 인간적 사귐 속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을 통하여 자유의 공간들을 열러주거나 아니면 위협을 통하여 이 공간들을 폐쇄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현존과 공간과 거하는 곳이다. 율겐 몰트만, 위와 같은 책, 514쪽.
‘삼투의 공간개념’에서 상호삼투(perichorese)라는 어휘가 지닌 뜻은 관계하는 실재의 순환관계성과 상호내주성을 통하여 충만한 생명의 발현을 지시한다. 추모예배식이 어느 가정의 거실이나 강당에서 진행될 때, 죽은자가 산자들과의 사귀임을 가지기 위하여 그 특정한 공간의 어디엔가 공간적 정위(定位)를 가지고 임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시공간 개념‘과 ’실체론적 주객구조 도식‘을 전제로하여 익숙된 인간의 사물체험방식의 습관성 때문이다.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죽은자들이 추모식이나 제사를 드리는 공간에서의 현존은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령’에 임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피조물인 세계의 시공간 안에 하나님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시공간이 하나님 안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지성소는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이 현존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사생관과 제례에서 강조하는 ‘영성출세설’(性靈出世說) 의암 손병희, 『무체법경』, ‘성령출세설’ (명지사, 1985), 319-327쪽.
이나 ‘향아설위론’(向我設位論) 『해월선사 법설해의』, (19)‘향아설위’ (천법출판사, 2000), 441-466쪽.
이 말하려는 본래의도일 것이다. 천도교의 성령출세설에 의하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은 천국이나 저세상 타계에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 울안에로 변환하여 무궁한 생명을 현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후손들과 함께 일궈나간다. 천도교인들에게 철저히 생활화되지 못했지만, 벽을 향해 진설하던(향벽설위) 제사상을 철폐하고, 후손들의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는 조상들의 영을 배례(拜禮)하면서 청수일기(淸水一器)만을 상징적으로 놓고 향아설위를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 않다.
4. 제례에서 절하는 문제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에서 총체적 몸언어로서 ‘절하기’ 행위의 상징성을 기독교는 바르게 재해석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문화풍토 속에서 제례에서 ‘절하기’의 행동은 일종의 총체적인 ‘몸의 언어’였다. 발화된 말이나, 과장된 몸짓이 최소한 절제된 상태로서, 특히 종교적 영역인 시공간적 상황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조심스러움, 신중함, 삼가는 맘, 경외감, 존경, 못다 효도하고 못다 사랑했던 잘못에 대한 회한과 용서를 비는 맘, 죽은자의 명복을 비는 맘등등이 총체적으로 응결된 가장 적절하고도 절제된 인간적 행동이었다.
그런 전통문화 속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전통적인 유교적 제례가 지닌 여러 가지 현실적 폐단들( 지나친 예전 형식주의, 과다지출되는 경제적 부담, 가정주부의 노동의 혹사 등)을 극복하거나 철폐하려는 의도가 동반되지만, 명분상으로는 성경문자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 금지조항을 제례의 절하기 행동에 부적절하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무리하고, 적절치못한 신학적 해석의 과오는 천주교 전래당시 10,000명 가까운 신도들의 순교를 불러오는 비극의 직간접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개신교의 제례문화에 혼동과 전도의 장애조건중 한가지가 되어버렸다.
이글 서론에서 언급한바대로, 한신대학교 신학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공인된 객관적인 전문통계조사 연구단체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하여 조사한 여러 가지 통계자료중, 전통제사문제와, 절하는 문제에 대하여 18세이상 성인 1,000명을 샘플로 조사한 문항자료 두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 펴냄, 『한국인의 문화의식조사』(한울아카데미, 2005) 220-221쪽.
<문 28> 우리나라의 전통제사나 차례 풍습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사상과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곳에 들어가는 도표는 원문을 클릭하여 참조하십시오.)
위 통계표에서 한국인 1000명의 응답자중, 제사나 명절날 차례풍속이 특정종교인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전통문화라고 이해하는 비율에서 일반인과 기독교인은 각각 68.%, 16.6%로나타났다. 종교별로는 천주교, 불교,원불교등은 평균 75% 이상이 제사를 문화적 전통으로서 긍정적으로 수용하지만, 기독교인은 40.4%이상이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만큼 기독교인은 한국 사회 구성원중에서 제사문제를 비롯한 전통문화와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표징이 된다.
<문27> 종교적인 이유로 가족들이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절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곳에 들어가는 도표는 원문을 클릭하여 참조하십시오.)
위 설문표에 의하면, 제례에서 절을 하고 안하고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니까 존중해 줘야한다는 응답자가 59.5%로서 의외로 많았다. 특히 기독교인은 83.6%로서, 절하지 아니하는 자신의 신앙고백적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인다.
한국 가톨릭교회 주교회의는 2002년 추계정기총회 결정에 따라,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천주성교 예규』(1864)를 수정보완하여 토착화된 『상장 예식』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편찬, 『상장 예식』(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1판,2004 제2판 2006)으로 출간하여 신도들과 사제들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조상제례부문이 별쇄로 되어 출간하였는데, 제III항 ‘제례’ 부분의 제례순서를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 마음의 준비로 고해성사를 받고 마음을 깨끗이하여 돌아가신 고인을 생각한다.
(2) 몸의 준비로 목욕재계하고 몸가짐을 바르게하며, 최고의 품위와 예모를 갖출 수 있는복장을 착용한다.
(3)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특히 제사드릴 곳을 잘 정돈하고 꾸민다. 벽에는 십자가를 모시고 그 아래에 고인의 사진을 모시며, 제상에는 촛불과 향을 놓는다. 정성껒 제물을 진설할 수도 있고 꽃으로 꾸밀 수도 있다.
