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아물지 않는 ‘마지막’의 후유증!
--영화 <아무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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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베리타스 DB |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지금까지 서너 편 정도 본 것 같다.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똬리를 튼 폭력의 뿌리를 드러내거나 왜곡된 성과 사랑에 잠재된 병리적인 욕망의 세계를 해부하는 데 재기가 넘치는 이 노장이 최근 만든 <아무르>는 그의 유언장을 서사화한 듯 시종일관 울울한 종말의 분위기를 풍긴다.
음악가 출신 80대 노부부 조르쥬와 안느는 평안한 일상을 보내던 중 견디기 힘든 위기에 봉착한다. 아내 안느에게 치매 증상이 찾아온 것. 순간적인 의식 상실로 당혹감을 안겨준 안느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우측 팔과 좌측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앉아 퇴원한다. 이후의 스토리는 남편 조르쥬가 안느를 간호하면서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병세와 싸워나가는 일상의 사연들로 이어진다. 그 틈새로 두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크레센도로 증폭되는 내면의 좌절감이 내비치고, 막판에 끔찍한 방식으로 최후를 장식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소멸해가는 육신의 생명을 달래고 돌보거나 더러 그 곤경과 싸우거나 체념해가면서 생의 종착역을 향해 꾸역꾸역 밀려간다.
1. 잘 죽는 것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고대 희랍철학자들의 최고 최대의 철학적 과제였다. 오늘날 ‘안락사’로 편협하게 정의되는 어휘 ‘euthanasia’는 희랍어의 본래 맥락에서 인간적 자존을 지탱해주는 고귀한 죽음, 품위 있는 최후를 의미했다. 사상의 지맥에 따라 다소 엇갈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살 역시 명분을 지닌 경우 이러한 고귀한 죽음의 범주에 너그럽게 포괄되는 게 그 당시의 대세였다.
안느는 수술이 잘 되지 않아 의식은 비교적 멀쩡한데 신체장애만 얻게 되었다. 퇴원 후 안느의 일성은 앞으로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병원이 병을 고치면서 병을 키우는 곳이라는 비판적 진단이 이미 생각 있는 식자층에 의해 공감을 얻기도 했지만, 안느는 체질상 병원을 두려워하고 기피한다. 남편 조르쥬는 대답을 망설였지만 결국 이 약속을 지켜낸다. 그는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환자의 생명이 기계적으로 취급되는 것이 잘 죽는 것과 상반된다는 걸 공감한 듯 집에서 아내를 끝까지 지키며 간호하는 선택을 한다.
“여보, 세 숟가락 밖에 먹지 않았잖아.” 최대한 버팅기다가 음식을 거부하는 안느를 향해 남편 조르쥬가 안타깝게 더 먹으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안느는 얼마 뒤엔 물까지 거부하다가 조르쥬에게 뺨을 맞는다. 이후 안느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언어능력도 상실하고 통제할 수 없는 발작적 반사행동에 몸을 맡긴 채 예측 불가능한 지경으로 추락한다. 더 이상 구차하게 생명을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순간, 아내의 징조를 남편이 수락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 뒤 베개로 얼굴을 짓눌러 죽여준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기 싫었던 안느, 더 이상 괴로운 꼴을 봐주기 어려웠던 조르쥬는 마치 암묵적 합의라도 한 듯, 마지막에 이른 것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수동적인 식물인간으로 생명의 극단에 처한 마당에 더 이상 추해지길 거부한 주체적인 선택이란 점에서 그 마지막 과격한 행동은 ‘잘 죽기’(euthanasia)의 고전적 명분에 부응한다고 봐줄 만하다.
2. 집과 문
이 작품에서 압도적인 상징은 집이다.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음악회의 장면 한 순간만 빼면 집 안의 공간을 일관된 배경으로 보여준다. 거실과 부엌, 침실, 화장실, 복도, 또 그 공간을 움직이는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은 인간의 죽음이 거주의 연장선상에서 평온히 치러지길 기대하는 감독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안느를 죽여준 조르쥬는 마침내 그 실내의 문을 테이프로 봉함으로써 주거공간을 무덤으로 만든다. 거주는 노동이 쉼을 얻고 잠과 꿈을 잉태하는 자리이다. 비록 죽더라도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죽고자 하는 소망, 나아가 그 집의 기억을 죽음 이후에도 지속하고자 하는 꿈이 그 기괴한 봉인의 행동 가운데 얼핏 암시된다.