(4) 해설: 제사의 취지 설명과 함께 개식을 알린다.
(5) 성호경과 성가 : 성가를 부르는 동안 영정을 내모실 수 있다.
(6) 분향배례: 제주(祭主)가 분향 한후, 참석자 모두 제주와 함께 재배(再拜)한다.
(7) 시작기도
(8) 시편송도
(9) 성서봉독 : 집회 3:1-16; 요한 15:1-17; 1요한 3:14-18; 에페5:5-20등.
(10) 주례자의 말씀 : 주례자는 성서말씀을 바탕으로 제사의 의미, 선조의 유언, 가훈등에 대해 되새긴다.
(11) 신앙고백(사도신경고백)
(12) 보편지향기도 : 보편지향기도는 자유롭게 바칠 수 있으며, 대신 다른 기도문을 바칠 수도 있다.
(13) 분향과 배례: 술,과일, 음식, 꽃등을 봉헌 할 수도 있다. 참례자가 많을 때에는 대표자 몇이 할 수도 있다.
(14 독축(讀祝))
(15) 묵념: 침묵중에 고인께 감사드리며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진다. 아울러 필요한 은혜에 대해 선조께 전구를 청한다.
(16) 화해와 사랑의 인사
(17)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을 바친다)
(18) 영광송
(19) 작별배례
(20) 마침 성가
(21) 음복(飮福) : 사랑과 일치의 잔치를 통해 선조와의 교통, 기족간의 일치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상의 새롭게 제정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제례의식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볼 수 있다. (i) 준비단계에서 벽에 십자가와 영정을 모시고, 제상에 제물진설이나 꽃으로 꾸밀수 있도록 열어 놓은점. (ii) 분향재배하고, 작별배례하는 ‘절하는 예법’을 수용한 것 (iii) 묵념중에 선조께 전구를 청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죽은자와 산자가간의 쌍방적 ‘성도교제’의 가능성을 열어보인 것. (iv) 음복을 통하여 가족간의 일치만이 아니라 선조와의 통교를 심화하도록 배려한 것등이다.
5. 나가는 말
한국 가톨릭교회의 제례의식에 비교할 때, 한국 개신교 가정의 일반적 추모식은 다음같은 단점을 지니고 있다. (i) 추모식이 이세상과 저세상의 질적차이가 강조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 실재관의 구조 안에서 창조적 발상법이 억압되고 경직화 됨으로 인해, ‘성도의 교통’은 단절되고, 제례가 기념식 혹은 신앙다짐의 시간으로 변질되어 영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 (ii) 극단의 우상숭배 금지계율에 속박당하여, 영정모시기 ? 영정앞이나 성묘시에 절하기 ? 음식이나 꽃 드리기 ? 향올리기와 촛불켜기 등마져 금기시하여 예식의 상징성이 도태되고 ‘문자와 언어의 남발’이 주도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의 토착화된 제례를 반드시 본받을 필요는 없다. 특히 음식을 제상에 진설하는 일을 다시 복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절하기’의 예법을 ‘우상숭배 족쇄’에서 걷어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라는 영적 교통의 가능성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생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의 처절한 죽음사건을 겪고 제자들이 절망한 후, 부활의 아침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을 수 없는 참 사람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부활한 몸’으로 다시 일으키셨다는 체험적 신앙 고백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증언안에, 아직도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면서 만물의 갱신과 죽은자들(주안에서 잠든자들)의 ‘보편적 부활’과 악한 세력에 대한 심판을 대망하는 묵시적 종말신앙 색조가 진하게 남아있는 증언들이 있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변용되어 주님과 함께 있다는 신앙도 병존해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죽음 직후, 유한한 생명체에 불과한 인간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영적 몸’을 덧입어 변화?변용된다는 믿음은 더 이상 헬라적 영혼불멸론이냐 히브리적 부활신앙이냐의 두 진영간 소모적 신학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시공간 안에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히 신비로 남을 수 박에 없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생명에 관한 담론을 폴 틸리히의 설교문 한구절로서 마감하려 한다.
“우리를 잊혀지지 않도록 보장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가요? 우리가 영원부터 알려진바 되었고, 영원 안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점만이, 우리가 영원히 잊혀진다는 공포에서 우리를 우리
를 구해줄 수 있는 확실성입니다. 우리는 잊혀질 수 없습니다. 왜
냐하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뛰어넘어 영원히 알려진바 된 존재들
이기 때문입니다”. Paul Tillich, "Forgetting and Being
Forgetting" in The Eternal Now(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3),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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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1. 가톨릭신학대학교 부설 근?현대 한국 가톨릭연구단 지음9연구책임자 박일영),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상?하)』. 가톨릭 출판사, 2003.
2. 溝口雄三?丸山松?池田知 편저/ 김석근?김용천?박규태 옮김, 『중국사상문화사전』.민족문화문고, 2003.
3. 김균진, 『죽음의 신학』, 대한 기독교서회, 2002.
4. 김이곤, 『삶,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프리칭 아카데미, 2007.
5. H. 포그리믈러 지음, 심상태 옮김, 『죽음: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 이해』. 바오로 딸, 1998.
6. 손병희, 『無體法經』. 명지사, 1985.
7. 최시형 설법/ 李?魯 解義, 『해월신사법설해의』. 천법출판사, 2000.
8. 한국천주교 쥬교회의 편찬, 『상장예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1판, 2005.
9.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 / 구책임자 김경재,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연구』. 한국신학연구소, 2005.
10. --------------, 『 한국인의 문화의식조사』. 한울 아카데미,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