사자와 동거하는 그 비일상적 집의 공간적 재구성은 무섭지만 동시에 예술가다운 상상력을 머금고 있다. 이와 같이 그 본질적 의미와 가치가 재구성된 집은 딸 에바가 병든 엄마를 찾아와 부동산 투자 차원에서 집을 화제로 떠들 때의 그 집과 대조적 위치에 있다. 언어 기능을 상실한 안느가 딸이 말하는 집 이야기에 반응하여 떠듬거리며 ‘할머니... 집... 팔고...’를 중얼거릴 때의 그 집이 풍기는 분위기 역시 인간이 상실한 집의 신화적 아우라를 머금고 있다.
이 작품은 문에서 시작하여 문에서 마무리된다. 맨 첫 장면의 문은 맨 마지막 장면의 문과 만난다.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이 그 집의 문을 따고 들어오는 첫 장면은 딸이 장례식을 마치고 문을 따고 혼자 들어와 거실에 안는 마지막 장면과 맞물려 이야기의 서두와 결미를 구축한다. 수미상관의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에서 문의 이미지는 이야기를 요란스레 열고 차분하게 닫는 기능을 맡고 있다.
몸통 부분의 주인공들이 주도하는 이야기 역시 그 안에서 문과 함께 시작되고 문과 함께 종결된다. 안느와 조르쥬가 제자 알렉상드르의 음악회에 갔다가 돌아와 문을 따는데, 도둑이 들어 그 문이 망가진 상태였다. 종말의 때가 도적 같이 오리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부응이라도 하듯, 도적이 망가트린 문의 수상쩍은 느낌과 함께 그날 밤 안느의 질고는 도적 같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두 부부의 고된 동거가 마무리된 때 거실에서 남편 조르쥬는 아내 안느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듣는다. 판타지 장면으로 설정된 이 대목에서 조르쥬는 아내의 안내를 받아 외투를 걸치고 함께 문을 열고 나간다. 음악회에 가는 첫 장면으로 짐작되는 이 시작은 영화의 마지막에 배치된다. 반면 음악회에서 돌아와 고장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은 첫 대목에 설정되는데 이는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생의 원환관계를 암시하는 구조적 알레고리이다.
3. 물의 이중성
안느가 식탁에서 식사 중 멍하니 의식을 상실한 블랙아웃 상태가 되자 조르쥬는 수돗물을 틀어 냅킨에 물을 묻혀 아내의 얼굴과 목에 대고 마사지해준다. 경황 중이라 조르쥬는 수돗물을 잠그는 걸 잊어버린다. 조르쥬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오던 날, 안느가 휠체어에서 떨어져 바닥에 처연하게 앉아 있을 때 바깥은 빗소리가 들리며 젖고 있었다. 불안한 물의 이미지가 그 순간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또 한 번은 조르쥬가 악몽을 꿀 때 그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복도에는 물이 흥건하게 차올라 있다. 죽음과 같은 공포의 손이 그의 입을 막은 것은 그가 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막판에 죽은 아내의 시신에 꽃향기를 남기려고 꽃다발을 사와 그 꽃을 하나씩 가위로 따서 물에 담그는데,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서는 수돗물을 제대로 잠근다. 물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생명의 표상이지만 이 영화에서 그 물은 스스로 틀고 잠글 수 있는 수돗물과 같은 방식으로 주체적인 생명이 되어야 할 것을 종용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 대책 없이 방치된 물은, 복도의 그 흥건한 물처럼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운 저주의 생명일 뿐이라는 것.
4. 낯선 타자들과 환대
안느와 조르쥬가 머무는 집에는 몇 명의 바깥손님들이 찾아온다. 딸 에바는 모두 네 번 찾아온다. 한 번은 바람둥이 남편과 함께, 나머지 세 번은 혼자서 방문한다. 병든 엄마를 위로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외려 아버지 조르쥬를 성가시게 할 뿐이다. 그 딸은 안타까워하고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신 없는 엄마의 침상 앞에서 건강한 몸으로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방식의 한 화제로 부동산 투기 등 돈 잘 버는 대책을 쏟아낼 뿐이다. 음악회에 초대해준 제자 알렉상드르도 한 차례 찾아와 옛날 어린 시절 안느 선생님한테 배우던 곡을 연주해주지만 안느는 제자 앞에 불구가 된 몸을 내놓기가 민망하고 구차스럽다.
이웃의 젊은 부부는 식료품을 사다주는 역할로 아내와 남편이 차례로 두 번 찾아와 사소한 도움을 베풀고 의례적인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환자 침대를 놔주기 위해 물건 배달꾼 두 명은 말없이 찾아와 사라지고 간호조무사 두 사람은 거동이 힘들어진 안느의 목욕과 집 청소 등 시중을 들어준다. 이 건강한 손님들은 건강한 자의 입장에서 위로하고 도와주고 노동의 거래조건에 맞춰 돈을 받고 시중들어주지만 상투적인 부대낌일 뿐, 지속적으로 함께 해주는(sustaining) 삶의 소통적 진정성과 거리가 멀다. 이성복의 한 시구처럼 거짓말로 위로하고 거짓말로 위로받는다는 진부한 세속의 장벽이 그 한시적인 스침 가운데 강고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나 창문으로 우연히 날아 들어온 비둘기 한 마리는 그 장벽을 넘어서는 희망의 전조 같다. 아직 안느가 투병 중이던 때 날아든 그 비둘기를 조르쥬는 급하게 내쫓는다. 이후 안느가 죽고 나서 두 번째로 그 비둘기가 날아들었을 때 조르쥬는 천천히 그 비둘기를 따라가며 담요를 뒤집어 씌워 잡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그 비둘기를 마치 자신의 어린자식처럼 품에 안고 보듬어준다. 정문으로 들락날락한 사람들은 사물화된 타인으로 인습과 거래의 대상처럼 조명되는 데 비해, 창문으로 들어온 비둘기는 사물화된 타자의 위치에서 조르쥬의 가슴으로 옮겨져 인격적인 당신으로 환대받은 뒤 자유의 몸이 되어 돌아간다. 마치 죽은 안느의 분신처럼 그렇게 그 날짐승은 조르쥬의 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5. 아물지 않는 후유증
죽음과 싸우는 자리에서 바깥의 출구는 요원하다.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꾸역꾸역 식사를 해야 하고, 집의 좁은 공간을 오락가락하면서 실내형 인간으로 버텨야 한다. 바깥을 멀리 헤맨 뒤 결국 되돌아와야 할 자리는 자신의 거주공간에서 지루하게 일상을 반복하는 제 몸의 덤덤한 실존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바깥에서 누릴 만한 최고의 선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조차 벽에 걸린 그림처럼 인공물로 조명된다. 그렇게 고정된 벽면의 인공 자연들은 죽음에 근접한 생명이 돌아가야 할 미래의 풍경처럼 고정된 상태로 먹먹하고 기묘한 인상을 준다. 죽은 자가 말이 없듯, 사물화된 자연 역시 주체적 자기표현의 생동감을 잃는 침묵일 뿐이라는 뜻일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내 옛적 연구의 최대 화두였던 ‘좋은 죽음’의 문제가 다시 심상에 불거졌다. 80대 두 노인이 병든 몸으로 식사하는 장면이 어찌나 민감하게 내 의식의 뇌리에 새겨지는지 싸안한 뒷맛을 남겨놓았다. 조르쥬와 안느를 연기한 노련한 두 배우(장 루이 트랭티냥, 에마뉘엘 리바)는 최대한 절제된 최소한의 표현으로 곡절 많은 내면의 많은 것들을 드러내주었다. 늙어가는 나 같은 50 초입의 중년들에게 이 영화는 성찰의 지표로 한 몫 하면서 자신의 미래 언젠가 맞닥뜨릴 고단한 운명을 미리 준비시켜주는 각성의 화두망치와 진정제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무르’(사랑)이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치열하게 삶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는 고된 역경이자 숨찬 역정이다. 죽음은 아무리 담대한 인간일지라도 건너기 두려운 실존의 늪이다. 그러나 조르쥬가 안느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감춰둔 이야기를 건네고 이로써 공감하는 동안 그 죽음의 공포는 잠시 망각되고 죽음의 그 실존은 자꾸 유예된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죽음의 자의식에 민감해질수록, 사람들은 그렇게 대책 없는 수다에 익숙해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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